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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48화 (48/109)

48화

*제가 준비한 마차에 몸을 뉘이고 있는 판델 남작 영애를 보자 내내 마음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그 무게를 덜어내는 것 같았다.그간의 고생이 그녀의 온몸에 자국을 남겨둔 것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꼼꼼히 살피던 시선이 아직 채 딱지가 지지 않은 손가락에 멈춰 선다.

절로 미간이 좁혀지며 마음이 불편했다.

‘…많이도, 깨물었네.’

내가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한 건 아니었을까.

가만히 그 창백한 손가락을 어루만지자 판델 남작 영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쉬이, 괜찮아요.

이제 다 끝났어.”

그녀의 엉킨 금발을 부드럽게 토닥이자 긴장으로 경직된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판델 남작 영애, 한 사람이 아니라고.”

가만히 날 보는 듯하던 브라이트의 기사단장이 내 물음에 답을 주었다.

걸어오는 동안 비오첼라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해 왔는지.또한 만에 하나 걸릴 경우, 그들이 취하려던 조치가 무엇이었는지.판델 남작 영애가 입고 있는 하녀복에 눈길이 갔다.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쉽사리 사람의 목숨을 취하려던 것, 일개 하녀로 위장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그 치졸한 생각.치가 떨렸다.

“…영애들은 제가 먼저 데려간 이후에 필요한 증언이 있을 경우, 그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황태자의 기사단장과 눈을 맞추고 그 올곧은 시선에 답을 구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황궁으로 가는 것이 맞지만, 그녀들은 이미 많이 지쳐 보였다.

‘내 욕심인 것은 알지만.

조금이라도 몸과 마음을 보살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고 싶어.’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외로 흔쾌히 긍정한 그가 깊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후 돌아섰다.

‘진짜? 이렇게 쉽게?’

꽤 실랑이할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는데, 당황스럽다.

나는 기사단장이 서 있던 자리가 텅 빈 것을 한참 바라보다 옆에 선 디에고를 봤다.

“원하던 대로 되어서 다행이네.”

복면을 벗어 던진 그의 얼굴이 찬란했다.따스함이 느껴지는 그 미소가 오로지 날 향해 있다는 사실에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그만 돌아가자.”

손을 잡은 그가 마차로 나를 이끌었다.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마차의 위용에 감탄할 새도 없이 태워진 내 뒤로 그가 올라선다.

“이렇게 큰 마차는 대체 어디서…….”

“비비안, 몸 괜찮아?”

걱정스레 내 이마와 볼을 쓰다듬는 디에고의 표정이 어둡다.

그 걱정이 어쩐지 기분 좋은 간질거림을 선사했다.

‘…내가 좀 이상해진 게 확실해.’

사람을 걱정시켜 놓고 기분이 좋아지다니.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확인하면서 기뻐하는 것이 이상했다.순간 이어진 생각에 심각하게 내 인성에 관해 돌아보는데, 디에고의 초조한 음성이 돌아왔다.

“어디 아파? 응?”

고민하느라 인상 찌푸린 것을 어딘가 아픈 걸로 착각한 것 같다.

코앞에 놓인 푸른 눈동자를 보며 그 안에 가득 담긴 내 모습을 상기하자 마음이 차분해진다.

‘내가 네게 있어 소중한 존재라는 걸 확인받는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이다지도 가슴이 뭉클했나 보다.

“아픈 데 없어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젓자 디에고의 얼굴이 한결 편하게 풀어졌다.

“무리했어.

이제 좀 쉬어.”

그대로 내 옆에 자리한 그가 자연스레 내 몸을 제 뜻대로 움직였다.

‘어?’

그다지 강한 힘이 아니었음에도 그 손길에 내맡긴 몸이 어느새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져 있다.나 지금 네 허벅지에 머리 대고 벌러덩 누운 거니? 그런 거야? 이래도 되는 건가.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어디에 둘지 모르겠는 손을 허우적대자 디에고가 내 손을 잡고 그대로 내리누른다.아래에서 올려다본 얼굴마저 틈 하나 없이 잘생겼다.

“…이러면 불편해서 못 쉴 것 같은데요.”

짓궂게 올라간 한쪽 입꼬리가 나를 비웃는 것 같다.

뭐지?

“레오 비오첼라와 함께 탄 마차에서도 잘 자던데.”

“아.”

아, 내가 잤지.

그래, 내가 벨리타로 연기하는 와중에 그 좁은 마차 안에서 잠을 잤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네.’

더는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내 이마와 눈을 함께 손으로 가린 그가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가는 길에 좀 자둬.”

얼굴이 창백하다고 덧붙인 디에고가 더는 대꾸하지 말라는 것처럼 다른 손으로 내 배를 토닥이기 시작했다.배를 그렇게 만지면 내가 어떻게 자니?

‘배에 힘주자, 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그 느슨하고 규칙적인 토닥임이 졸음을 몰고 왔다.

그간 긴장과 걱정으로 쌓인 피로가 점점 나를 잠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또 잠들면 너무 우스워지는 거 아닌가.’

눈가에 내려앉은 손의 따듯한 온기와 무섭지 않은 어둠이 이곳이 마차 안이라는 걸 잊게 할 만큼 평안을 주었다.

“…잘 자, 비비안.”

다정한 속삭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니, 여기서 또 이렇게 잠들면 안 되는―’

“비비안.

