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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39화 (39/109)
  • 39화

    【 세 사람의 마음 】

    윈데이너는 저택의 문을 잘 열지 않았다.

    원체 연회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 어떤 행사도 모른 척 넘어가고는 한다.다만 1년 내내 한 번을 안 여는 것도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으니.생일 축하 연회 한 번은 거하게 진행하고자 하는데, 매년 누구를 주체로 한 연회를 열지에 대해 부녀가 다투고는 했다.

    “제 기억에 작년에도 제 생일 축하 연회를 열어주시려고 하지 않으셨나요?”

    비록 호수 뱃놀이 때 쓰러지는 바람에 취소하기는 했지만.입만 웃은 내가 물었으나 꿈쩍도 안 한 채 옅은 미소로 응수하는 아버지.

    “결국 네가 아파서 못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더욱 올해 네 생일을 축하해야지.”

    거짓은 아니나 완벽한 답도 아닌 아버지의 말에 나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올해는 이미 끝난 일이니 내년이라도 기약해 보자…….’

    “…내년에는 아버지 차례예요.”

    곁눈으로 아버지를 흘긴 나는 좀 더 몸을 소파에 파묻었다.요 며칠 생일 축하 연회 준비한다고 얼마나 번잡스러웠는지.저무는 해를 보며 쿠키를 입에 물었으나 피곤이 가시지 않는다.

    그렇게 창을 내다보고 있으니 한 사람이 떠올랐다.

    ‘폭풍 전야인가.’

    참 이상하지.

    피한다고 피해지던 사람이 아닌데.

    술주정 사건 이후로 대공을 한참 보지 못했다.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설마? 설마 그날 내 주정 보고 정떨어지기라도 한 거야?내일 오겠지……? 기분이 이상하다.

    그가 오면 어떻게 얼굴을 볼까 싶기는 한데, 안 온다고 생각하니 그건 더 찝찝했다.

    “내일 황태자 전하도 오신다고 하더구나.”

    내 생일 축하 연회라면 얼굴만 잠깐 비치고 갈지언정 꼭 들여다보던 사람이라,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지만 걱정이 앞섰다.몇 년 전엔 글쎄, 마차에 집무실을 옮겨온 줄 알았다.

    마차 안에 놓인 서류를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매번 무리해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비비안, 전하가 단지 무리해서 네 생일을 챙긴다고 여기느냐.”

    고개를 저었다.

    워낙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날 생각한다는 명목하에 평소 저택을 찾아오는 일이 없는 리안.

    그럼에도 내 생일 축하 연회만은 매번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찾아준 그였다.

    “아니요.

    오히려 연회에 참석하는 그 어떤 이보다 제 생일을 축하하시는 분이죠.”

    그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참석하든 안 하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거였다.

    “걱정보다 반가워함이 전하가 더 기대하는 바겠지.”

    인자하게 미소 짓는 아버지의 얼굴을 따라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내 추태에 질린 거야?’

    한 번 가정하기 시작하자 멈추지 않고 생각이 뻗어 나갔다.

    내가 입술 좀 뺏었다고 마음이 변한다고? 아니, 턱이 좀 발갛게 변했던 것 같기는 한데, 남자가 턱 좀 아프다고 마음을 바꿔?

    “…하아, 그런 게 아니란 건 나도 아는데.”

    늦은 밤, 나는 소파에 늘어져 창밖의 달을 감상했다.

    잠이 안 와서다.

    그동안은 연회 준비한답시고 바빠서 이렇게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는데.기별 없는 대공 때문에 마음이 착잡하다.

    “바쁜 게 낫네.”

    그의 얼굴을 그려보고 목소리를 되새기자 울적해졌다.

    보고 싶었다.

    ‘서운해.

    어떻게 이렇게 발길을 뚝 끊을 수가 있어?’

    생일을 코앞에 두니 어쩐지 서러움이 배가된다.

    “연인이라며!”

