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비루한 판델 남작가의 유일한 자랑, 머리와 눈동자 색을 두고 황금 여인이라 불리던 아이비 판델.그녀가 가녀린 팔을 들어 꾸역꾸역 눅진 수프를 입에 머금었다.
자랑하던 금발은 그새 윤기를 잃었으나 금안만은 총기를 잃지 않았다.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그나마 집안의 이름을 알렸다는 이유로 가문의 예쁨을 받으며 그것을 자부심이라 여기고 살아왔는데.
‘비참하네.
아무 힘도, 의미도 없는 거였는데…….’
며칠 전 천으로 눈이 가려진 채 알 수 없는 사내들의 험악한 손길을 받으며 이곳으로 끌려왔다.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러나 처지를 슬퍼하고 낙담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비오첼라 저택인 걸까.’
그간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와의 만남으로 돌아가는 상황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저를 끌고 온 주체가 비오첼라라는 것만은 알겠으나, 제가 있는 곳의 위치는 특정하기 힘들었다.
‘…저택에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나.’
빛이라고는 벽에 걸린 초 하나가 전부.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디찬 공간의 모습에 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죄인도 아닌데 쇠창살 안에서 먹고 자고 할 줄이야.
그보다 더 절망적인 건 제가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이었다.눈을 감고 그날을 더듬는다.
이 상황을 악몽으로 치부하고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
제가 제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매일 되새기는 그날의 대화.
- 이대로라면 영애는 왕국에 노예로 팔려갈 겁니다.윈데이너 영애 본인의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찡그린 표정에는 괴로움이 묻어났었다.
- 영애도 다른 그 누구도, 그들에 의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죠?고개를 들어 돌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다른 여인들을 바라봤다.
저까지 네 명.하나같이 한미한 가문이라 사라져도 모를 법했다.
그녀 아이비 판델을 포함해서.
“너는 뭐 믿는 거라도 있니?”
날 선 눈으로 아이비를 노려보는 여인은 반항의 흔적으로 여기저기 옷깃이 찢겨 있었다.
다른 둘은 정신이 나간 채 종일 울었고.
‘글쎄다.’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저들의 모습과 제가 다를 게 무언가.
제 아비와 같은 제국민, 같은 귀족이라 여긴 비오첼라에 의해 노예로 전락한 지금.더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비비안 윈데이너.’
같은 귀족이라도 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그들, 비비안 윈데이너와 스텔라 마이어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제가 얼마나 그간 허무맹랑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어설픈 가문의 여식에게 조금 잘난 낯이란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우습네.”
자조적인 웃음이 어둠 속에서 번져간다.정말 하등 상관없는 이들을 위해서 손을 써줄까.
어쩌면 미리 언질을 주고 이런저런 것을 챙겨준 것만으로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베푼 것 아닐까.
- 꼭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조금만 힘을 내줘요.사실은 믿고 싶다.
매달리고 싶었다.
제 얼굴을 감싸던 손의 온기.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도 또렷이 보였던 빛나는 눈동자를.비비안 윈데이너, 그녀와 손을 맞잡았을 때의 그 안온함.아이비 판델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거세게 머리를 털었다.이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자신뿐이다.
그들이 저를 도와줄지, 말지는 제가 어찌 해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할 일을 하자.’
오히려 전보다 청명해진 눈동자에 결의가 비친다.탁, 탁―단 하나의 통로.
위로 향하는 계단에서 사람 발소리와 함께 밝혀지는 빛이 점차 진해졌다.
“이런.”
이죽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오 비오첼라였다.쇠창살 앞까지 걸어온 그가 그 안의 여인들을 느리게 훑는다.
마지막에 그의 시선이 머문 것은 아이비 판델이었다.
“아이비라고 했나.”
그를 피하고자 내리깐 눈에 더 힘을 준 그녀의 모습이 애처롭다.그런 그녀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은 레오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이비의 금발을 눈으로 탐한 그가 입을 뗐다.
“참 알 수가 없어.
그렇지?”
다리를 굽힌 레오가 쇠창살 사이로 불쑥 손을 집어넣어 아이비의 금발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 타고난 외모 덕에 지난 세월 꽤 행복했을 텐데, 이젠 덕분에 삶이 송두리째 뜯겨 나가다니 말이야.”
그 거친 손길에 입술을 파르르 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돌바닥에서 자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흥미가 없어진 듯 손을 놓은 레오가 일어섰다.
“내일, 그대들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러 갈 거다.”
비릿하게 웃은 그가 몸을 돌려 내려왔던 계단으로 향했다.
다시 저만의 왕국을 향해 나아가는 뒷모습이 여인들에게 절망을 선사한다.타인의 고통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에서 발이 꺼져 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더, 더 모래를 쌓는 데 열중하는 비오첼라였다.
“허어엉.”
“흑흑.”
그의 말이 떨어지자 숨죽여 울던 두 여인이 목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미친놈들.”
분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입술을 짓씹으며 울분을 삼키는 영애까지 눈에 담은 아이비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 미안해요.
완벽하게 알아내지는 못했어요.속상함 가득한 얼굴로 제 손을 꼭 잡고 말하던 윈데이너 영애.마차를 통해 이동하는 것은 맞는데 검문에도 걸리지 않고 통과한 방법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최측근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단의 행렬에 제 사람들이 포진해 있을 거라고.
