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비오첼라 백작가의 최후 】
“아가씨! 괜찮으세요?”
따로 준비해 둔 마차를 타고 따라온 마리가 내 곳곳을 살폈다.
“괜찮지, 그럼.”
그나저나 원래 계획은 내일 새벽에 숲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저택으로 돌아가면 잠이나 자고 다시 나올 수 있는 걸까.
“어느 세월에 저택으로 돌아가지?”
절로 나온 푸념에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받았다.
“아가씨, 마이어 백작 영애께서 전해주라 하셨어요.”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에게서 서신을 받아 열어본 곳에 구원이 있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하루 묵을 곳을 제공해 드리지요.]그 밑으로 저가 머무르고 있다며 숲 근처 장소를 일러준다.
‘와, 얘 정말 뭐지? 나 이 언니 곁에 평생 있고 싶은데?’
“마리, 우리 오늘 저택 안 간다.”
서신을 건네받으며 대충 언질을 받았는지 별반 놀라지 않은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데……?’
계속 외면하던 시선을 틀어 바라본 곳에 진작부터 마차 문을 열고 말없이 눈짓하는 대공이 있었다.
눈빛 하나, 행동 하나에 억눌린 감정이 느껴져서 괜히 긴장된다.
‘타라는 거지, 쟤 지금?’
오랜 시간 마차를 탄 탓에 찌뿌둥했던 몸, 이제야 밖에 나와 조금 시원하다 싶었는데.마차 문에 손을 댄 채 굳어 있는 너 보니까, 내가 그냥 탈게.
탄다, 타.힘겹게 마차에 올라타자 바로 뒤따라 탄 그가 문을 걸어 잠근다.의자에 엉덩이 붙이기 무섭게 대공이 양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잡아당겼다.
그대로 딸려간 내 몸을 가득 품은 채로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다리를 벌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마주 앉은 자세가 심히 버겁다.
힘주어 나를 끌어안은 디에고가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살 것 같아.”
잠긴 듯한 목소리로 읊조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심통이 난 얼굴을 보자 방금까지 팽팽하던 긴장감이 탁 풀렸다.
“풋.”
“…왜 웃어?”
“귀여워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디에고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가 지그시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확인받으면, 더는 초조할 일 없을 줄 알았는데.”
“…….”
천천히 드러나는 눈동자의 색이 한층 깊었다.
“…여전히, 전보다 더 애가 타는군.”
*마리가 타고 온 우리 마차에 몸을 싣고 숲에서 살짝 벗어난 길로 들어서자 아담한 저택 하나가 홀로 자리하고 있다.
“…레사는 정말 없는 게 없네.”
이 숲속에 이렇게 눈에 안 띄는 근사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스텔라, 너랑은 영원히 친구이고 싶다.그 앞에 나와 있던 스텔라가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비웃음도 웃음이지, 아무렴!’
“영애 덕분에 살았어요.
오늘 정말 마차와 내내 한 몸이었던지라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는데.”
“예, 저택이 소박하나 길에서 주무시는 것보다야 나으시겠죠.”
‘…길? 지금 길바닥이라고 했어, 언니?’
스텔라가 나를 이끌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로 데려갔을 때는, 몸이 환호성을 지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노곤한 몸으로 내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서자 나보다 먼저 자리하고 있는 너희들.은은하게 일렁이는 초들이 자아낸 주홍빛이 안락함을 더하는 방.원형의 나무 탁자를 두고 스텔라, 디에고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내 방 아니야……?’
두 맹수의 기운을 보자 뒤돌아서 방을 나서고 싶은 충동이 순간 들었으나 내게 그런 배포는 없지, 없어.나는 디에고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들기는 것을 찜찜하게 보며 착석했다.그렇게 검붉은 술이 든 잔을 흔드는 스텔라와 마주 앉아 있자니, 그래도 예정된 불행이 운 좋게 변한 게 이런 건가 싶다.
“정말 영애는 일을 몰고 다니시는 재주가 있습니다.”
‘…내가 사고를 치는 건 아니잖아?’
“눈을 떼기가 어렵지.”
내 오른편에 앉은 디에고가 말을 덧붙인다.
몸을 틀어 턱을 괸 채 아예 날 향하고 있는 모습이 부담스럽다.
‘하루 종일 옆에 있었는데, 질리지도 않니?’
그 녹진한 눈빛 덕에 갈증이 일었다.내 몫의 술잔으로 손을 뻗자 그의 시선이 따른다.나도 오늘 고되었어.
아무리 내가 세 시간 뒤에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한들.
그냥은 못 자겠다.탁―벌컥벌컥 내 안으로 들어선 술이 고된 하루의 끝에 붉은 선을 그렸다.
낮과 저녁, 애써 묻어둔 덩어리 위를 칼로 그어낸 듯 감정이 흐른다.내가 지나온 그 길 위를 억지로 걸었을 이들.절대 온전히 가늠할 수 없을 두려움과 고통을 상기하면 울컥하는 지금의 이 감정은 위선이 아닐까.
“비비안.”
지독한 혼란에 접어들던 날 현실로 끄집어내는 디에고의 부름이 있다.
“영애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유용한 것은 아니란 거, 잘 알겠네요.”
비어 있는 내 술잔을 채워주는 스텔라의 무심한 목소리에서 도리어 걱정이 듬뿍 묻어났다.디에고의 눈이 집요하게 내 얼굴을 살폈다.