비비.”

“우웅.”

귓가에 내려앉는 부름과 낮게 진동하는 웃음소리가 의식을 찾아든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귀를 비비자 누군가가 손을 부여잡았다.

“안 일어나면 이대로 대공저로 함께 가고.”

“나는 좋아.”

라며 귓불에 닿는 촉감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아?”

바로 눈앞에서 빙긋이 웃고 있는 이 과도하게 잘생긴 사람은.

“…디에고?”

제 이름이 불린 것이 퍽 기쁜지 전보다 더 환하게 웃은 그가 그대로 입술을 맞대고 떨어졌다.

“그렇게 불러주니 기쁘군.”

여전히 잠이 덜 깬 채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나 또 잤어? 진짜 이렇게 완전 기절한 것처럼 푹 잔 거야?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좀 창피하다, 진짜.’

혼자 있고 싶다, 진짜.부끄러웠다.

차라리 새침하게 못 쉬겠다느니 그런 말이라도 하지 말걸.

그런 내 팔목을 잡아 벌린 디에고가 장난기 담긴 미소로 화답했다.

“들어가서 편히 자자.”

눈을 질끈 감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나는 그런 애라고 하자, 어쩌겠나.해는 지고 달이 반기는 까만 밤, 이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저택의 사용인들을 불러 다른 마차에 몸을 실은 영애들을 저택 내로 옮기는 모습을 보며 나도 그 안으로 들어섰다.하루 떠나 있던 건데 이리 반갑다.

고단해서 더 길게 느껴진 탓인가.

“어서 오거라.”

마중 나온 아버지가 인사를 건넨다.

이 늦은 시간까지 나를 기다리신 건가.하인을 시켜 일의 경위를 설명해 둔 터라 소식 없이 저택을 비운 것은 아닌데, 통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초췌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왜 죄지은 것 같지?’

“다녀왔습니다.

아직 안 주무시고, 저 기다리신 거예요?”

날 물끄러미 보던 아버지의 시선이 내 뒤로 향한다.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른 디에고가 저보다 작위가 낮은 후작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다.

‘왜?’

내 의문을 읽은 건지 그가 몸을 숙여 귓가에 답을 내어준다.

“후작이기 전에 아버님이라서.”

‘아버님?! 그 호칭 뭔가 이상한데?’

우리 둘의 속닥거림에 헛기침을 내뱉은 아버지가 어딘지 떨떠름한 목소리로 디에고에게 눈길을 주었다.

“각하께서 함께 오셨군요.”

“네, 각하께서 저를 챙겨주셔서요.”

내 말에 그렇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그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이제 그만 너도 돌아가지 그러니?분명 내 마음이 전해졌을 텐데 모른 척 발길을 돌리지 않는 그를 힐긋 보고 앞에 선 아버지를 보았다.

‘둘 다 뭐 하는 거지?’

저택의 로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 이상한 대치 상황을 계속 이어가기엔 정말 너무 피곤이 몰려왔다.

“저, 아가씨.”

영애들을 맡겼던 마리가 돌아와 내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응.

영애들은?”

“아직 약 기운이 도는 것인지 잠에 취해들 계세요.

편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물에 적신 천으로 닦아 드리라 했어요.”

나와 같이 박한 일정을 함께한 마리 또한 한층 핼쑥해졌다.

“잘했어.

혹시 모르니까 오늘 새벽엔 계속 살펴보라 하고.”

내 몫의 일을 해내고, 마침내 영애들의 안전까지 확보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몸에 힘이 빠졌다.

“시간이 늦었으니, 각하께서도 저택으로 돌아가심이―”

저택으로 들어선 안도감이 과했나.

몸에 갑작스러운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다리가 막 제멋대로 허물어지는 것 같은데…….’

“꺅, 아가씨!”

몸의 무너짐이 느껴지며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대로 바닥을 향하는데, 허리를 감싸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비비안!”

“딸아!”

‘후우, 다들 너무 호들갑 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푹 자고 일어나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으니까.눈꺼풀이 무거운 와중에 부쩍 커지는 소란함이 불편했다.

“열! 열이 나는 것 같아요.”

울먹이는 마리의 목소리에 나를 안아 든 다급한 손길.

“의원! 당장 의원을 데려와!”

의원을 찾는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괜찮으니까.

좀 쉬면.”

간신히 입을 달싹여 말을 건네보지만 내 말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쥐어짠 목소리에 원하는 답을 내어주는 이가 한 명도 없는 것을 보니.

“알았어.

힘들면 말 안 해도 되니까.”

억눌린 디에고의 목소리에 눈을 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으나 감긴 눈이 쉬이 떠지지 않는다.전혀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언제 방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조심스레 침대에 나를 내려놓고 멀어지는 디에고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내가 무거워서 떨리는 것은 아닐 텐데, 손까지 떨 정도로 동요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괜찮다고 눈 보고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렇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미안하다고, 네가 날 걱정하는 것이 기껍다고 생각한 거 정말 미안하다고.그렇게 전하고 싶었으나 의식이 점점 더 꺼져갔다.

‘아, 제발 다들 너무 걱정 말았으면 좋겠다! 나 너무 졸린 거거든?’

마지막 의식의 조그마한 구멍 사이로 내 이름을 부르는 디에고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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