가능한 접촉할 수 있게끔 노력하겠지만 어렵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던 비비안은 마음이 안 좋은지 연신 저를 위로했었다.
- 정 안 될 것 같으면 그땐 권력, 무력으로 찍어 누를 거니까.
걱정 마세요.심각한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던 비비안을 떠올리자 아이비의 긴장이 한 꺼풀 벗겨진다.비록 힘이 없다지만 사교계를 드나들던 귀족이었다.
귀족들에게 명분,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흠집 내고 싶어 하는 대상이 어떤 이들인지 잘 안다.비비안의 말대로 힘으로 저보다 낮은 귀족을 내리누르고자 할 땐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그러니 아무런 증거도 얻지 못한 채 비오첼라 상단의 앞을 막아선다면, 질책과 비난, 더불어 금전적 보상까지 잃을 것이 많겠지.이내 담요를 집어 든 아이비가 몸을 웅크린 채 누웠다.
“…너는 지금 잠이 오니?!”
자둬야 했다.
조금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한 발이라도 더 내밀 수 있는 체력으로 제 몫을 해내야겠다 다짐한 그녀가 눈을 감았다.*빛 하나 들지 않는 비오첼라 저택의 가장 어두운 아래.낮인지 밤인지, 시간의 흐름을 전혀 알 수 없는 그곳에 사람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표정도, 감정도 없어 보이는 두 명의 하녀가 쇠창살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저, 저기.
도와주세요.”
반쯤 정신이 나간 여인이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하녀의 치맛자락을 움켜잡는다.그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녀들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여인들의 옷을 바꿔 입히기 시작했다.그를 보던 아이비 판델이 손을 내밀었다.
“제가 갈아입을게요.”
잠시 그런 그녀를 빤히 보던 하녀가 무심한 손길로 옷을 건넸다.제 손에 들린 옷을 가만히 본 아이비가 입술을 깨물며 한쪽 구석으로 향한다.
‘옮겨야 해.’
초조한 눈길로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그녀가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있던 드레스 안쪽, 숨겨진 주머니를 뜯어낸 그녀가 조심스레 손에 쥐었다.
‘하녀 옷인가…….’
다행히 평소 입는 드레스와 달리 주머니가 달린 옷.
혹시 옷이나 몸을 검사하지는 않을까 겁이 났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 약물, 이동하기 쉽게 수면제 효능이 있는 것을 먹일 확률이 높아요.비비안 윈데이너 옆에서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스텔라 마이어 백작 영애.제 손에 쥔 이 작은 주머니는 그녀가 건네준 것이었다.
다는 아닐지라도 약물에 취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잡혀오는 순간에는 한낱 영애가 무언가를 준비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해서인지 별다른 몸수색이 없었던 터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멀었나.”
언제 온 것인지 덩치 큰 사내가 쇠창살 앞에서 여인들을 재촉한다.찰캉―다시금 굳건하던 문이 열리고 우악스러운 몸짓으로 들어선 사내들.
“자, 잘못했어요.”
반쯤 정신이 나가 잘못을 비는 여인부터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여인까지.
“묶어.”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명하자 사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인들의 양손을 포박하고 천으로 눈가를 가린 채 일으켜 세운다.
“어, 어디 가는 건가요, 네?”
불안한 목소리와 함께 떨어지지 않는 발을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내디뎠다.그중 아이비 판델만은 쉴 새 없이 떨려오는 제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역설적이게도 어둠 속으로 들어서야 이 끔찍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초조하게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칠게 자신들을 끌고 나가는 행위 외에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한참을 걷다 어느 곳으로 저를 밀어 넣는 손길에 앞으로 고꾸라진다.
“악.”
다른 여인들도 별반 다른 상황은 아닌지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었다.넘어진 채로 굳은 여인들을 보던 사내가 다리로 그들을 밀며 마차 한구석으로 몰았다.짐마차는 소파 같은 물품 없이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인들이 벽에 기대 몸을 웅크렸다.
“어어억.”
발버둥 치는 여인의 턱을 부여잡고 사내가 병에 든 액체를 입 안으로 부었다.
그 투박한 손길에 약물이 반쯤 턱을 타고 흐른다.
“그냥 마셔, 안 죽으니까.”
짜증 섞인 말을 내뱉은 이가 켁켁대는 여인을 뒤로하고 그 행동을 반복했다.그 일련의 과정을 청각과 촉각으로 가늠하던 아이비 판델의 몸이 굳는다.독은 아닐 것이라 했다.
자신은 곱게 단장해 팔아야 할 상품이라 했으니까.
그럼에도 커져가는 두려움을 막을 길이 없다.
‘정말 효과가 있을까.’
옷을 갈아입으며 미리 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먹은 그녀였다.
제발 부디 이게 효과가 있기를 바라던 그녀에게도 자비 없는 손길이 다가왔다.생리적인 거부반응을 미약하게 보인 아이비 또한 강제로 흘러들어오는 약물에 헛구역질을 연달아 했다.
“성가셔 죽겠군.”
기침과 구역질을 하며 축축 늘어지는 여인들을 앞에 두고, 제 할 일을 끝낸 사내는 손을 털고 마차를 나섰다.공간을 가득 채운 흐느낌이 점점 잦아들고 그 어떤 소음도 사라진 순간.여태 한 번도 눈물 흘린 적 없던 여인의 숨죽인 울음이 처연하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