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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43화 (43/109)

43화

*덥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날의 해는 따갑다.

‘이렇게 더운데 가발 쓰고 천 두르니 미치겠다.’

“각하, 덥지 않으세요?”

슬쩍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이자 미동 없던 그가 목소리만 냈다.

“디에고.”

저번부터 끈질기게 각하라 칭할 때마다 제 이름을 부르짖는다.

별 이상한 고집이 다 있어.

“…디에고, 덥지?”

먼지 휘날리는 짐마차를 보던 그의 고개가 내게 향한다.

기울어지는 얼굴에 가느스름하게 뜬 눈이 요사스럽다.

“더우신가 봅니다, 주인님.”

“응.

난 너무 덥다, 지금.”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이 호칭도 적응이 되더라.

뭐든 처음이 어렵지, 하대도 나날이 자연스러워졌다.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부채가 그의 손에 들려 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부채로부터 일어난 바람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좀 낫구나.”

공을 치하하자 대공의 눈매가 곱게 휜다.

그 모습을 힐긋 보고 바람을 만끽했다.

정말 얼굴 반을 천으로 덮어 놓으니 숨 쉬기가 힘들었다.

‘얘는 부채질도 잘하네.’

한결 넉넉해진 마음으로 앞을 살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짐을 싸더니 아직까지 이러고 있다.

“…이건 뭐, 확실히 놓칠 법하네.”

어림잡아 스무 대는 넘어 보이는 마차.

벨리타 상단의 짐이 합세하기는 했으나 평소에도 스무 대가량은 이동했을 듯싶다.이러니 혹여나 마구잡이로 마차를 뒤지는 상황이 오더라도 피할 시간이 주어졌을 거다.

“같이 가지는 않을 거지?”

붙잡힌 영애들의 신변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애초에 나와 내 일행의 동행까지는 백작이 허하지 않을 듯싶었다.

“응.

준비는 끝났어?”

상단주 역할에 충분히 녹아든 내가 반말을 고수하자 반투명 천 너머 휘어지는 그의 입매가 보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마차들은 국경을 넘지 못할 것이다.느린 이동 속도로 인해 숲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 후, 출발 전 검문에 통과할 수 있도록 마차를 재정비하겠지.

그때 이들이 지난날 써온 비열한 방법이 무언지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수도 경계선, 제국민이 휩쓸려 얽히지 않도록 숲의 끝자락에서 끝낸다.

나는 이 일을 대공에게 넘겼으나 그는 또 황태자의 손을 빌려왔다.황태자 휘하 제2 기사단이 그곳에서 이들을 맞이할 예정이다.

“너도 어지간히 욕심이 없구나.”

“…무슨 말씀이실까요?”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다니, 나도 큰일이다.

푸른 머리칼의 그는 자꾸 소년 같은 청량함이 묻어나서 볼 때마다 새롭다.대공답지 않게 자꾸 물어보는 건 내 집요한 손가락 덕분이었다.

간만에 그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내 마음이 아니라 황태자의 것이 흘러나가지 않게.

‘좋아하는 마음 숨기던 그때 이후로 이리 필사적인 건 오랜만이네.’

눈에 초점이 흐려진다.

삶이란, 녹록지 않은 것이야.여전히 부채질을 해주며 얌전히 답을 기다리는 이가 새삼스럽다.

이래도 되는 건가.

서릿발 같다던 제국의 대공 어디 갔어.

“제 공으로 삼지 않고.”

이건 큰 건이었다.

명예도, 금전도, 권력 또한 한 움큼 쥐어 잡을 수 있는 기회.

‘내게는 오히려 독이지만.’

말뜻을 이해한 그가 고개를 바로 하고 웃는다.

“제가 원하는 건 여기 있어서.”

두루뭉술한 그의 대답을 더 추궁해 보려던 차 요란한 차림의 비오첼라 백작이 눈에 들어왔다.눈이 마주치자 거만하고 삐뚠 미소로 다가오는 것이 제 무게에 비해 발걸음이 가볍다.

“벨리타! 잘 지냈느냐.”

거래 품목의 절반에 달하는 돈을 받아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백작의 태도가 유순하다 못해 진심으로 나를 기꺼워하는 것 같아 힘들었다.

‘부담스럽구나, 그 면상.’

“백작님께서 이리 챙겨주시고 살펴봐 주시니 제가 요즘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백작이 돌연 제 옆에 선 이를 가리킨다.제 아비가 탐욕에 찬 멍청이라면 쟤는 비열한 모략가다.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예를 표하자 레오 비오첼라의 시선이 날 위아래로 훑는다.

“그대가 벨리타 상단주라고.”

“예, 그러하옵니다.

도련님께서 이번 거래를 친히 주도해 주셨다 들었어요.”

“…그랬지.”

최대한 아무 생각 없어 보이게 방긋방긋 웃자니 입가에 경련이라도 날 것 같았다.마차도 채비를 마쳐가는 것 같으니 우리도 이만 빠져야겠어.

저 뱀 같은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슬슬 내 빈약한 연기력이 걱정된다.

“이번 거래가 무사히 성사되면 제가 꼭 두 분께 자그마한 성의를 표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옥이다, 이것들아.’

“그거 좋지.

내 기대하고 있으마!”

그래, 지금이라도 그렇게 많이 웃어둬라.

호쾌하게 웃는 백작과 다르게 그의 아들은 내내 무언가를 고심하듯 내게 시선을 두었다.표정 하나 없던 레오 비오첼라의 얼굴에 드리운 묘한 미소가 불길하다.

“그럼 저는 이만―”

“같이 가지.”

“네?”

한 걸음 더 내 앞으로 거리를 좁힌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바로 뒤에 서 있던 대공의 움직임이 느껴져 재빨리 손짓을 건넸다.진정해.

