50화
*
“제길!”
낮임에도 커튼을 쳐 어두운 방 안.퍽―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크리스털 잔이 벽으로 날아가 산산조각 났다.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이 꼴이 난단 말이야!”
잔뜩 성이 난 알렌 데이비드가 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 안의 물건들을 죄다 부수기 시작했다.그에 미동 하나 없이 서 있는 두 남자가 있다.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그치들은 버리시지요.”
귀족임에도 그간 사교계에 얼굴 한 번 드러내지 않았던 한스 자작의 표정에 비열함이 깃들었다.
여느 귀족과 같이 명예를 업으로 삼지 않은 그는 데이비드 후작의 뒤에서 제 잔혹함을 펼치는 것에 만족했다.비오첼라가 앞서 귀족들을 상대하며 판매상 노릇을 해왔다면, 한스 자작은 그 모든 물건을 조달하는 역을 맡아왔다.사람의 정신을 좀먹는 약물들부터 제국 내 음침한 귀족들의 만족을 위해 구해온 노예들까지.
“백작과 영식은 황궁 지하 감옥에 구금된 상황이고, 저택은 한바탕 수색을 마친 모양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 후작이 입술을 짓씹었다.저택 내에서는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한 듯하나, 이번에 걸린 상단의 마차 내에 숨겨두었던 노예와 약물 모두를 들킨 터라 무죄를 주장하지는 못할 성싶다.
“멍청한 것들.”
비오첼라가 마련해 온 돈이 제 평소 씀씀이의 절반 이상을 맡아왔기에 놓치기 아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연이 닿아 있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 더 급했다.
‘돈이야 다시 만들면 돼.
문제는…….’
지금 그들과 엮여 있는 것이 들통나면 제게도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드러날 위험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 작자가 이런 일을 대비해 강구책을 세워두지 않았을 거란 보장이 없어서.”
그 야비한 작자들이 제 숨구멍 하나 만들어두지 않았을 리 없겠지.과연 그게 뭘까? 어디에, 어떻게 감춰뒀을까?
“저택에 남아 있는 게 비오첼라 계집 하나라고?”
“예.
백작 부인은 정신을 잃었고, 딸은 현재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칩거 중입니다.”
그 멍청한 계집이 내내 제 주제를 모르고 후작 부인 자리를 넘보던 걸 참아준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손발이 묶인 비오첼라 부자 대신 그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라면.’
“제 핏줄 하나겠지.”
초조함과 짜증이 잔뜩 묻어나던 후작의 얼굴에 한 줄기 여유가 들어찼다.
“자작, 한동안 조용히 있어.”
지금은 바짝 엎드려 몸을 사릴 때였다.
함부로 움직여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예, 아무렴요.”
제 모습을 어둠에 감추는 데 도가 튼 이였다.
한평생 양지로 발을 내디딘 적이 없는 자작에게 이보다 쉬운 일이 있을까.하나 그러는 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없다는 것만은 아쉬워 입맛을 다시는 한스 자작이었다.
“너는 비오첼라 계집과 황궁 내 그치들을 잘 살펴봐.”
“예, 명 받들겠습니다.”
인간이 맞나 싶게 언제나 무표정에 목소리에마저 이렇다 할 감정이 섞이지 않는 자를 자작이 멀거니 바라봤다.
‘저거는 인간이 맞나 몰라.’
몇 년을 함께 데이비드 후작의 밑에서 일했지만, 말 한 번 섞어본 적이 없었다.
듣기로는 고아를 데려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길들였다 하던데.
“이 작당을 과연 황태자 혼자 계획한 것일까.”
새로운 잔에 따른 술의 찰랑임을 보던 후작이 단숨에 그를 입에 털어 넣었다.상단의 그 난리 속, 멀찍이 떨어져 비오첼라를 감시하던 제 사람 하나가 살아 돌아왔다.
소란이 일기 시작한 직후,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여기고 내뺀 이.
- 화, 황실 기사단이 들이닥치고.혼비백산해 정신을 못 차리던 자 앞에 검을 꽂아 넣으며 본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하라, 종용했다.