너 내 마음 보고 있어서 그렇구나.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아 천장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기혐오를 한숨과 함께 내보냈다.
“하아.”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이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건 어지간한 오만이지.그래도.
“속상해.
마음이 너무 아프고, 화가 나.”
대상도, 주체도 모호한 고함이 소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타는 목마름에 연거푸 술을 들이부었다.
비워지는 족족 스텔라가 잔을 채워준다.
“예, 오늘만 슬퍼하세요.
동이 트면 그들도 더는 같은 짓거리를 못 할 테니까.”
우아하게 제 잔을 들어 목을 축이는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언니도 화 많이 났구나.’
억누른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서늘한 미소였다.
“…판델 남작 영애가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첫 만남부터 하염없이 울던 가는 몸이 잊히지 않는다.
후에 계획을 설명하고자 다시 만났을 때는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훨씬 여위어 있었지.
“핏자국을 찾으라 하였지.”
제 잔을 손에서 굴리던 디에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남작 영애가 몸을 싣는 마차에 표식을 해두자는 말이 나왔을 때,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었다.어떤 상황에서든 피만은 제가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뜻대로 안 되면?”
괜히 무언가 실행하려다 들켜 화라도 당하면 어쩌나.
마음이 안 좋았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일러주셨잖습니까.”
손 부여잡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당부하기는 했지.
위험하다 싶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도 그래.
여기 지금 대공에 후작 영애에 백작 영애, 레사까지.
이 조합으로 비오첼라 가문 하나 못 잡으면 문제 있는 거 아닌가.’
동의를 구하고자 부릅뜬 눈으로 디에고를 바라봤다.잠시간 눈을 크게 떠 보인 그가 부드럽게 웃는다.
“비오첼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브라이트가 손을 썼다, 라는 쉬운 방법도 있어.”
‘그럼 브라이트의 명예는……?’
“그거 좋네요.”
빙긋이 웃은 스텔라가 술잔을 들어 긍정을 표하더니 단숨에 들이켠다.
‘…둘 다 농인 것을 알지만.
여차하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으니 조심해야겠어.’
나는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파헤쳐 세상에 고하고 싶다.
어떤 치졸하고 영악한 방법으로 일을 치러 왔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한다.그리고 그 비슷한 일을 도모하고 있는 자, 향유하는 자, 외면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그 일의 말로는 이것이라고.’
물론 알리는 건 대공과 황태자 몫이지만.
“황태자 전하의 사람이 꽤 되더군요.”
“전하가 아낌없이 내어줬지.”
스텔라의 발언에 여상히 답한 디에고가 검지로 탁자를 두드렸다.
지금쯤 황태자의 기사들이 숲에 들어섰을 터였다.
“…이제 슬슬 자리를 파해야 할 것 같은데.”
스텔라의 가느스름한 시선이 나와 디에고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 눈에 담긴 비웃음이 나를 억울하게 한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그렇게 술을 마셨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으로 자리를 턴 그녀가 문가로 향했다.
“그런데, 각하는 안 가십니까?”
짓궂은 미소로 전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여기 내 방인데 너는 왜 안 일어서니?’
“먼저 가지.
나는 비비안과 더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이야기? 난 그런 거 없는데.
지금껏 대화해 놓고 더 뭘 한단 말인가.
내가 아직은 빠릿빠릿하게 사고가 가능한 것을 보아 세 시간이 지나지 않은 듯싶다.
‘내보내자.
그리고 자자.’
숙취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술주정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각하도 들어가시죠.
제가 너무 피곤해서 이만 자야 할 것 같은데.”
난 초조한 눈으로 침대 가를 힐긋댔다.
내게 쌓인 피로를 온몸으로 알리기 위해 어깨도 한껏 내려봤다.눈도 게슴츠레 뜨고 손을 휘젓자 디에고의 미소가 더 짙어진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전 이만.”
‘어? 아니야.
둘만 두고 가지 마, 언니!’
가차 없이 문이 닫힌다.
그리고 둘만 남았다.
애처로이 문을 바라보고 있자 뻗어온 손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비비, 재워줄까?”
‘어허엉.
싫다고 해라, 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달았다.
다정함과 은밀함이 뒤섞인 그 어조에 어버버 끌려간다.너무나 자연스러운 손놀림에 어느새 침대에 고이 누워 있는 나.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놓은 내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거기 앉는 너.
“아직 마음에 걸려 있는 말 있으면 해.”
“…….”
숲에서 떨고 있을 영애들.
반면에 편하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 내가,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머리로는 아는데, 끝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과 감정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했다.
“알량한 마음 같아요.
정말 진심을 다해 아파할 수도 없으면서 단호하게 구분하고 잘라내지도 못하고.”
이 질척하고 모순적인 것들이 나를 자꾸만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위선자가 따로 없어…….”
입술을 말아 물고 울지 않기 위해 인상을 써야 했다.
여기서 울기까지 하는 건 정말 최악이야.그런 나를 한참 말없이 보던 그의 입이 열렸다.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손을 내밀어준 이의 의도나 마음의 크기가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몰라, 비비안.”
평소보다 더 느린 속도로 말을 이어가는 그가 가만가만 나를 다독였다.
“내가 그랬거든.”
“…….”
“네가 짐작도 할 수 없을 어느 순간순간, 몇 번이고 너는 나를 구해줬어.”
디에고의 얼굴에 도저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애정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