진정하자, 디에고.

“벨리타 상단에 궁금한 게 많아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단호하게 웃는 꼴이 거절 따위는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왕국 평민 출신, 이거 불과 아까까지만 해도 참 괜찮았는데…….

‘아, 얘랑 마차 타고 대화하는 것도 큰일이긴 한데.’

뒤에서 으르렁대는 쟤가 과연 이걸 참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레오 비오첼라의 시선이 마주 앉은 대공에게 향했다.

슬쩍 옆을 보았다.

꼿꼿이 세운 상체가 정말 늠름하기 그지없구나!

‘…이제 나도 모르겠다.’

돌덩이처럼 자리한 대공을 빤히 보던 백작 영식도 관심을 끄기로 한 것인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숲에서 하루 머물 예정이니 그대는 거기까지만 동행하도록 하지.”

‘숲까지 가면 난 저택에 언제 돌아가니.’

“좋아요.”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간략하게 답하기로 했다.

말을 많이 섞을수록 드러나는 것이 많을 테니 조심해야지.그가 다리를 꼬며 상체를 뒤로 기댔다.

저 오만한 눈빛과 비릿한 미소가 단숨에 마차 안 분위기를 바꿔 나갔다.

“정체가 뭐야, 너?”

떠본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니! 제 귀와 눈에 닿은 모든 정보를 취합해 봐도 성에 차지 않았겠지.그러나 틈을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체요? 슈베른 왕국 출신 상단주지요.”

“그게 다야?”

“아! 도련님도 제가 너무 어려서 의아하신가 봐요.

사실은 왕국에 계신 아버지가 상단의 실질적 주인이시고, 저는 단지 제국이 좋아서 상단주 명목으로 머무는 거랍니다.”

“그래서 사실 일에 관한 건 아무것도 몰라요.”

라며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듯 덧붙이고 웃었다.내 말의 진위를 파악하듯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오 비오첼라의 얼굴에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이런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저희가 돈이 꽤 많아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편이거든요.”

누가 봐도 생각 없어 보이는 말을 조잘조잘 연이어 떠들자 백작 영식의 표정이 심드렁해진다.

‘그래, 너도 질리지? 뭐, 말이 통해야 의심도 하고 그러는 거지.’

벨리타는 그런 애 아니다.

벨리타는 돈과 자유분방함으로 무장한 아이라고.그리고 너는 의심은 많아도 눈앞의 먹이를 놓을 수 있는 인간이 못 되지.

“이번에 보니까.

정말 흥미로운 물건이 많더라고요.

제가 생각해 봤는데! 앞으로 벨리타 상단의 왕국 납품 건은 도련님 상단이 도맡아 주시면 어떨까요?”

“뭐?”

마차에 올라설 때만 해도 잔뜩 경계하던 레오 비오첼라.그러나 이후 내가 연신 떠들어대는 꼴을 보더니 그냥 돈 많은 괴짜, 바보 정도로 여기게 된 듯싶다.

‘나, 쐐기 박는다.’

“사실 아버지가 왕국에 충심이 있으셔서 이 일을 해온 거지.

돈이 되어서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쪽으로 자질도 없고…….

그러니 도련님께서 저희 상단의 일을 봐주신다면 그 은혜, 제가 가진 것으로 성심껏 보답해 드리면 어떨까 하고.”

일말의 의심마저 지우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인 제안에 그의 동공이 바삐 돌아갔다.그래, 처음 다짐과 달리 내 생애 제일 많이 말한 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을 털었는데.

“…성급히 결정할 일은 아니니, 이번 일 마무리된 후에 다시 논의해 보지.”

‘에이, 지금 당장 수락하고 싶은데 참는 거 다 보인다, 야!’

짐짓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인 내가 사르륵 눈웃음을 지었다.

“꼭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셔야 해요!”

어느새 여동생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피식 웃어 보인 레오 비오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우리 각하.’

내가 이렇게 말을 쏟아내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대공.

그래도 참 얌전히 있어주었는데.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자 아예 내 쪽으로 얼굴을 튼 대공의 시선이 강렬했다.

‘창피하니까,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지 말아줄래?’

적나라한 그 시선 속에 황당, 억울함 그리고 미약한 분노가 섞여 있다.나도 복잡한 심경이다.

이러고 있는 내가 나도 싫다고.그 뒤로 제각기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마차 안은 고요했다.덜컹―

“이제 일어나지 그래?”

정적을 비집고 들어온 낯선 목소리에 눈을 뜨자 밤이다.

‘…잤어? 나 지금 여기서 잔 거야?’

너무 당황스러웠다.

곁눈으로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나 자면서 실수한 건 없겠지?

“언제 잠이 들었지……?”

멋쩍게 중얼거렸으나 마차 안에 그런 날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벨리타라는 인물, 어쩌면 내 안에 그런 모습이 조금은 존재했던 것 아닐까.

“…그만 내리시죠, 주인님.”

“아.”

레오 비오첼라는 이미 내리고 없었다.

대공이 마차 밖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탁―적막해야 할 숲을 배경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인영들이 보인다.

하룻밤 묵기 위해 막사를 치고 바삐 몸을 놀리는 이들 사이사이를 눈으로 좇았으나, 영애로 짐작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안 보이는 곳에 숨겼겠지만, 혹시나 싶어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네.’

“도련님, 그럼 저는 이만 뒤따라온 제 마차로 돌아가 봐도 될까요?”

“가봐.

나눴던 이야기는 돌아가서 다시 하도록 하지.”

나는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를 예의 그 미소를 걸고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더는 내게 큰 관심이 없는지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레오 비오첼라의 뒷모습에서 대공에게 시선이 옮겨간다.

“돌아갈까?”

무언가 불만이 가득 찬 것 같은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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