- 히익.
거,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 그리고.
아, 귀족 영애가.
그래, 맞아.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상해서 기억이 납니다.
귀족 영애가 둘 있었던 것 같습니다요.
“검은 복면이랑 귀족 영애라…….”
대외적으로 황태자를 내세웠지만, 일은 다른 이들이 치렀다는 건데.
‘생각나는 연놈이 있기는 하군.’
후작이 이를 갈며 황태자 그리고 두 인물을 떠올렸다.
저를 무시하기로는 제국에 따를 자가 없는 이들이었다.
“…….”
끝내 제 성질을 못 이긴 후작이 부들거리던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 손을 떠난 두 번째 잔이 벽 앞에서 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진다.
“두고 봐.
내가 저들보다 높이 올라가 보이겠어.
너희가 날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제국을 휘두르는 이가 될 테니까.”
후작의 눈에 불이 일었다.
제 그릇을 뛰어넘는 그 불길이 그를 삼켜버릴 듯 일렁인다.*비오첼라 저택과 숲, 양쪽에서 백작가를 친 그날 이후.사교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기세등등하던 백작 가문 하나가 하루아침에 황궁의 지하 감옥에 자리하게 된 사건.그를 떠들기 바쁜 귀족들과 달리 일을 주도한 우리는 더 나아가 생각해야 했다.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이를 도모하기 위해 윈데이너 저택을 찾아준 스텔라.
“다들 비오첼라와 선 긋느라 바쁜 것 같더군요.”
며칠 만에 만난 스텔라는 한층 더 요염해졌다.
‘막 너무 반갑고 그렇다?’
쓰러진 이후, 감금 아닌 저택 감금으로 시간을 죽이다 겨우 사람 냄새를 맡으니 이리 좋을 수가 없네.
“죄목이 죄목인지라.”
엮였다 하면 줄줄이 감옥 가게 생겼는데, 없던 인연도 샅샅이 뒤져서 끊어내고 싶겠지.
‘그래도 아쉽기는 하다.’
워낙 사안이 중대하고 커서 엮인 이들을 솎아낼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덕에 여럿 놓치게 생겼다.
“보아하니 제국 내에서도 노예 거래를 일삼은 것 같은데.”
케이크를 가르는 그녀의 칼질이 날카로웠다.
얘 칼도 쓸 줄 아나, 혹시? 어쩐지 자세도 남다르고 말랐는데도 다부진 느낌이 물씬 나는 몸에 의심이 커졌다.
“저택을 뒤져도 별다르게 나오는 것이 없다 하니, 심증은 있으나 다 잡아들일 증거가 없네요.”
조각낸 케이크를 야무지게 입에 넣은 그녀가 특유의 몸짓으로 차를 음미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네.
예뻐서.’
“분명 있을 텐데요.”
동의하는 바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뒤가 찝찝한 일을 하는 놈치고, 특히 야비함을 몸에 두르고 사는 그들이 제 목숨 줄 하나 구비해 두지 않았을 리 없는데.분명 관련한 자들을 옥죄고 움직일 만한 무언가를 남겨두었을 거다.
“혼자 죽을 수 없으니 내가 끝나면 너희도 끝이다, 라고 으름장 놓을 만한 거 말이죠?”
“그렇죠.”
빙긋이 웃은 스텔라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검지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황실 기사단이 워낙 촘촘히 저택을 에워싸고 있어서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자칫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레사가 걸리면 큰일이지, 암! 안으로 밖으로 드나든 이가 없으니 이렇다 할 것이 있다면 아직 저택 내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황태자 전하가 워낙 꼼꼼한 구석이 있으시니까…….”
아, 휘몰아치는 일정에 잠시 미뤄뒀던 황태자와의 일이 점차 다가온다.
이젠 바쁘지도 않았다.그러니까 고민을 미룰 핑계가 더는 없다는 뜻이다.
“전하와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티 났어?’
황태자를 입에 올림과 동시에 표정이며 처지는 어깨며.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알아달라는 시위가 아니면 뭔가 싶다.미안하다.
