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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36화 (36/109)
  • 36화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온 얼굴로 바람을 마주하게 된다.

    봄밤의 바람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아 좋았다.

    “…기분 좋아.”

    고개를 살짝 젖히자 바로 그의 가슴에 닿았다.

    어쩐지 조금 몽롱해지는 시야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떠본다.대공이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왜 그래?”

    속삭이는 목소리가 한없이 달았다.

    괜히 마음이 간지러워지는 그런 목소리.배시시 웃어 보이자 투명하게 빛나던 푸른 눈이 동그랗게 확장된다.

    손을 그의 눈가에 살짝 대보고 턱선을 따라 쓸었다.

    “우리 어디 가?”

    대공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꿈틀꿈틀.’

    집중해서 손가락으로 그 눈썹을 콕, 찍었다.

    그러자 움직임이 멈춘다.

    그래, 눈썹이 자꾸 그러면 못써.

    “…비비안?”

    “왜 불러?”

    어쩐지 몸에 힘이 풀려 꼿꼿이 세우고 있던 몸을 뒤로 기댔다.

    ‘원래 승마할 때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누우면 안 되는데! 여기 너무 편하다.”

    안락한 품에 머리를 문대자 위에서 앓는 소리가 난다.

    “어디 아파?”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던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안 아프다니 다행이네.

    “아, 속 안 좋아.”

    “…많이?”

    말의 뜀박질에 맞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고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대공이 차가운 손으로 내 이마를 덮은 채 제 품으로 밀었다.

    “조금만 참아.”

    그 차가움이 좋아 두 손으로 그의 손 위를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손이 있으면 조금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비안, 괜찮아?”

    대공의 커다란 손이 치워진 곳에 달이 내려앉은 호수가 반짝였다.어느새 말에서 내린 그가 두 손을 내게 뻗는다.

    “이리 와.”

    두 팔을 뻗자 나를 받아든 그가 그대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대공의 목을 껴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호수.”

    어깨에 닿은 그의 얼굴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웃음소리와 함께.

    “호수로 데려가라, 이거지?”

    힘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나를 고쳐 안은 그가 성큼성큼 이동했다.

    대공에게 안긴 채 바라본 풍경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고요한 밤하늘이 다였는데 생전 처음 보는 듯 낯설었다.

    “내려줄게.”

    내 발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손을 거두지 않은 그가 조심스레 나를 놔준다.

    ‘속도 답답하고 더워.’

    “뭐 하고 싶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뒤로하고 호수로 향했다.

    어느새 구두에서 내려와 살짝 발만 담갔을 뿐인데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시원하다, 시원해!’

    더 들어가고자 드레스를 말아 올렸다.

    종아리에서 물이 찰랑이자 드레스 자락도 조금씩 젖어든다.

    “그만.”

    “어?”

    언제 따라 들어온 건지 대공이 내 허리를 붙들었다.

    그대로 내 몸을 들어 올린 채 호수 밖으로 나온 그가 드레스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감기 걸려.”

    그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원래 그의 색이 보고 싶어졌다.

    ‘이거 말고.’

    푸른색 가발을 쑥 벗겨내자 그 안에 숨어 있던 검은 머리가 차르르 흘러내렸다.

    “이게 예쁘지!”

    “…하.”

    헛웃음을 내뱉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이마, 눈동자, 코 그리고 입술.

    ‘이마.

    나도 해야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대공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텁―물기 젖은 드레스가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정적이 흐른다.이마는 딱딱했다.입술을 떼자 숨 쉬는 대공이 아닌 웬 조각상 하나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자색 눈에 물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갸웃대고 있는 비비안이 보인다.

    지금 제 이마에 닿은 말캉한 게 저 입술이 맞나.

    ‘…왜?’

    여전히 젖은 채 물을 뚝뚝 흘리는 드레스를 보자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였다.촤락―최대한 물기를 짜내며 디에고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민했다.

    ‘정신 차려, 디에고 브라이트.’

    비비안의 시녀가 귀띔한 것이 생각났다.

    - 세 시간 안에 끝내셔야 해요.

    그 이후부터는 음, 예.그게 이 의미였나? 비오첼라에서 보낸 시간이 거의 두 시간 반 남짓이었으니.말을 탄 이후부터 조금씩 이상해지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이만 돌아가자.”

    이제 비비안이 더 무엇을 할지, 불안한 마음이 든 디에고가 반 사정하는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를 빤히 보던 비비안이 별안간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뒤로 밀었다.그 미약한 힘에 미간을 찌푸린 디에고가 그녀의 뜻대로 밀려나 두 손을 뒤로 짚었다.

    그러자 그의 두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은 비비안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다음에는 안 물어본다고 했으면서.”

    “…뭐?”

    “다음이 언제야?”

    입술을 삐죽이던 비비안이 손가락으로 디에고의 입술을 꾹꾹, 눌렀다.그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세차게 흔들린다.

    그 모습을 여유롭게 마주하던 비비안이 달빛이 부서지듯 환하게 웃었다.푸른 바탕에 찍힌 분홍 점이 전보다 훨씬 기꺼워 더 다가가는 비비안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디에고였다.

    “난 안 물어볼 거야!”

    작게 소리친 비비안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깐.”

    디에고의 다급한 말은 끝맺지 못한 채 비비안에게 삼켜졌다.

    이윽고 흔들리던 푸른 점은 그대로 눈꺼풀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한참 입술만 맞대고 있던 비비안이 멀어질 기미를 보이자 디에고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안는다.