    주먹으로 소파를 내리치며 빽, 소리쳐 봐도 답답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찔끔 새어 나오는 눈물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쿠션에 얼굴을 꾹 눌렀다.똑, 똑똑―

    “…뭐야.”

    슬쩍 고개만 돌리자 발코니 창을 사이에 두고 나를 바라보는 인영이 보였다.어둠에 가려졌음에도 그 몸의 형태만으로 알아볼 수 있는 단 한 사람.힘없이 상체를 들어 멀뚱히 바라보자 한 번 더 창을 두드리는 대공.

    그의 얼굴에 미소가 머물렀다.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의 눈동자에 의문이 담겼다.

    ‘와, 얼굴만 봤는데 눈물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참아보려 하는데 좀처럼 쉽지 않다.

    술주정 다음에는 눈물 바람인 건가.

    “이건 아니야…….”

    입술을 깨물고 심호흡을 하자 마구잡이로 휘몰아치던 감정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다.홱 고개를 돌리자 발코니 손잡이를 힘주어 잡은 그가 보인다.

    설마 지금 힘으로 문 부수고 들어오려던 거 아니겠지?멈칫한 대공의 얼굴이 심각했다.천천히 일어나 발코니 창 앞에 서자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찰칵―문을 열자 바람과 함께 대공이 나를 품었다.

    “비비안.”

    이제는 익숙한 그의 체취와 품을 마주하자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금 솟구쳐 오른다.

    “뭐 하느라 이제 와요?”

    “응?”

    “…내가 싫어진 줄 알았어.”

    다급한 손길로 나를 제 품에서 떨어트린 그가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술 취해서… 이상한 짓을 좀 많이 해서, 그래서.”

    울컥 치미는 감정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자 그의 두 손이 내 얼굴을 감싸 저를 바라보게 한다.

    “정말 미치겠군.”

    미치겠는 건 난데, 지가 왜? 인상을 찌푸리는 나와 달리 그의 얼굴은 온통 풀어져 있다.이마에서부터 입술을 맞추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대공.

    눈꺼풀에 한 번, 코끝에 한 번.

    시야 가득 그의 푸른 눈이 채워지더니 입술이 맞닿았다.심장이 저릿할 만큼 야했다.

    그 느릿한 움직임이, 서로의 숨이 여실히 느껴지는 그 순간들이.가볍게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한 입씩 머금은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날 네가 더 좋아졌는데, 나는.”

    그의 달콤한 속삭임에 맥이 탁 풀렸다.

    ‘…이거였네.

    이 말이 필요했던 거야.’

    근래 내가 괴로웠던 건 수치심보다 혹여나 나의 어떤 부분을 이 사람이 싫어하지는 않을까, 싶어 생긴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었다.

    ‘내 전부를 다 좋아해 주기를 바라다니.

    내가 이렇게 허무맹랑한 사람이었나.’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내가 의아한지 조심스레 나를 살피는 대공의 시선이 느껴졌다.하늘과 바다를 담은 그 눈은 낮과 같이 청명하기도, 때때로 밤이 내려앉은 바다와 같이 깊어지기도 했다.그의 수많은 조각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한 그 눈동자가 나를 끌어당긴다.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그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그에게서 마치 세례를 기다리는 자의 경건함마저 비치는 듯했다.

    ‘참, 곱다.

    고와.’

    예술품을 감상하듯 눈에 담은 후, 그의 얇은 눈꺼풀 위에 살며시 입술을 내리누르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그 낯선 연약함에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어느새 이렇게 멀쩡한 정신에도 입술을 들이밀 수 있는 담력이 생긴 거지? 놀랍다, 비비안 윈데이너.

    어른이다, 어른!

    “울 것 같다길래, 걱정했는데.”

    “조금 늦었으면 발코니 창을 망가뜨릴 뻔했잖아.”

    라며 속삭이는 그의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흔들리던 동공은 어디 가고 그새 여유를 찾은 그를 보자 괜히 아쉽다.

