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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35화 (35/109)
  • 35화

    *지난 비오첼라 도박장 방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인데, 죄인을 심문하는 이 분위기 뭘까.윈데이너 저택 응접실, 내 구역인데 마치 눈앞에 쇠창살이 드리워 저들과 나 사이를 갈라놓은 듯하다.

    물론 갇힌 역할은 나.나 상단주 역할 너무 잘했는데, 그저 끝에 좀 몸이 안 좋았다고 이렇게까지 면박을 주다니.대공과 스텔라가 주거니 받거니 날 향한 잔소리를 이어갔다.

    “또 비틀거리면 두 번은 없어.”

    “예.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제 끝났니, 잔소리?’

    소파에 앉은 나와 달리 두 사람은 내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나를 기죽인다.

    같이 서도 내가 지들을 올려다봐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내 위로 둘의 그림자가 덮쳐져 한껏 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대공과 스텔라를 바라봤다.

    ‘너희, 순한 얼굴도 아닌데 그렇게 인상까지 쓰면! 내가, 응?’

    “걱정 마세요.

    그리고 오늘은 준비한 게 있어서.”

    마리에게 눈짓하자 덤덤하고 경건한 표정으로 그녀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왔다.쾅―

    “…이게 뭐지?”

    보면 모르나.

    상자 가득 반짝이는 영롱한 병들을 좀 보소.

    “술이요.”

    대공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 눈썹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옆에 선 스텔라의 눈동자가 공허하다.

    “술 들어가면 좀 더 쉽게 입을 놀리지 않을까요?”

    그랬다.

    지금 말만 소소하다 하는데 비오첼라에게 간 선물 목록이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한껏 고조된 그가 때마침 벨리타를 초대한 참이다.나는 이제 오늘 그만 결판을 내고 싶다, 이거야.

    “영애도 같이 마시겠단 말씀이신가요.”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나를 채근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이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건 나도 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야겠죠?”

    “…….”

    대체 뭘 믿고 그리 태평하냐는 뜻을 눈으로 전하는 스텔라를 보다 재빨리 말을 이었다.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술을 조금 잘 마신답니다.”

    이제 거의 체념한 듯 대공이 한 손으로 이마와 눈가를 가린 채 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홱 고개를 돌려 마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했다.

    “송구하오나 아가씨가 술을 좀 하십니다.”

    담백하게 한 문장을 내뱉고 도로 남 일 보듯 선 마리가 새침했다.

    “봤죠? 그러니 술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나도 의외기는 한데, 내가 술을 좀 잘 마신다.

    취하지를 않는다! 취하지를!

    “자자, 걱정 말고 출발합시다! 저 한 번만 믿어보셔요.”

    나는 무슨 물건 파는 사람처럼 한껏 그들을 부추기며 응접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둘 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할 말이 많아 보였으니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터는 게 상책이다.

    “각하, 보고만 계실 겁니까.”

    “말린다고 말려지겠나.

    여차하면 그냥 엎고 나오지.”

    음산하게 읊조리는 대공을 보자 등골이 서늘했으나 그럴 일 없다.

    ‘나 잘 마셔, 술.’

    오늘도 얼굴의 반을 가리고 가발을 쓴 채로 마차에 올라탔다.

    내 뒤로 마차에 올라타려는 대공에게 마리가 무언가 속삭이는 모습을 본 것 같은데.

    “마리가 뭐라고 하던가요?”

    내 질문에 그가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옅게 고개를 젓는다.

    불신이 가득했다.

    “…비비, 술은 마셔본 거 맞아?”

    ‘해도 해도 너무한다.’

    “제가 아까부터 말씀드린 건 어찌하시고 그걸 물으시나요.”

    이를 악물고 웃으며 물었으나 대공의 눈동자에 박힌 불신은 당최 지워지지를 않는다.됐다, 됐어.

    내가 이해하마! 몸이 이리 허술한데 술이 가당키나 한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

    “직접 보시죠.”

    곁눈으로 그를 흘긴 나는 이내 마차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 풍경보다 유리에 비친 대공의 얼굴이 더 재밌는 것은 비밀이다.

    “유리 말고 직접 보면 되잖아.”