    다른 한 손은 비비안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디에고가 고개를 비틀었다.놀란 나머지 살짝 벌어진 비비안의 입속으로 봄바람이 들어섰다.디에고의 셔츠를 쥔 비비안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제야 아쉬운 듯 진득하게 입술이 떨어진다.

    그러나 둘 사이의 틈은 여전했다.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다 눈만 들어 비비안을 찾는 디에고.그 찰나의 시간이 영원으로 다가오던 디에고가 다시 눈을 감으며 입술을 내렸다.촉―짧게 입을 맞춘 그가 비비안과 이마를 맞댔다.

    “…비비안.”

    참아내고 감춰본다고 했으나 제가 낸 목소리에 지독한 욕망이 묻어나자 디에고가 다시 눈을 감았다.

    ‘정신을 못 차리겠군.’

    이를 악물며 더 뻗어 나가려는 자신을 다스리고자 노력했으나 치솟는 열망에 얼굴이 일그러진다.맑기만 하던 푸른 눈이 흥분으로 탁해진 채 비비안을 바라봤다.취기가 돌아서일까.

    아님 저와 같은 욕심이 그녀에게도 있어 저리되었을까.비비안의 눈 또한 열기와 물기가 가득했다.

    “…디에고.”

    얼핏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도로 감은 눈에 힘을 준 그가 손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

    이름으로 불리는 게 이런 거였나.손을 내린 디에고가 비비안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읏.”

    바짝 긴장한 건지 숨 쉬는 법을 잊은 듯한 그녀 덕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입술을 댄 채 디에고가 다시 한번 제 이름을 불러주기를 재촉했다.

    “더 해봐.”

    고개를 든 디에고가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별거 없는 행동에도 비비안의 귀가 움찔하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응? 어서.”

    잠시 머뭇대던 비비안이 앙증맞게 눈을 깜빡이더니 디에고의 얼굴을 작은 두 손으로 감쌌다.부드럽지 않은 손길이었다.

    점점 더 오르는 술기운이 비비안의 이성은 뺏어가고 평소 있는지도 몰랐던 거친 야성만을 부추겼다.

    “…네가 좋아, 디에고.”

    그녀가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투를 구사하며 해맑게 웃었다.그대로 돌진한 비비안이 입술을 목표로 한 듯싶었으나 디에고의 턱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악!”

    벌겋게 변한 그의 턱보다 제 입술의 아픔이 먼저였던 비비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한껏 당황한 디에고가 비비안의 얼굴을 들어 입술을 살폈다.

    “괜찮아? 아파?”

    눈물 한 방울을 매단 채 제 손에 턱을 맡기고 있는 비비안.다급하게 비비안을 살피던 디에고의 손길이 느려지며 부어오른 붉은 입술을 매만진다.

    “…찢어지지는 않았네.

    다행이다.”

    뭐가 서러운지 눈을 깜빡이자 톡톡,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야해라.’

    나른하게 웃은 디에고의 입술이 눈가에 내려앉자 비비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디에고……?”

    붉게 물든 비비안이 내뱉는 다디단 속삭임, 그를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어진 디에고가 끝내 그녀의 입술을 다시금 머금었다.비비안의 숨이 벅차질 때쯤 떨어진 그가 두 팔 안에 그녀를 가둔 채 웃는다.

    “미안.

    내가 지금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두 손으로 비비안의 얼굴을 감싼 디에고의 얼굴이 한없이 따스했다.

    한참 구석구석 눈으로 훑던 그가 분홍빛이 도는 코끝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이러고 다 기억 안 난다고 하는 거 아니지?”

    가느스름한 눈으로 비비안의 입술을 한 번 훔쳐본 그가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졸린가 보다, 이제.”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비비안을 그대로 안아 든 그가 휴식을 취하던 말에게 향했다.조심스럽게 먼저 말 위에 앉힌 그녀의 몸이 허물어지기 전 그가 재빠르게 말에 올라탔다.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비비안을 품에 단단히 가둔 디에고가 서늘한 눈으로 한곳을 응시한다.

    “따라오지 말라 눈짓을 준 것 같은데.”

    허공을 향해 말을 흘린 그에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제 말에도 응하지 않는,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이는 황태자의 사람이었다.

    언제나 칼같이 정확한 거리를 둔 채 비비안의 뒤를 지키는 자.그 세월이 길다 들었다.

    저 정도 무예를 지닌 기사가 한낱 영애의 뒤만을 10년가량 쫓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명예롭게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그 일을.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그 고독하고 씁쓸한 명을 진심으로 받들게끔 황태자가 내비친 것이 무엇일까.

    “…그대의 주인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제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 디에고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저는 이제야 그녀를 만났는데.

    제가 없는, 아니 제가 몰랐던 과거의 비비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상상도 하기 싫군.’

    짐작해 보는 것만으로 끓어오르는 제 감정에 크게 숨을 내쉰 디에고가 정확히 사내를 향해 눈을 빛냈다.

    “그대의 일이 끝나는 머지않을 그날,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하도록 하지.”

    그가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줘 나아갔다.

    비비안이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이제야 마음이 급해진 디에고가 서둘러 윈데이너가로 향했다.저가 저지른 만행을 꿈에도 모른 채 옅은 미소를 머금은 비비안, 행복한 꿈을 꾸는 듯 입을 오물거리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과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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