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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46화 (46/109)
  • 46화

    쾅―마차에서 뛰어내린 사내의 등이 그새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망할! 망할!”

    다리에 전해지는 충격과 현 상황에 대한 당혹감으로 연신 욕을 퍼붓던 사내가 여인들을 땅에 내던진다.

    “헉, 헉.”

    허리를 펴며 거칠게 숨을 토해낸 사내가 칼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창백하게 질린 두 여인을 내려다보던 그가 칼을 높이 쳐들었다.카앙―

    “뭐, 뭐야!”

    내려지던 칼이 부드러이 들어온 칼날에 의해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거.”

    브라이트 기사단장이 눈을 내려 금발의 여인을 빤히 봤다.

    “미리 못 찾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표식을 통해 마차를 선별해 두지 않았으면 여차한 순간 영애들의 목숨이 끊어졌을 테다.그의 칼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사내의 목 앞에 멈춰 섰다.

    “흡.”

    “이런 짓하고 살지 말자, 응?”

    “사, 살려주세요.”

    “왜? 너도 지금 저 둘한테 칼 꽂으려던 거 아니었어?”

    바들바들 떨리는 턱, 세수라도 한 듯 땀으로 흥건한 얼굴.

    사내가 반쯤 나간 정신으로 애걸한다.

    “뭐, 지금 당장은 안 죽일 거니까.

    안심해.”

    “악!”

    칼을 내려 그대로 사내의 어깻죽지에 찔러 넣은 그가 한 손을 튕겼다.

    “영애 챙겨.”

    그와 똑같이 검은 복면 차림의 기사 둘이 조심스레 영애들을 안아 들고 사라졌다.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감싸 쥔 사내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브라이트 기사단장이 이어서 무심히 허벅지 한쪽을 내리찍는다.

    “아악!!”

    각기 손으로 칼에 찔린 부위를 감싸 쥔 사내가 땅바닥을 구른다.

    그의 몸이 어느새 피로 흠뻑 적셔졌다.그를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던 브라이트 기사단장의 눈에 미약한 짜증이 묻어난다.

    “하, 괜히 찔렀나.”

    인상을 찌푸린 그가 사내를 들쳐 멨다.

    “피 묻는데.”

    한숨을 내쉰 브라이트 기사단장이 가뿐히 몸을 놀려 하얀 제복의 기사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가 그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혀를 찼다.

    “여기 있었네.”

    제가 찾던 이의 앞에 당도한 브라이트 기사단장이 반갑게 알은체를 한다.

    “뭔가.”

    황실 제2 기사단장의 앞에 사내를 던져 놓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얘가 그걸 알아.

    그 마차를 지키고 있던 놈이거든.”

    차가운 눈으로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내를 일갈한 그가 제 앞에 선 삐딱한 브라이트 기사단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애들은.”

    “걱정 말게.

    그럼 뒷일을 부탁하지.”

    말을 끝낸 그가 훌쩍 뛰어올라 그 모습을 감췄다.

    “사, 살려, 주세요.”

    초점 없는 눈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내를 보던 하얀 제복의 기사단장이 칼을 들어 멀쩡한 허벅지를 한 번 더 내리꽂는다.

    “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사내가 침을 흘리며 나뒹군다.

    그를 바라보는 기사단장의 눈동자에 혐오와 경멸이 가득했다.

    “정녕 제가 한 일을 모르고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가.”

    제 아픔에 겨워 눈이 돌아간 사내는 몸을 비틀며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그를 냉담한 시선으로 내려다본 기사단장이 고개를 들어 소란이 잦아드는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히야, 장난 아니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비명과 뜀박질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살짝 벗어난 곳.

    지난밤 평온하던 그 숲의 정경과 다르게 마차가 쓰러지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혼비백산 뛰어다니는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하얀 제복의 황태자가 보낸 기사단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더욱 빛이 난다.

    그 단정한 차림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선보이는 절제된 동작들이 상단주가 고용한 여느 잡배들과는 그 틀이 달랐다.

    “금방 정리되겠네요.”

    스텔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본 곳에 검은 짐승이 모습을 드러낸다.

    온몸을 검은 천이 감쌌음에도 그 몸의 선이 다 드러나는 자태에 숨이 막혔다.

    ‘어후, 몸 진짜 좋다.

    너 진짜.’

    디에고가 나무에서 유독 화려한 마차의 지붕 위로 뛰어내렸다.

    “날렵하다, 날렵해.”

    재빠르게 마차의 문을 연 그가 그 안으로 자취를 감춘다.저 안에 레오 비오첼라가 있겠지.

    내내 그에 대한 짜증을 숨기느라 화가 많이 난 것 같던데.

    무사하려나.

    죽이지는 않겠지?

    “쯧, 그러니까 마차 같이 타고 여기 오자고는 하지 말았어야지.”

    그 오랜 시간 레오 비오첼라와 마차에 갇혀 있느라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 네가 억지로 웃는 걸 보는 게 좀 힘들더군.둘만 남은 마차에서 저를 껴안고 웅얼대던 그의 말.

    그 시간의 달큰한 향기가 다시금 나는 것 같아 몽롱해진다.탁―나뒹굴듯 튀어나온 레오 비오첼라의 얼굴이 사색이다.

    황태자의 기사단이라는 걸 알아챈 것인지 황망히 주변을 보던 그가 이내 어딘가로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를 가도 이미 늦었을 텐데.’

    그리고 뒤이어 마차에서 모습을 드러낸 디에고.

    그가 느릿하게 시선으로 레오 비오첼라를 좇았다.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다.

    앞선 자의 걸음에는 초조함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데 반해 그 뒤를 잇는 자의 걸음걸음엔 여유가 느껴졌다.

    “…무섭겠다.”

