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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37화 (37/109)
  • 37화

    *지옥인가.

    지난 세월 쌓아온 업보? 죄가 이리 많았던가.

    “…머리, 떼어버리고 싶은데.”

    목소리가 바닥까지 잠긴 듯 띄엄띄엄 나온다.게다가 침대에 누워 있으나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머리는 누가 쥐어짜는 것 같고.

    목은 타는 갈증에 물을 들이붓고 싶은 심정이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 니.”

    괜찮지 않았다.

    끅끅대며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 숙취가 나를 외롭게 만든다.

    너무 아팠다.

    지독한 울렁거림과 두통에 눈물이 다 난다.

    ‘이게 무슨 일이야.

    술 마셔도 이런 적 없었는데.’

    “세상에! 지금 우세요?”

    마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얼굴에 연민이 없었다.

    숙취는 정정당당한 아픔으로 취급해 주지 않는 것인지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없다.

    ‘서럽다.’

    “물 좀 드세요.”

    씩씩하게 나를 일으킨 마리가 입가에 물잔을 들이댄다.기울어지는 물잔을 따라 생명수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물이 최고다, 최고야.

    ‘뭔가.’

    그 순간, 입술에 닿은 물잔의 감촉으로 퍼뜩 떠오르는 그림.입, 입, 입술.

    “으악! 아가씨!”

    그대로 흘러들어오던 물이 채 삼켜지지 못하고 턱을 따라 주륵 흘렀다.

    - 난 안 물어볼 거야!뭘 안 물어봐.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땡깡이라도 부리듯 눈을 질끈 감고 소리치는 내 모습이 그려지는데, 착각이겠지?

    “아이고.

    오늘 왜 이러실까, 정말.”

    한탄을 하며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고 탁자에 올려놓던 마리가 손뼉을 친다.

    “아참.

    이거 각하께서 아가씨 깨어나시면 전해달라 하셨어요.”

    마리의 손에 서신과 보랏빛의 앙증맞은 들꽃이 놓여져 있다.

    손톱만 한 꽃이 옹기종기 피어 있는 모습이 어여뻤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꽃을 받아들고 살피다 잠시 내려놓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신을 열었다.[다음에는 정말 묻지 않을게.

    그리고 앞으로도 디에고라 불러주면 기쁘겠군.

    나는 오늘, 네 덕에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만.

    그대는 평안한 밤이 되기를.]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다음이 뭐야.

    디에고? 내가 언제 디에고라고―보랏빛 꽃과 서신이 함께 시야에 잡히자 벼락을 맞듯 밀려 들어오는 기억들.달빛이 반사된 호수.

    보랏빛 군락을 이룬 꽃 무리.

    그리고 그 가운데 주저앉아 한참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너와 나.

    “뭘 탐해? 너? 나?”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풀쩍풀쩍 뛰어오르며 경악했다.

    “아아악.”

    머리를 있는 힘껏 쥐어짜며 격하게 앞뒤로 몸을 흔들었다.

    도저히 어떻게 뭔가 표출하지 않고는 감당하기 힘든 기억이었다.

    “…꿈? 그래, 꿈인가.”

    내가 그렇게 입맞춤이 하고 싶었나.

    꿈에서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나.

    “…아가씨, 진짜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혼자 날뛰는 나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마리가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정말 밤새 식은땀을 어찌나 흘리시던지.

    열이 올라서 그런가, 입술도 퉁퉁 붓고.”

    입술? 입술이 부어?헙―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세차게 틀어막았다.

    - …네가 좋아, 디에고.낯설다.

    내가 진짜 저런 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그리고 냅다 돌진해서 그의 턱에 입술을 들이박은 기억이 돌아왔다.

    ‘아, 아, 아.

    이런 기억 필요 없어!’

    침대에 엎어져 얼굴을 파묻고 비명을 질렀다.

    도저히 감당 안 되는 어제의 만행들이 줄이어 뇌리를 덮쳐온 탓이다.

    ‘미쳤나.’

    첫 입맞춤의 달콤함을 논할 여유가 없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어떻게 수습하지? 수습 가능한 문제이긴 한가.

