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또 한 번 제 눈앞에서 쓰러지는 비비안.재빨리 붙잡아 제 품에 안았으나, 입술마저 붉은빛을 잃은 그녀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지나간다.
‘…몸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는데도.’
원체 허약한 몸이다.
건강한 몸으로 약한 척을 해왔다 여기는 비비안이지만 그녀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게 분명하다.벌써 여러 번 쓰러지는 비비안의 모습을 봐온 터라 그녀의 몸 상태를 가장 우선시했으나 결국, 또 이 처참한 광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비비안을 안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선 방으로 옮기겠습니다.”
눈앞에서 딸이 쓰러지는 것을 목도한 후작이 의원을 찾으며 길을 터주었다.몸에 닿은 체온이 뜨겁다.
열이 났던 건가.
왜 진작에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자책하며 도달한 비비안의 방.이제는 익숙한 그 방을 들어서며 침대 가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까 조심스레 내려놓는 그녀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 불안하다.괴로운 듯 찡그리는 미간과 땀이 배어 달라붙은 분홍 머리칼이 그녀의 힘겨움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오갈 곳 없는 분노와 답답함에 주먹을 말아쥐고 비비안의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시녀가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그녀를 챙기는 내내.
“저, 각하.
아가씨의 의복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자 두려움보다 앞선 제 주인에 대한 충심으로 눈을 빛내는 이가 보였다.
“…….”
뒤를 돌아 방 밖으로 나섰지만, 그 이상 멀어지기 힘들었다.
닫힌 문에 기대 눈을 감는다.
“감당이 안 되는데…….”
제 손의 미세한 떨림이 여실히 느껴졌다.
피곤해서, 그간 무리해서 그래서 잠시 몸이 약해졌을 뿐이라고.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진정하려 해도 좀처럼 안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행여나 잃게 될까 봐.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군.’
이렇게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마리라고 했나.’
문이 열리고 나온 시녀가 이내 자신에게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닫혀 있는 문에 기대었던 몸을 들어 다시 비비안의 공간으로 들어섰다.한결 편한 옷차림의 그녀가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다.
미약한 숨소리가 칼날이 되어 생채기를 내는 듯 아파왔다.탁―벌컥 열린 문 사이로 내달리듯 들어오는 후작과 의원.
“자, 빨리 상태를 보게!”
후작의 재촉에 잔뜩 몸을 움츠린 의원이 비비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의원이 그녀의 몸을 살피는 그 짧은 시간, 팽팽한 정적이 공간을 뒤삼켰다.
“과로입니다.
몸에 피로가 축적되는 바람에 열이 나면서 까무룩 기절하신 듯싶습니다.”
의원의 확인에 한시름 놓은 것도 찰나, 비비안의 몸이 이렇게 한계까지 치닫도록 방치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가 내내 곁을 지켰는데.’
“그럼 괜찮은 겐가.
다른 문제는?”
후작의 안타까움이 뒤섞인 물음에 의원이 차분하게 답했다.
“예, 깨어나시면 몸을 보강하고 한동안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의원의 확답에 후작도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네.
혹시 모르니 당분간 자리를 지키게.”
그에 고개를 숙인 의원이 자리를 떴다.
“각하, 보시다시피 몸이 약한 아이입니다.”
눈동자에 비치는 원망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후작의 호소가 이어진다.
“근래 쓰러지는 일이 잦습니다.
아니라 생각하지만 부디 각하께서 이 아이의 부담이 되는 일은 없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그전에는 이리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들었다.
우연인지, 어쩌면 자신 탓인지 비비안이 쓰러지는 것을 본 것만 해도 세 번째.
“예.
저 또한 비비안이 이리 쓰러지는 걸 보는 게 무척 힘들군요.”
말로 하는 것조차 목이 메어 긁는 듯한 목소리가 나가자 후작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저도 지금 많이 괴로워서요, 후작.”
