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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45화 (45/109)
  • 45화

    *기나긴 마차 행렬의 가장 끝자락 부근, 유독 마부의 날이 서 있는 그 마차 안에는 네 명의 여인이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다.어찌나 독한 약이었는지 해가 지고 밤을 지나 새벽녘까지도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셋.그리고 남은 한 명, 아이비 판델의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이 눈물로 젖어 눈가의 짓무름을 더한다.

    시간조차 가늠 안 되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숨죽여 생각했다.

    ‘이런 식은 아닐 거야.

    이대로는 영락없이 검문에 걸릴 테니까.’

    한껏 예민해진 청각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곤두섰다.

    한없이 고요한 정적 속에 이따금 느껴지는 날짐승과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이 내는 소리들.

    그리고 멈춰 선 마차.검문 전 지나치는 숲에서 하루 머물게 될 것이라 미리 들었다.

    ‘숲…….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주변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있기를 바랐지만, 없다면 제 이로 손가락 살을 뜯어낼 생각을 하며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그녀가 굳은 다짐을 다시금 되새기던 그 순간.숲에 내려앉은 어둠을 틈타 황태자의 기사단이 비오첼라 상단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황태자가 보낸 기사의 숫자가 꽤 되었음에도 상단의 행렬 규모가 지나치게 커 그를 다 에워싸기에는 무리였다.

    “최대한 빠져나갈 구멍 없게끔 시야 넓혀서 포위한다.”

    제2 기사단장에게서 떨어진 명을 받든 이들이 일제히 흩어진다.

    - 단 한 명도 놓치지 말고 끌고 와.

    내 친히 그 면면들을 봐야겠으니까.제 주군, 황태자가 그리 말했다.

    일의 전말을 전해 들은 기사단장의 생각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감히, 제국에서 이와 같은 일을 일삼다니.기사단장의 눈동자에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경멸이 희미하게 남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한 인영이 점차 거리를 좁힌다.

    “오랜만이네.”

    눈을 제외하곤 온통 검은색으로 휘감은 남자가 기사단장을 알은체한다.

    “그 꼴은 뭐지?”

    애초에 대공이 알려온 일이라 들었다.

    그러니 그의 사람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첩자, 암살자나 할 법한 복장으로 제 앞에 나타난 것은 의아했다.

    “어디까지나 황태자 전하께서 지휘한 일로 마무리될 예정이라.”

    곱게 접힌 눈매에서부터 능글맞음이 진하게 피어나는 대공의 기사단장이 말을 잇는다.

    “우리는 정체를 숨기기로 했거든.”

    원래도 둘은 고지식함과 자유분방함으로 극과 극을 달리는 이들이었다.

    한때 서로의 실력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사이가 되었다.

    “방해나 하지 말게.”

    딱딱한 어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검은 복면의 사내가 이내 웃음소리를 흘리고 자취를 감춘다.고개를 들어 본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왔다.그에 맞춰 처음 여인들을 우악스러운 손길로 끌어내던 사내들이 다시 그녀들을 찾았다.

    “언제까지 처잘 거야.”

    거칠게 한 명, 한 명 일으킨 후 눈가를 가린 천을 벗겨낸다.

    여태 정신이 혼미한 여인들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그 어떤 반항도, 소리도 내지 못하는 이들을 들쳐 멘 사내들이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동한다.어깨에 걸쳐진 채 흔들리던 아이비 판델이 슬며시 제 손을 입에 넣었다.

    지금 옮겨지는 곳이 제가 표식을 남겨야 할 마차임을 알았다.

    ‘할 수 있어.’

    내려진 그녀의 손가락에서 바닥으로 붉은 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숲의 나무가 우거진 한구석, 미묘하게 대열에서 벗어난 듯한 마차 주위가 소리 없이 소란하다.힘깨나 쓰게 생긴 몸을 자랑하는 사내가 마차의 지붕 위에 자리했다.

    “올려.”

