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내가 미쳤다, 그래.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한단 말인가.
제국의 손에 꼽는 무력가를 손바닥에 생채기 하나 없나 눈에 불 켜고 살피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됐어요.”
얼른 이마를 떼고, 붙잡고 있던 손을 팽하니 던져버렸다.
민망함에 괜히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자 스텔라의 메마른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두 분, 뒤에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자가 있습니다만.”
아? 뒤를 돌아보자 디에고와 같은 차림의 사내가 난감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서 있다.
“…송구합니다만, 영애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했다는 사실을…….”
그가 말을 흐리며 어설프게 웃었으나 중요한 것은 사내의 표정 따위가 아니었다.
‘무사히, 지금 무사히 구출이라고 했지?’
“정말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지요?”
다급하게 되물으며 사내의 옷자락을 쥐자 그가 어깨를 부르르, 떤다.
뭐야? 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점점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게 보였으나 무시했다.
“…예, 괜찮습니다.”
디에고의 기사단이 따로 영애가 탄 마차를 수색해 구해내는 일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으니 믿었다.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는데, 약물에 취해 잠들어 있긴 하지만 상처나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말을 전해 듣자 마음이 놓였다.
“제가 때를 못 맞춘 것 같군요…….
이제 그만, 저도 무사할 수 있게 놓아주시겠습니까.”
사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뒤를 자꾸 힐긋댄다.
뒤를 돌아보자 디에고의 산뜻한 미소만이 나를 반긴다.사내의 옷자락을 쥔 내 손을 디에고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떼어냈다.
“비비안, 괜찮아.”
그의 목소리에 술렁대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다.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자 디에고의 손이 내 등을 쓸어주었다.
“…이만 저는 자리를 뜰 참인데.
어찌하시겠어요?”
너희 여기서 계속 그 짓거리 할 거니? 라고 눈으로 욕하는 듯 보이는 스텔라의 말이 이어지자 화들짝 놀란 내가 몸을 물리고 고개를 저었다.강렬하게 우리 그런 사이 아님을 주장하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다.
“저, 저도 이만 가야죠.
같이 가요.”
잠시 방황하던 시선에 힘을 주고 사내를 보았다.
내 강렬한 눈빛이 못내 부담스러운지 그의 눈이 찌그러진 것 같지만 개의치 않는다.
“영애들은 어디 있죠?”
황급히 표정을 바로 한 그가 답했다.
“지금 따로 준비해 주신 마차에 계십니다.”
부러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인 내가 삐걱대며 사내의 뒤를 따랐다.
옆에서 디에고의 억누른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는 하나 이 이상 그에게 말려들지 않으리.*황궁, 달빛만이 제 색을 잃지 않은 그 밤.제복을 갖춰 입은 황제 직속 제1 기사단의 기사들이 황태자 앞에 도열한 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무리의 앞에 자리한 제1 기사단장이 제 주군의 명이 떨어지기까지 집중했다.
“동이 트면 그대로 친다.”
오늘 제국의 백작가 하나가 사라지는 날임에도 황태자의 얼굴에 떠오른 무심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숲 쪽 진영의 상황을 전해 듣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상히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가 비오첼라의 화려한 저택을 떠올렸으나, 저택의 모습에서조차 기품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여태 그렇게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라.’
황태자가 이내 숲에 있을 제 기사단과 브라이트 대공을 상기했다.
뒤이어 비비안 또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서 한숨을 내쉰다.
‘위험한 일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황태자가 머릿속에서 비비안을 털어냈다.지금쯤 그쪽도 일을 치르고 있겠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곳에 있는 자들은 계획대로 무탈히 일을 진행시킬 것이다.
“비오첼라를 잡아들이는 일에 이변은 없다.”
그 단호함이 깃든 말에 기사단장이 겸허히 고개를 숙였다.비오첼라의 저택에서 이렇다 할 무언가를 잡아내지 못한다 한들 숲에서 이미 노예 거래의 증거를 확보했을 것이니.
결국 그것만으로 그들이 멸족당할 이유는 충분했다.다시금 그들의 행태를 떠올린 황태자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자리했다.
- 전하, 뒷일을 부탁드려요.제게 그동안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던 비비안.
그녀의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와 그간 해온 일들은, 무척이나 비비안다우면서 낯설어서 한참 마음이 혼란스러웠다.그녀 스스로는 매번 부정하지만, 사람을 위할 줄 아는 고귀한 비비안은 항상 제가 가진 것들을 나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고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선이었다.
‘그러니까 폐하가 자신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비비안을 떠올리자 그의 얼굴에 따스한 빛이 돌아왔다.그래도 어딘가 투명한 벽 안에 자신을 가둔 것 같던 그녀가 자기도 모르는 새 그 벽을 나온 것만 같아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네가 그 벽을 나서는 이유가 나이기를 바랐는데.’