저답지 않게 약한 소리가 나가자 무언가 더 말하려던 후작의 입이 달싹이다 멈칫했다.
“…또 보고 싶지 않은 모습입니다.”
열에 달뜬 숨을 내뱉는 비비안의 얼굴이 아픔으로 인해 일그러진다.
가만히 제 딸을 보던 후작이 그녀의 이마에 한 번 닿았던 손을 내려 이불을 정돈해 주었다.한참 그렇게 침묵 속에 비비안을 살피던 중 후작이 입을 뗐다.
“각하, 그만 돌아가지 않으시고.”
“이대로, 바라만 보겠습니다.
허해주세요.”
축객령이 떨어지면 때때로 드나들던 발코니 창을 통해 다시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의 누그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몸 상하지 않게, 적당히 돌아가십시오.”
영 내키지 않지만, 미묘하게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찜찜한 시선을 두고 후작이 방을 나섰다.의자를 끌어다 비비안의 옆에 앉자 적막함이 흐른다.
시녀가 놓고 간 물에 적신 천을 들어다 그녀의 이마에 얹었다.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떼어내며 닿는 체온이 여전히 뜨겁다.
“비비안, 쓰러질 정도로 버티면 안 되지.”
할 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 아파주고 싶었다.
가녀린 숨소리만이 비비안이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 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툭―비비안의 손을 두 손으로 기도하듯 붙잡은 채 이마를 기댔다.
“흑…….”
새어 나온 신음을 따라가자 눈물이 맺힌 채 괴로운 듯 흐느끼는 비비안이 보인다.
‘의원을―’
덜커덕―급하게 일어난 덕에 의자가 긁히는 소리가 강하게 나고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에 펼쳐진 잔상.
“…윈데이너 후작 부인.”
어린 비비안이 후작 부인의 품을 파고드는 형상이 침대 머리맡에 펼쳐지고 있었다.
“엄…마.”
간절한 목소리가 산산이 부서진다.너무도 행복한 광경이라 더 괴로웠다.후작 부인의 가는 손이 어린 비비안의 등을 토닥였다.
한 걸음 더 곁으로 가 흐릿한 그림을 보았다.부인의 손이 다시 한번 허공에 떠올랐다 딸의 등에 닿기 전, 그녀 대신 내 온기가 비비안에게 뻗어졌다.그와 함께 단숨에 사라진 부인과 어린 비비안.
“미안.
이것밖에 못 해줘서.”
눈을 감고 부인의 손길을 되새기며 비비안을 달래자 흐느낌이 잦아든다.다시 안정적으로 호흡하는 그녀를 보며 한참을 다독인 후, 의자에 앉아 멀거니 비비안을 보았다.
“무섭게 하지 마…….”
두려운 것이 없던 삶이었다.
목숨이, 삶이 기껍지 않았기에 그 무엇도 무섭지 않았다.그런데 이제는 살고 싶었다.네 곁에서.그게 어떤 삶의 모습일지라도, 그저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기꺼이 내가 가진 그 어떤 것도 내놓을 수도 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그렇게 네가 온 순간.내 모든 것을 밀어내고 그 안에 네가 자리했다.
【 각자의 진심 】
‘피아노 소리……?’
아.
엄마다, 엄마.
이거 내가 좋아하는 곡이야.
평소보다 더 손에 힘을 안 주고 치는 듯 느리고 잔잔했지만, 내가 잠들지 못하는 밤이나 악몽을 꾼 다음 꼭 들려주던 그 자장가.
‘꿈인가?’
그렇다면 깨고 싶지 않은 마음과 눈을 뜨고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소리에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차오른다.다소 눈꺼풀이 무겁긴 했지만 힘겹게 눈을 떠보았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선율.
‘아, 다르다.
이것도 내가 아는 거지만.’
엄마의 부재에 따른 상실감이 채 차오르기 전에 다른 이의 존재가 그 자리를 메웠다.디에고 브라이트, 저와 같은 그리움이 담긴 이 연주는 그의 것이었다.