    ‘잠시 잊었는데.

    내 생각 다 보지, 너.’

    처지를 실감한 내가 고개를 흔들든 말든, 자연스레 손을 잡은 그가 나와 함께 소파로 향했다.

    여기가 네 방인지, 내 방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자.

    앉자, 비비.”

    나를 앉히고, 내게서 손을 뗀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꿍꿍이 가득한 미소로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 그에게 손을 뻗었다.그러자 가볍게 손길을 피한 그가 연신 생글거린다.

    ‘…너 지금 뭐 하는?’

    “해두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정확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거든.”

    대놓고 지금 내 마음을 훔쳐보겠다고 선언하는 연인을 보자 마음이 뒤숭숭했다.

    이거 맞아? 연애 이렇게 하는 거 맞는 거야?

    “그대가 술 먹으면 한없이 사랑스러워지던데.”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라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열기가 느껴졌다.

    어쩜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한 채 할 수 있는 거지?

    “그걸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보는 게 싫어서 말이야.”

    “…….”

    “네가 하고 싶은 일 뭐 하나 막고 싶지 않았는데, 이거 하나만 부탁할게.”

    “…부탁이요?”

    “응.

    술은 나하고만 먹자.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아니다, 아니야.

    최근 잠자기 전이면 귀신같이 찾아오는 회상의 시간을 내내 가져왔다.

    반복할수록 또렷해지는 그날의 기억, 그것은 지금 대공으로 인해 조금 미화되었지만 확실히 꼴사나웠다.

    ‘내가 알아.

    그거 아니야.

    술은 이제 아무하고도 마시는 거 아니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대는 대공을 보자 확실해졌다.

    ‘나는 네 마음이 보이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알 것 같구나.’

    “저 술 끊었어요.”

    쀼루퉁하게 내뱉자 그가 멀어졌던 만큼 돌아와 나를 끌어안았다.

    뺨에 닿은 그의 탄탄한 복근을 만끽하는데 커다란 손이 토닥토닥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쉬운데.”

    목소리에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대공이 이내 몸을 떨어트려 내 옆에 앉았다.가만히 소파에 몸을 기댄 그가 무언가를 기다리듯 조용했다.

    “뭐 하세요?”

    “설레는 중.”

    야살스런 미소를 띤 대공이 눈매마저 사르륵 접는다.

    야밤에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정신 차려.

    덮치면 끝이다.’

    혹여나 제멋대로 그를 풀어 헤칠까 싶어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버티는데, 12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짧은 감탄과 함께 대공이 몸을 바로 세우더니 품속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든다.몸을 틀어 내게 향한 그가 보랏빛 상자를 열어젖혔다.보라, 분홍 그리고 푸른 보석이 자잘하게 별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목걸이가 검은 바탕에 대비되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생일 축하해, 비비안.”

    “…이게?”

    느리게 목걸이를 들어 이음새를 푼 그가 그대로 손을 뻗었다.

    내 목 뒤로 손이 넘어가기 직전 멈춘 그가 낮은 소리로 묻는다.

    “채워도 돼?”

    그가 채우려는 것이 단순한 목걸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이 내 귓가를 지나 목덜미를 향했다.쇄골에 닿은 목걸이의 차가움이 달아오른 몸에 비례해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과한 긴장의 시간이 지나고 숨 고를 틈도 없이, 농밀한 그의 시선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손가락으로 내 목선을 따라 목걸이를 쓸어내린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팽팽한 분위기와 진득한 손길을 견디기 어려워 숨이 막혀왔다.

    “흡.”

    살갗에 닿는 머리칼이 간지러웠다.

    목걸이가 놓인 곳, 그곳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제일 먼저 축하해 주고 싶었어.”

    어딘가 애틋한 그의 말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쩌면 나도 네 축하를 가장 기다렸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몽롱한 시선을 들어 바라본 곳에 소유욕 가득한 눈으로 해사하게 웃는 그가 있다.

    “…예쁘다, 비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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