    “…망명할까?”

    “예?”

    “말도 안 돼.

    진짜! 술이 이상했나? 왜 취했지?”

    침대 위에 주저앉아 고개 숙인 내가 어제를 되새겨본다.

    반말 왜 했지? 입술은 왜 자꾸 이마며 턱이며 돌진하고 난리였지, 어제의 나?

    ‘…욕구 불만이야?’

    “저 아가씨.”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마리가 입을 달싹인다.

    “그, 아가씨가 술을 잘 드시기는 하는데, 한 세 시간가량 지나면 취하시더라고요.”

    “뭐? 그럴 리가!”

    “보통은 기억도 숙취도 없으신데, 이번엔…….”

    “고통을 얻으신 대신 기억을 보존하셨네요.”

    라며 말끝을 흐리는 마리.

    ‘둘 다 필요 없어.’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불 속에 웅크렸다.

    답이 없다.

    망했다.

    더 고민할 힘도 없다.

    “망할.”

    *비오첼라가 운영하는 도박장 깊은 곳엔 도저히 그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할 만큼 넓은 응접실이 자리했다.비오첼라 가문 내에서도 가주와 그 아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공간.그곳에서 벽지와 가구의 화려함에도 뒤지지 않는 옷차림을 한 비오첼라 백작이 심드렁하니 말을 내뱉는다.

    “그리 알고 마차 몇 대 더 준비하도록 해.”

    제 아비를 바라보는 레오의 표정이 비렸다.

    근래 왕국 출신의 상인 계집이랑 어울린다 싶더니 끝내 사고를 친 비오첼라 백작을 보며 혀를 찼다.

    “무얼 믿고 그리 일을 벌이신단 말입니까.”

    “네 아비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책망하는 아들의 말투에 발끈한 백작이 버럭 성을 내기 시작했다.

    저 잘났다고 아비를 뭐 보듯 하는 자식이 아니꼬웠다.

    제가 생각해도 보석에 눈이 멀어 성급한 결정을 한 것은 아닐까, 내심 마음에 걸리던 차라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돈만 많은 계집이니 문제없을 게다.”

    그건 지금 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 레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 같이 가면 우리 상단의 비용까지 다 부담하기로 했어.

    게다가 거래하는 미약의 금액이 얼마인지 정녕 모른다고 할 테야! 놓치기 아까운 돈이야!”

    그건 그의 말이 맞았다.

    근래 노예 거래가 수월하지 못해 마땅히 쥐었어야 할 돈을 쥐지 못했으니까.도박장으로 벌어들이는 돈 또한 만만치 않았으나 그보다 더한 사치를 일삼는 비오첼라가였다.그러니 굴러들어온 황금 덩어리를 기꺼이 맞이하는 비오첼라 백작과 달리 레오는 의심이 많았다.

    ‘수상한데, 어디를 어떻게 밟아봐도 꼬리가 잡히지 않는단 말이지.’

    저가 그토록 공을 들이던 영애들의 뒤를 봐준 것이 그 계집이었다.

    백작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전부터 따로 조사해 왔으나 나오는 것은 죄다 제 아비가 말한 그대로였다.

    ‘미인을 밝혀서 돈을 빌려준다고……?’

    처음 정보상에 의뢰해 그 답을 받았을 때는 어느 늙은 영감인가 싶었는데, 젊디젊은 계집이란다.

    “진짜 뭘까.”

    한쪽 입꼬리를 올린 레오가 검지로 소파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옆에 자리한 하인에게 손짓을 한다.

    “가서 판델 남작 데려와.”

    잠시 후 도박장 한구석에 앉아 벌벌 떨고 있던 판델 남작의 초점 잃은 눈이 저를 찾아온 하인을 향했다.

    “따라오시죠.”

    하인의 무감한 눈이 그를 내려다봤다.

    귀족에게 취할 태도는 아니었으나 그를 판별할 한 줌의 이성조차 남지 않은 남작은 비척대며 그를 따라 걸었다.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도달한 문 뒤엔 그를 이 절망에 처박은 존재들이 있다.