“…디, 에고.”
생각만큼 매끄럽게 나가지 않는 목소리에 놀라기도 잠시, 그 작은 소리를 어떻게 들은 건지 피아노 소리가 뚝 끊겼다.슬며시 고개를 틀어 피아노 가를 바라보자 고개 숙인 그의 등이 보였다.영원히 그렇게 굳어버릴 것 같던 디에고가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의자를 돌아 내게 다가오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비비안.”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이곳저곳을 살핀다.
그 분주한 눈길을 받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목, 잠긴 거 말고, 크흠.
그거 말고는.”
괜찮다는 것을 미소로 표현하려고 입꼬리를 쫙 끌어 올리자 신음이 절로 나온다.
“윽.”
어찌나 퍼석하게 말라 있었는지 입술이 찢어진 것 같았다.능숙한 움직임으로 천에 물을 적신 그가 입술을 꾹 누른다.
“계속 물을 축였는데, 소용이 없군.”
혀를 찬 디에고가 온 신경을 집중해 내 입술을 쓰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이틀이 지났어.”
경악하며 입을 벌리자 그 틈에 어디서 났는지 물을 흘려 넣는 것이 이거 디에고가 아니라 마리인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갔다.
‘환각인가? 마리 아니야?’
혼란스러움에 동공만 이리저리 굴리자 그의 한숨이 짙게 깔린다.
“처음에는 자고 나면 일어나겠지.
다시 밤이 찾아왔을 땐 그만큼 힘들었나 보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미치는 줄 알았어.”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절절했다.
“…괜찮은 거, 맞지?”
말 안 듣는 무거운 손을 들어 그의 뺨에 갖다 댔다.
그새 조금 거칠어진 그 뺨이 내 손에 기대왔다.
그리고 처연히 눈을 감은 디에고가 내 손을 감싼 채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춘다.
“미안해요.
아플 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천천히 드러나는 푸른 눈동자가 너무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뭐라도, 좀 먹자.”
먹먹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내 손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그가 문을 열고 무어라 이야기하자 마리가 우당탕탕 달려 들어왔다.
“아, 아가씨.”
이미 가득 물이 차오른 눈으로 더듬더듬 내 손을 붙잡는 마리를 보자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진짜, 제발 이제 그만 쓰러지세요.
저 죽을 것 같아요.
흐어엉.”
“미안해.”
내 잠긴 목소리가 그녀를 더 울컥하게 한 것인지 입술을 말아 문 채 눈물을 떨궜다.
“…따, 따듯한 수프라도 챙겨올게요.”
“그래 주면 고맙겠다.”
부러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 섭취에 대한 열망을 표하자 도리어 결연해진 표정으로 마리가 방을 나섰다.
‘기세만 보면 전장에 나가는 기사가 따로 없네.’
그게 또 귀여워서 잔잔히 미소 짓자 얼굴이 뚫어질 듯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저기, 디에고.”
“응?”
“대공저에는, 안 갔어요?”
설마 여태 내내 이 방에 나랑 머물었던 것은 아니겠지? 갔다가 문병 온 거지? 때마침 지금 내가 눈을 뜬 거야.
“안 갔어.”
맙소사.마, 마리.
마리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들어봐야겠다.
애초에 간병이 지나치게 능숙했다.
게다가 물끄러미 살펴본 그의 얼굴이.
‘…나보다 더 환자 같은데? 밥은 먹은 거야?’
“밥은? 잠은?”
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게 수상쩍다.
느슨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지만 이미 늦었다.
“하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피식 웃은 그가 불쑥 상체를 숙여 그 사이에 나를 가뒀다.
“흡.”
내 양옆으로 그의 팔이 단단히 자리했다.
뻣뻣하게 굳은 채 코앞에서 바라본 디에고의 눈이 야살스럽게 접힌다.
“비비,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어쩐지 그 부드러운 속삭임 사이로 억눌린 화가 느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