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황후궁 정원, 울창한 숲을 닮은 그곳에 식탁과 네 개의 의자가 자리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황후, 제피아가 걸음을 옮겼다.
“정리되었으면 다들 물러가거라.”
명이 떨어지자 바삐 마무리 손을 놀리던 시종과 시녀들이 잰걸음으로 사라진다.의자 하나를 차지한 제피아가 우아한 손짓으로 제 드레스를 정돈했다.
아주 오랜만에 성사된 식사 자리에 만면에 기쁨이 들어차 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려, 황후.”
봄 햇살을 등에 업은 채 나타난 황제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러시는 폐하도 퍽 기쁜 얼굴이십니다.”
서로를 향한 눈빛에 애정과 장난기가 담뿍 담긴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어떨 것 같소?”
“무엇이요?”
황제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다 알면서도 황후가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저 또한 궁금하긴 매한가지였다.같은 이를 바라던 두 아이의 마음이 지금 어떠한지.
“직접 보면 될 것 같구려.”
호기심을 미처 숨기지 못한 황제의 눈이 반짝이며 한곳을 응시했다.
장성한 황태자와 대공이 함께 정원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어린 그들의 환영과 겹쳐진다.
“언제 저렇게 컸는지 모르겠소.”
황제와 꼭 같은 그림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챈 황후 또한 그리운 눈길로 그들을 살폈다.
“어서들 오시게.”
반가움이 묻어나는 황후의 알은체에 두 사람이 허리를 숙였다.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표한 황태자와 대공이 각기 자리로 향한다.함께하기로 한 넷이 모두 모이자 한낮의 정원에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울렸다.
“대공이 이리 오래 수도에 머물러주니 기쁘기 그지없군.
안 그런가, 황후?”
옅은 밀색의 술이 반짝이는 잔을 흔들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예.
무엇이 대공의 발을 붙잡고 있는 것인지 참, 감사해야겠군요.”
접시에 담긴 고기를 썰며 미소 지은 황후의 말에 맞은편 두 사람의 손이 멈춘다.나이프를 쥔 손에 한 번 힘을 준 대공이 고개를 들어 웃었다.
“감사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거슬리는 자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이라서요.”
“아, 내 잠시 잊었던 모양이오.
비오첼라를 잡으러 이리 온 게지, 참.”
여상히 고개를 끄덕인 황제 내외가 식사를 이어가려는 차, 황태자의 입이 열렸다.
“…그뿐이십니까.”
부드럽게 나이프로 고기를 썰어낸 황태자가 그대로 식기를 내리고 술잔을 쥐었다.그 일련의 행동을 가만히 눈으로 좇던 대공이 멈췄던 손을 움직여 식사를 이어갔다.
그가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은 채 답을 늦춘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말을 흐린 대공의 얼굴에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웠다.
제가 이곳에 머무는 이유, 비비안 윈데이너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표정이었다.그 표정을 본 황제 내외가 드물게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대공이 부모를 잃은 이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큰 이유,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황제는 속으로 탄식했다.
제 아들은 끝내 그것을 물어서 무얼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대공이 고개를 돌려 황태자의 무감한 옆모습을 보았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눈과 얼굴.
새삼 찬찬히 살펴본 리안은 퍽 매력적이었다.
‘비비안, 알 수가 없군.’
딱 저를 바라보는 속내만 보아도 외모에 쉽게 휩쓸리는 그녀가 황태자에게 여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의아했다.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대공이 조심스레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비비안 윈데이너.”
대공에게서 흘러나온 이름에 황태자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있어서, 그래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담담히 낯간지러운 소리를 내뱉는 그를 보던 황제가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네가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줄은 진정 몰랐구나.”
호쾌하게 웃은 황제가 고개를 기울이며 가느스름한 눈으로 대공과 황태자를 살폈다.
“하나 그 아이는 황태자비 내정자인데?”
한 손에 턱을 괴고 느른하게 웃은 황제의 눈이 날카로웠다.
그를 받아내고 있는 대공의 눈이 가라앉는다.
“폐하, 이제 그만 그 짐을 비비안에게서 내려주실 때가 되신 것 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답은 황태자에게서 흘러나왔다.
내내 아래를 향하던 그의 눈이 들어 올려진다.
그 황금빛 눈동자가 맑게, 처연한 빛을 내뿜으며 제 아비의 눈으로 향했다.끝내 이 주제를 놓지 않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는 이제 오랜 세월 아닌 척, 기대왔던 그 끈을 놓을 때가 되었다 여겼다.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황제가 큰 숨을 삼키며 술을 찾는다.
‘저리 올곧기만 해서야, 원.’
내내 비비안의 주변을 맴돌기만 하고 제가 가진 그 무엇이 그 아이를 상처 입히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 아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아비의 입장에서는 참 씁쓸한 일이었다.
“황태자비라는 자리가 부담스러운 것 같으니, 자리에 가려진 채 마음을 전하고 싶지는 않군요.”
희미한 미소를 걸친 황태자가 단호히 말했다.
내가 황태자라서, 네가 윈데이너라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은 것이라고.
“대공도 비비안에게 힘을 빌려 강요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황태자의 시선이 대공에게 향하며 경고를 전했다.
리안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비비안을 상처 입히지 않도록, 해롭고 위험한 것을 치우는 일.저 자신 또한 그녀에게 위험하다 여겨지면 거리를 두었을 만큼 절절한 마음이었다.대공 또한 그것만큼은 황태자와 같았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진중한 분위기가 정원을 덮은 그 순간, 황후의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불쑥 들어섰다.
“그보다 그 아이에게 강요가 통하던가요?”