    “왔는가.”

    비오첼라 백작이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그를 반겼다.마치 저를 이 구렁텅이에서 구해줄 구세주라도 만난 듯 남작의 눈에 희망이 들어찬다.

    제가 걸어 들어가는 그 길이 저를 더 진창으로 모는 줄도 모르는 아둔한 자.마음이 앞서 몸이 기울은 채로 백작의 앞에 당도한 남작이 돌연 무릎을 꿇는다.

    “백작님.

    조, 조금만 자금을 빌려주시면!”

    횡설수설 말을 잇는 그를 보던 비오첼라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자네.

    그간 빌려간 돈은 다 어쩌고 이러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달싹이던 남작의 얼굴이 이내 푸르죽죽해진다.대체 어쩌다 일이 이리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남들 다 한다는 유흥으로 도박에 손을 좀 댔을 뿐인데 순식간에 가세가 기울었다.비오첼라에 담보를 주고 돈을 빌리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곧 갚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빚은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만 했고, 때마침 어느 상단에서 조건 없이 돈을 빌려준다길래 한걸음에 달려가 봤다.소문대로 그들은 제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커다란 돈을 선뜻 내어줬다.그땐 그 돈이 마치 제 돈인 것만 같았다.

    “제, 제가 지금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모, 목숨이.”

    상단주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 상단은 제게 그 큰돈을 빌려줄 때만 해도 신과 다름없었다.물론 그들은 정말 신과 같았으나 그가 기대한 신은 아니었다.

    따로 조건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저들이 원할 때 언제든 그의 목숨까지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

    ‘이대로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목까지 공포가 차오른 남작은 어느새 백작의 다리를 붙들고 수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리됐을꼬.”

    짐짓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 백작이 심드렁히 앉아 있는 제 아들과 눈을 맞춘다.

    “그러게 말입니다, 남작.”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작에게 다가갔다.

    그가 멈춰 서자 남작의 위로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간신히 고개를 든 남작의 얼룩진 눈과 레오의 첨예한 눈이 마주했다.몸을 숙인 레오가 남작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돈은 필요한 만큼 빌려 드리지요.”

    ‘사, 살았다!’

    남작의 얼굴에 놀라움과 환희가 차오르던 그 순간.

    “대신, 전에 약속하신 남작 영애.

    저희가 받아가겠습니다.”

    이어진 레오의 말에 남작의 눈에 빛이 꺼졌다.

    “그, 그건.”

    “왜요? 어려우시겠습니까? 그럼 저희도 별다른 도리가 없군요.”

    미련 없이 일어선 레오의 내리깐 시선이 남작을 난도질했다.제게는 아직 남은 것이 많았다.

    이대로 다 같이 죽느니 딸아이의 희생으로 나머지 가족이라도 살아남는 게 맞는 거 아닐까.

    “…따, 딸아이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냉정하던 레오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자리했다.

    봄볕처럼 따스한 목소리로 그가 남작을 꾀기 시작한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남작의 딸이 워낙 미모가 출중한지라 그를 어여삐 여겨줄 이가 있거든.”

    ‘그래, 미모가 그리 훌륭하니 분명 대접을 받을 것이야.

    어차피 가문이 한미해 잘해봐야 작위가 높은 자의 첩이나 늙은 귀족 따위에게 갈 처지지.’

    스스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합리화를 하던 남작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남작.”

    고개 숙인 남작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린 레오가 손을 털며 소파로 향했다.

    “그것참.

    자네, 운이 좋구만.

    그 큰돈을 이리 내어줄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아.”

    비오첼라 백작이 술잔을 들며 만족스레 말을 거들었다.남작이 주저앉아 있는 바닥에 둥근 점들이 번져간다.

    초라한 등 위로 비오첼라의 탐욕이 넘실댔다.

    ‘드디어 손에 넣었군.

    참 오래 걸렸단 말이지.’

    제게 크나큰 부를 가져다줄 금발의 여인을 손아귀에 쥔 레오의 입매가 끝을 모르고 위로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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