    그래, 죄 없어도 저렇게 뒤따라오면 가슴이 졸아들 것 같은데.

    어마어마한 죄까지 있으니 지금 다리가 저렇게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주저앉았다.

    울었어, 울고말고.’

    “각하께 쫓기는 일은 가능한 만들지 말아야겠군요.”

    스텔라의 질린다는 목소리에 격하게 동감한다.

    차라리 쳐주라.

    저렇게 몰지 말고 단숨에 끝내주는 게 나을 것 같다.좁혀지는 거리에 내가 다 긴장되었다.퍽―

    “악.”

    디에고의 긴 다리가 끝내 비오첼라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순식간에 나뒹군 비오첼라가 익숙지 않은 고통에 허덕인다.

    ‘아프긴 하겠는데.

    참, 우습다.’

    그렇게 잔인하고 아픈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던 이가 저 작은 아픔에 정신을 못 차리고 무너지다니.

    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탈한 일인가.고작 저렇게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진창으로 떨어졌다.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잠시 생각에 잠겨 흩어졌던 눈에 초점이 돌아오자 디에고의 잔혹한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뒹구는 레오 비오첼라가 보였다.

    “와아…….”

    ‘저거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죽으면 곤란한데, 그렇죠?”

    식사는 하셨을까요, 라고 묻는 투의 스텔라가 고개를 기울였다.레오 비오첼라가 엄살이 심한 거겠지.

    디에고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어? 아무리 화가 많이 났다지만 이성은 있을 터였다.

    ‘아마도? 있지?’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디에고가 레오 비오첼라의 손을 발로 밟고 짓이기던 순간, 비명은 더 극대화되었다.

    “…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스텔라에게 자문을 구해본다.

    괜찮은 거야?

    “여기서 말해도 들리지 않겠지만, 영애라면 가능하겠죠.”

    스텔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느새 나타난 사내 하나가 칼로 나무를 베어냈다.쿵―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며 굉음을 자아냈다.

    돌아가는 상황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눈을 껌벅이고 있자 스텔라가 어깨를 두드린다.

    “자, 이제 해보세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디에고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디에고의 눈동자가 유독 어두웠다.나는 양손을 교차하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에게 속으로 말도 걸어본다.

    보이지? 어떻게 글자 크게! 큰 소리로 외친다 생각하면 막 크게 보이려나?

    ‘그만! 그러다 죽겠어요.

    걔는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오히려 행복한 결말이라고요.’

    오래 살면서 고통받아야 하는 이에게 죽음은 너무 달콤하지 않은가.

    ‘디에고! 내 말 들리니? 그만 때리고 황태자에게 넘겨요, 넘겨!’

    한참 멍하니 나를 보는 것 같던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와, 어째서 유독 네 얼굴은 이렇게 표정 하나까지 쏙쏙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이게 사랑의 힘이라는 걸까.그의 푸른 눈이 빛을 되찾아간다.

    고개를 두 번 끄덕인 그가 레오 비오첼라의 손 위에서 발을 뗐다.

    “정말 말을 잘 듣네요, 영애.”

    살짝 감탄 어린 목소리를 흘린 스텔라의 얼굴에 비웃음이 들어찼다.

    나 또한 그녀의 그 얼굴을 빤히 보며 입을 벌렸다.

    “영애도 만만치 않아요.”

    이 상황에 나무를 베어 시선을 끌 생각을 하는 너도 보통은 아니야.

    내 주변은 굉장한 사람뿐이구나.

    얼마 되지 않는 주변인들이 너무 독특해서 벅찼다.

    ‘두 명이 열 명은 되는 것 같은 이 기분.’

    레오 비오첼라의 팔을 붙들고 질질 끌어 황태자의 기사단장에게 향하는 디에고가 보였다.무어라 몇 마디를 나눈 그가 내 쪽을 향해 걸어온다.

    “비비안.”

    “각하, 이렇게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왜 굳이.”

    말을 줄이며 그에게 손을 뻗자 한 걸음 물러난다.

    뭐야, 너 지금 내 손 피한 거니?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하자 디에고가 난감한 미소를 그렸다.

    “닿지 마, 지금은.”

    “왜요?”

    “피 묻어서.”

    그러고는 두 걸음 더 멀어진다.

    순간 싫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 내 손길을 피하고 내게서 멀어진다는 사실이 마음을 시리게 했다.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아…….”

    괜한 오기가 생겨 빠르게 세 걸음 나아가자 내 움직임 따위는 진즉에 알아챈 그가 그만큼 뒤로 물러선다.

    ‘한 번만 더 거기서 움직여봐.

    다시는 못 닿을 줄 알아.’

    속으로 으름장을 놓자 그를 보았는지 디에고의 몸이 움찔, 떨린다.

    그와 눈을 맞추고 짐승에게 다가가는 심정으로 한 발 내딛자 차마 내빼지 못하겠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툭 떨궈져 있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아 살폈다.

    “다친 데는 없어요?”

    “…응?”

    꼼꼼히 그의 손바닥을 살피는데 위에서 헛숨이 들려온다.

    남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헤집은 그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비비안,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건가?”

    “지금껏 저와 함께 본 것은 무엇인가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던 디에고의 말 뒤, 어이가 없다는 듯 스텔라가 말을 덧붙인다.아니, 나도 봤는데.

    그래도 나무에서 뛰어내리면서 마차를 짚은 손에 상처는 없나 싶었고, 또 마차 안에서 어떤 실랑이가 있었을지도 모르고.너무 멀쩡한 그의 손바닥을 주무르던 내가 민망해져 고개를 숙였다.툭,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댄 디에고가 곱게 눈을 휘었다.

    복면 아래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계속해 줘.

    다른 데도 살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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