    아래 다른 사내가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여인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쉽게 그를 끌어 올린 사내가 그대로 마차 위에 여인을 뉜다.슬며시 뜬 눈으로 일련의 상황을 확인한 아이비 판델이 눈치를 살폈다.저를 들고 있는 사내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심스레 손을 든 그녀가 팔을 뻗었다.벌벌 떨리는 손가락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고, 간신히 뻗어 닿은 곳에 흔적을 남긴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여인이 다시 한번 제 손을 입에 물고 두 번째 손가락마저 물어뜯었다.그리고 그 순간, 사내의 거친 손길이 그녀를 들어 마차 위 다른 사내에게 건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아이비 판델이 마차의 위쪽, 손이 닿는 곳곳을 쓸며 자국을 남겼다.사내는 익숙한 듯 그녀를 눕히고 품에서 병을 꺼내 들더니 투박한 손길로 입을 벌려 약물을 흘려 넣었다.반사적으로 켁켁대는 기침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서더니 여인들의 위로 나무판자를 덮어 고정시킨다.

    “됐어.

    그쪽은?”

    “여기도 다 됐어.”

    탕탕―마차 지붕 위에서 발을 굴러 나무판자가 잘 고정되었는지 확인한 사내들이 몸을 물렸다.이윽고 레오 비오첼라가 여인들을 실은 두 마차 주변을 빙글 돌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잘 만들었단 말이지.”

    마차 천장과 지붕 사이에 만든 작은 공간, 옆에서 보았을 때는 위로 솟은 마차 장식과 워낙 좁은 면적으로 티가 나지 않았다.

    “넷이라.”

    보통은 들어가는 비용이며 시간을 고려해 한 번에 최소 여덟 명은 구해놓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그 절반밖에 준비하지 못했다.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벨리타 상단주라던 계집을 떠올렸다.새로이 구비한 마차에 잔뜩 실려 있는 미약의 값이 어마어마했다.

    제값의 무려 세 배를 불렀음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을 상기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아직 의심의 끈은 완전히 놓지 못했지만.

    ‘이 거래가 끝나면 좀 더 만나볼 필요는 있겠어.’

    “준비 모두 마쳤습니다.”

    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비오첼라 상단이 다시 길을 나설 채비를 끝냈다.

    “출발해.”

    말을 끝내고 가장 호화로운 제 마차로 향한 그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까탈스러운 그에게 야외에서 머무는 하루란 지독하리만치 짜증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하루빨리 이 물건들을 치우고 안락하고 화려한 제 저택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레오 비오첼라가 눈을 감았다.쾅―그러나 그 순간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어젖혀졌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눈을 뜬 그가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곳, 그곳에 안광을 번뜩이는 짐승이 있었다.눈만 내놓고 검은 복면을 쓴 디에고 브라이트.

    그가 레오 비오첼라를 향해 눈을 번뜩인다.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마차 안으로 들어선 디에고가.쿵―레오 비오첼라의 귓가를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 발을 꽂아 넣었다.소스라치게 놀란 레오 비오첼라의 몸이 움칠, 떨린다.

    “너, 너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내가 누군 줄 알고 지금!”

    “시끄럽고.”

    “뭐, 뭐어?!”

    “이놈의 금발, 적발은 한 번도 내 편견을 비껴가는 법이 없네.”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내뱉는 말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그의 시선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손으로 흐른다.디에고의 가라앉은 눈이 비비안의 어깨를 부여잡던 레오 비오첼라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훑었다.

    ‘못 쓰게 만들면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

    살기를 느낀 레오 비오첼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며 유일한 탈출구, 마차의 문을 힐긋댔다.

    “도망가고 싶어?”

    “왜 이러는 거야? 돈? 돈이 필요해? 얼마든지 주면 될 거 아냐.”

    상단을 노린 도적 떼 비슷한 무리라고 생각한 레오 비오첼라가 디에고를 어르고 달래보려 했다.