적어도 비비안이 그 벽을 넘어서고자 할 때 손을 잡아줄 사람이 저였으면, 하고 바랐다.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그가 눈을 감았다.
초조함이 밀려온다.
이제야 저는 한 걸음 내디뎠는데 이미 비비안은 저만치 멀리 가버린 것만 같았다.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 리안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는다.
“여유가 없군.”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황태자가 예의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곧게 팔을 뻗었다.
“감히 제국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주도록 하지.”
황태자는 제국을 위한 일이 무엇일까 고민할 때 쓰는 방법이 있었다.이 길을 걷는 사람이 비비안이라면, 이것을 비비안이 쓰게 된다면, 이 일을 겪는 것이 비비안이었더라면.그럼 언제나 망설임 없이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제국민도 누군가의 노예로 살게 둘 마음이 전혀 없으니.”
항상 온화한 그에게서 도저히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차가운 음성이 기사단 위로 내렸다.명에 반응한 기사들의 눈에 단호함이 깃든다.그들이 죄인, 비오첼라를 잡아들이기 위해 저택으로 향했다.적막한 비오첼라 백작가, 그 주변을 황실 제1 기사단이 둘러싼 채 기사단장의 명을 기다린다.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을 물끄러미 보던 기사단장이 발을 떼었다.
“가지.”
묵직한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막 고용인들이 아침을 열 법한 이른 시각, 고요하던 저택에 바람이 일었다.쾅―저택의 문을 열어젖힌 기사단장 뒤로 기사들이 우루루 들이닥친다.그 소리에 놀란 주변 고용인들이 헐레벌떡 달려왔으나, 기사들의 흉흉한 기세에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사렸다.
“화, 황실 기사?”
제국의 상징을 두른 기사단의 모습에 고용인들이 웅성대자 집사가 기사단장의 앞에 섰다.
“황실 기사단이 어찌.”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간신히 예를 갖춰 보인 집사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의 방문에 의문을 보였다.
“죄인을 이송하러 왔다.
백작은 어디 있지?”
돌아온 답에 숨넘어갈 듯 헐떡이던 집사가 망연히 서 있자 그를 제친 기사단장이 더 안쪽으로 향한다.곳곳에서 들려오는 고용인들의 비명과 수군거림, 그를 알아챈 비오첼라 백작이 옷도 갖춰 입지 못한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뭐 하는 짓들이야?!”
별안간 제 저택에 기사들이 칼을 차고 들이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비오첼라 백작, 지금부터 그대를 황실의 명에 따라 이송하도록 하지.”
“화, 황실? 황실에서 나를 왜!”
“불법 노예 및 약물 거래 건, 이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무심한 눈으로 백작을 보던 기사단장이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기사에게 눈짓했다.정중히 나선 기사가 백작에게 빠르고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그를 끌고 나갔다.기사단장의 말에 순간 넋이 나갔던 백작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럴 리 없어.
증거, 증거가 있을 리 없다.’
“이거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건 모함이다! 모함이야!”
저택 안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있는 기사들 덕에 정돈되지 못한 모습으로 제 아비에게 달려온 비오첼라 영애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아, 아버지.
이게 무슨.”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이야! 증거라도 있는가! 이대로 날 끌고 갔다간 후회하게 될 거라고!”
핏발 선 눈으로 제 몸을 흔들며 기사들을 떨구려던 백작에게 비오첼라 영애가 포착된다.눈으로 제게 다가오라는 표를 낸 백작의 곁으로 그녀가 주춤대며 다가갔다.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비의 모습에 겁이 났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기억하거라.”
두려움에 떨면서도 제 아비의 귓속말을 들었으나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한 그녀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반응이 없는 제 딸이 못 미더운지 재차 백작의 노기 띤 음성이 그녀의 귀에 박혔다.
“우리가 살길은 그뿐이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억해 내거라.
그리고 아비를 찾아와, 알겠어?”
그 독기 어린 음성에 고개를 한없이 끄덕인 비오첼라 영애가 이내 비틀대며 주저앉았다.믿음직스럽지 못한 딸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으며 혀를 찬 백작이 끝까지 험한 말을 쏟아부으며 기사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가슴께에 손을 대고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고용인들의 뒤엉킨 발소리와 온갖 가구를 뒤집는 소리가 한데 엉켜 주변을 메운다.
‘치, 침착해야 해.
뭔가 잘못된 걸 거야.’
더듬더듬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킨 그녀가 제 방으로 향했다.
흐려진 시야에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친 비오첼라 영애가 방으로 들어서 문을 닫는다.문에 기대 주저앉은 그녀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다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혼란과 탐욕으로 뒤섞여 혼탁하다.
“…그, 그라면 도와줄 거야.”
온몸에 힘이 빠진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저를 도와줄 구명줄을 그리며 눈을 감는다.이 억울하고 부당한 일에 저의 편을 들어줄 이를 떠올린 비오첼라 영애가 울음을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