내가 이렇게 생각이 짧다.두 손으로 감싼 찻잔에 고정한 시선을 들어 스텔라를 살폈다.
그녀는 황태자를 마음에 품은 사람이니까.
‘…관계가.’
너무 어려웠다.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두렵다.
내 멋대로 친구라 여기는 좋은 사람.
‘어떻게 봐도 내가 너무 미울 것 같은데……?’
아니지, 스텔라는 마음이 넓고, 또 되게 이성적이고.
게다가 멋지기까지 하니까! 어쩌면 이 상황에도 나를 편히 봐주지 않을까?이상한 기대감에 눈을 빛내며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를 바라봤다.
‘미쳤네, 나.’
퍽―스스로 손을 들어 머리를 내리쳤다.
“여, 영애?”
좀처럼 놀라지 않는 스텔라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했다는 사실을 만끽할 틈도 없이 우울해진다.
‘여태 황태자 곁에서 자리를 꿰차고 있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인데.’
이 이상 더 이해를 바라다니, 미치지 않고서야!스텔라는 그녀 마음 가는 대로 감정을 가질 권리가 있어.
지금 이 상황에서 배려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이윽고 마음을 정리한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강렬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네가 날 피한다면, 시간도 주고 얼마든지 배려할게.’
그렇지만 절대 내 쪽에서 손을 놓는 일은 없을 거다.
기다리고 쫓아가고 수없이 손을 내밀어서 친구가 되고 말 테다.이렇게 나도 내 멋대로 하니 스텔라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지.
“저기, 영애.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며…….
그 두 손 불끈 쥐는 행동 하며.
정확한 진상은 몰라도 고민이 많다는 것은 알겠네요.”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의 스텔라가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다.
“더 묻고 싶지 않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이건 필시 귀찮으니까 그만두라는 신호다.그리고 어차피 이건 말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누구에게도.
“네.
다만 하나만 기억해 줘요.
전 진짜 영애가 좋아요.
오래도록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빤히 눈을 맞추고 미심쩍은 눈빛을 쏘는 그녀에게 눈썹을 들썩여 보였다.
‘대답은? 응? 이거 진짠데?’
“아, 예.
뭐, 그러죠.”
과연 내가 전한 진심이 반의반의 반이라도 전해진 것인지 퍽 의심이 가는 반응이었지만.이만하면 됐다.
칼같이 나를 도려내던 그녀가 비록 귀찮음과 건성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얼굴로라도 대답은 해주니까.상쾌하게 웃는 내 얼굴을 봐서일까.
스텔라도 따라 웃는데, 미묘하게 비틀린 것이 등골이 서늘하다.
“그보다 저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뭐, 뭐가?”
“두 분 사이를 제가 언제까지 모른 척해 드리면 되는 걸까 싶어서.”
쿠궁―지금 뭔가 커다란 바위 같은 게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들켰다.
‘안 들켰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뻔뻔한 건가.’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씀일, 까요?”
우선 모른 척해 보자 싶었는데 명백한 비웃음이 돌아온다.
“각하께서 대공령에 내려가시기 전에 저를 찾아오셨답니다.”
디에고가 스텔라를? 둘이 별로 사이좋아 보이지 않던데?
“제게 친히 영애를 챙겨달라 청하고 가셨지요.”
말을 내뱉는 스텔라의 표정에 금이 갔다.
느릿하게 한 어절씩 짓씹듯 발음하는 걸로 보아 상당히 순화한 표현이 아닐까……?
‘협박? 부탁이 아니라 협박하고 갔니, 너?’
애초에 나를 왜 저가 스텔라한테까지 부탁하고 가고 난리야? 비밀 연애라며!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구나.”
어색하게 웃는데 땀이 나는 건 왜일까.
“예, 영애만의 비밀인 것 같아서.”
“아, 물론 그렇다고 영애가 꽤 잘 숨겼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라고 덧붙인 스텔라가 턱을 치켜들고 미소 지었다.틀렸다.
우린 틀렸어.
그냥 이 연애, 파기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