    “꺄악.”

    “악!!”

    어수선한 밖에서 비명이 난무했다.레오 비오첼라의 얼굴 옆에 두었던 발을 내린 디에고가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가봐.

    도망갈 수 있을 만큼.”

    허우적대는 손으로 마차 문을 연 레오 비오첼라가 고꾸라질 듯 비틀대며 밖으로 나선다.황가의 표식이 달린 하얀 제복의 기사들이 서늘한 칼날을 휘두르며 그가 고용한 사내들을 굴복시키고 있었다.

    “화, 황가?”

    가쁘게 숨을 쉬던 그의 의식이 노예로 넘기려던 여인들에게 향했다.

    ‘그건 들켜선 안 돼…….’

    레오 비오첼라의 눈이 빠르게 한 사내를 찾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옷을 하녀복으로 갈아입힌 것은 혹시나 벌어질 이런 사태를 위해서였다.

    ‘바로 죽여야 해.’

    한낱 하녀 몇이 비명횡사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하여.그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본능적으로 마차를 찾아 나선다.황태자의 기사단장이 백작 영식이 튀어나온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뒤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디에고를 단번에 알아본 그가 고개를 숙인다.

    그를 가만 보던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백작 영식의 뒤를 여유롭게 뒤쫓는 디에고의 뒷모습을 본 기사단장이 묵묵히 상단 사람들을 잡아채고 있는 제 기사단을 확인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리고 이 화려한 소탕이 시작되기 전.대공의 기사단은 각기 나무 위와 수풀 틈틈이 몸을 숨기고 마차의 외향을 확인하기 바빴다.

    ‘핏자국이라.’

    브라이트 기사단장이 제 주군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눈을 빛냈다.스무 대가 넘는 마차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던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거군.”

    그리 크지 않았지만, 찾는 이의 눈에는 들어올 만큼 존재감을 발하는 검붉은 자국.그를 발견한 그가 손을 들어 가까이 있는 수하를 불렀다.

    “가서 전해.

    시작하라고.”

    브라이트 기사단장의 눈이 마차 중앙에 난 핏자국과 마차 상단에 난 핏자국을 번갈아 본다.상단의 핏자국을 유심히 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차의 지붕을 보는 기사단장의 눈이 가느스름해진다.

    “손으로 낸 것 같은데, 방향이 위로 향한다라.”

    마부석에 앉은 자는 몸을 쓰는 자로 보였다.

    단순히 마차를 이끄는 마부라기보다 적당히 훈련받은 암살자에 가까운 기운을 지닌.

    “확실하군.”

    이윽고 그들과는 반대로 하얀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기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 내려.”

    무표정의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상단을 헤집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상단의 호위를 맡은 사내들이 당황한 낯으로 제각기 자신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딱 보기에도 자신들과는 수준이 다른 정예 기사들의 모습에 그들의 기세가 주춤했다.기사들이 당황하는 상단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았고, 반항하는 사내들의 욕설과 고함은 기사들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작아졌다.

    “이런 씨!”

    상황을 살피던 마부가 제 옆에 찬 칼집을 쥐었다.심상치 않았다.

    제국의 표시를 가슴에 달고 있는 자들.

    흔한 도적 떼 따위가 아님을 직감한 그가 마부석에서 일어나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제게 주어진 몫.어차피 지금 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내빼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비오첼라는 그런 곳이었다.마부의 불안정한 시선이 주변을 이리저리 배회한다.

    출발하기 전이라 여전히 마차의 위치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과 반대로 숲을 향한 쪽으로 돌아 나온 그가 마차의 위로 뛰어올랐다.

    몸을 한껏 숙인 사내가 마차의 지붕을 뜯어내고 여인 둘을 꺼내 들어 양 어깨에 들쳐 멘다.

    “오호라.”

    유심히 그 모습을 보던 브라이트 기사단장이 눈을 휘며 웃는다.

    ‘마차를 개조했던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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