제 미간을 살며시 찌푸린 황후가 술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지금 다들 무슨 유리라도 되는 양 비비안 윈데이너를 싸고도는 분위기인데.
“저는 여태 한 번도 그 아이가 제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군요.”
눈썹을 들썩이며 대공과 황태자를 번갈아 바라본 그녀가 동의를 구했다.
“그도 그렇군.
무려 황제가 이리 밀어붙이는 데도 여태 굳건한 것 보라고.”
황제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끈질긴 것을 알지만 걔는 더했다.사실 그랬다.
황태자가 막아서도 비비안은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은 했으며, 대공 또한 위험에서 그녀를 떨어뜨리고자 했으나 결국 휘둘리고 있을 뿐인 현실.당장 비오첼라 사건만 봐도 그랬다.이를 알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황후의 안타까운 시선이 그 틈을 빌려 제 아들에게 향했다.
같은 마음이어도 방향이 달랐다.황태자는 사랑하는 이에게 안전하고 완벽한 세상을 주고자 했으나, 그곳에 그 자신은 없었다.슬며시 돌아간 황후의 시야에 무엇을 떠올리는지 눈을 휜 대공이 잡혔다.
채 지워지지 않은 눈동자에 비친 사랑.제 보기에 대공은 비비안의 곁에 머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았다.이 엇갈린 마음의 행방이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가는 황후였다.*
“판델 남작 영애의 신변이 비오첼라에게 넘어갈 듯싶으니 곧 거래일이 정해지겠어요.”
술을 들고 비오첼라가로 쳐들어간 비비안, 일이 끝나면 바로 저를 찾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잠잠했다.
서신으로 일의 경과는 주고받았으나 그뿐이었다.
‘득달같이 달려와 일의 전말을 토로할 줄 알았는데.’
혹여나 또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닌가.
저택과 그 주변을 내리 살폈으나 이렇다 할 정황은 찾지 못하였다.다만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저택에 머물며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괴로워하였다, 라는 게 레사를 통해 전달받은 전부.결국 답지 않게 먼저 윈데이너 저택을 찾은 스텔라가 퀭한 비비안을 살폈다.
“영애가 그날 동행 약속을 받아낸 덕에 한결 일이 수월해졌네요.”
‘그날, 이라는 단어에 몸을 움찔 떠는 것이 뭔가 있었나 보군.’
뻔했다.
저 영애가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릴 때는, 언제나 디에고 브라이트와 얽힌 무언가가 있을 때였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비비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여태 그날의 주정뱅이 기억을 털어내지 못한 터였다.
“그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찻잔을 쥐며 무심히 던진 질문에 비비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제가 각하를 덮쳤어요.”
시무룩한 음성과 다르게 그 내용은 너무 대찼다.
차를 입 안에 머금던 스텔라가 하마터면 도로 내뱉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기침을 한다.그런 그녀의 반응은 보지도 못하고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한 비비안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쳤나 봐요.
술 먹고 온갖 추태를 다 부린 것 같은데! 그게 또 잊을 만하면 하나씩 떠오르는 것이.”
“…술, 자신 있는 것 아니었나요?”
고개를 든 비비안의 눈에 물기가 들어차기 시작한다.
“제가 숙취도, 기억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네요.
그래서 저는 그냥 안 취하는 줄 알았어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스텔라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보듯 비비안을 빤히 봤다.
“덮친다라.”
스텔라의 한쪽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가며 콧방귀를 뀌었다.
‘모르긴 몰라도 각하는 좋아 죽었겠군.’
“그 뒤로 각하는 만나뵈었나요?”
사색이 되어서 고개를 젓는 비비안.
그를 보던 스텔라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자리했다.
“영애가 각하께 실수를 하신 것 같으니 당분간 피하시는 것이 좋겠네요.”
“아, 역시 영애도 그리 생각하시죠?”
제가 이렇게 조금 심술을 부린다 한들 그 남자가 이런 일로 흔들리는 일은 없겠지.
그러니 자연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었다.흥미가 떨어진 스텔라가 테이블을 검지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보다 마차라 하셨지요?”
달라진 화제에 비비안 또한 자세를 바로 하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예.
백작의 말에 따르면 마차 구조에 비밀이 있는 듯싶어요.”
고개를 주억거린 스텔라가 생각에 잠겼다.
비비안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판델 남작이 영애를 확실히 비오첼라에게 넘기게끔 한동안 압박을 주었다.
“비오첼라 상단이 한 번 움직일 때 마차의 수가 상당해서 하나씩 뒤지다간 먼저 빼돌릴 틈을 주는 것밖에 안 될 겁니다.”
비비안 또한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판델 남작 영애가 필요했다.
“이동하는 내내 같은 곳에 숨겨둘 수는 없을 거예요.
판델 남작 영애에게는 미리 일러두었어요.”
“사람을 좀 더 준비해야겠군요.”
이 일을 진행하는 것은 대체로 백작가의 장남 레오 비오첼라라고 들었다.
제 아비와는 다르게 일에 빈틈이 없다 하던데.
“쉽지 않겠어요.”
미간을 찌푸린 비비안을 보던 스텔라가 한 손에 턱을 괴었다.
손을 들어 비비안의 미간을 툭, 건드린 스텔라가 웃는다.깜짝 놀라는 비비안이 마치 토끼 같다 생각한 그녀가 느른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영애, 레사가 쉬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아니랍니다.”
그 자신만만함에 감동한 비비안이 반짝이는 눈으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약물에도 대비해야겠군.’
그 천진난만함을 보며 스텔라는 판델 남작 영애가 비오첼라가 먹여댈 약물을 버틸 수 있게끔 준비해야겠다는 계획을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