    ‘…비밀, 비밀…….’

    “제가 생각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네요.”

    창에 머리를 기댄 그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진다.

    대공이 내게 내민 손이 유혹적으로 흔들렸다.

    “자, 어서 잡아.

    비비, 자유를 되찾아야지.”

    “…….”

    얄밉다.

    나는 손을 말아 쥐고 검지 끝만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이게 뭐지?”

    “이걸로 충분하니까요.”

    눈을 깜빡이며 손바닥을 한참 바라보던 대공이 이내 제 손으로 내 검지를 감싸 쥐었다.그대로 몸을 일으켜 내 옆에 앉은 그가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젖혔다.

    “팔 아플 것 같아서.”

    그의 어깨와 다리가 간헐적으로 부딪힐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맞닿을 때마다 떨리는 가슴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이, 마차가 비오첼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또 다 무언가!”

    오늘은 두 상자나 들고 왔다, 이놈아! 여전히 얼굴에 욕심이 그득한 백작을 보자 절로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왕국에서도 궁에서만 취급한다는 최고급 술, 백작님께 걸맞지 않나 싶어서 들고 와봤답니다.”

    말도 다디달고, 반짝이는 병들도 눈에 차는지 한껏 풀어진 백작의 얼굴이 참 역겹다.

    ‘어휴, 빨리 마시고 보내버리자.’

    “그대, 술 마실 줄 아는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나를 훑는 백작의 오만한 표정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요.”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

    허허실실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백작의 입이 점차 가벼워졌다.탁―내가 호쾌하게 잔을 들이켤 때마다 뒤편에서 대공의 기운이 사나워지는 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그나저나, 저번에 약조하신 상단은 어찌 되셨을까요?”

    “아! 그, 더 뜨겁게 뭘 할 수 있다 하였더라.”

    ‘입만 가벼워지랬지.

    누가 정신까지 다 놓으라 했냐.’

    백작이 생각보다 술을 못해도 너무 못했다.

    적당히 먹이고 빨리 캐내야지.

    “뜨겁게 사랑이요, 백작님.”

    “하하! 그래, 그리 말했지! 내 벨리타를 위해 다 알아뒀지 뭔가!”

    벨리타? 어디서 친한 척이야.

    안 그래도 지금 뒤에서 살기 내뿜는 대공 때문에 초조해 죽겠는데.

    “어쩜!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언제쯤 거래가 가능할까요?”

    손뼉을 치며 기뻐하자 백작의 입꼬리가 들썩거린다.

    의문이긴 하다.

    저리 아둔한 자가 어찌 여태 들키지 않고 일을 치를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믿는 자하고만 거래를 한다 하니, 쉽지는 않을걸세.”

    심드렁하니 말을 내뱉고는 술잔을 빙글 돌리는 의도가 너무 뻔했다.

    “그럼 백작님께서 저 대신 거래를 진행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잔뜩 시무룩한 표정을 걸친 채 두 손을 꼭 모으고 말하자 백작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쯧, 그대가 그리 부탁을 한다면야.

    번잡하나 별수 있나.

    이것도 다 인연이니.”

    ‘말이 많다.’

    “정말 감사해요.

    그럼 이참에 백작님 상단이 왕국으로 거래하러 가실 때 저희도 함께할 수 있을까요?”

    “뭐?”

    “이것저것 배워도 보고 싶고.

    아무래도 저는 이런 일은 잘 모르니 백작님께서 이끌어 주시면 좋겠다 싶어서요.”

    탐탁지 않아 하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백작이 뭐라 더 입을 떼기 전에 난 더 빨리 말을 내뱉었다.

    “물론 염치가 없지는 않으니, 백작님 상단의 이동 비용까지 저희가 부담하도록 할게요.

    게다가 저는 그 약물을 어찌 왕국까지 가져갈 수 있을지 도통 모르겠어서…….”

    너는 어떻게 몰래 왕국까지 운반 가능했던 건지 이제 말해봐.상단의 이동 비용도 만만치 않고, 내가 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약물 판매도 불가능하니 이래저래 돈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선했다.

    “…그도 그렇겠군.”

    후…….

    내가 저치 때문에 광산 하나를 털었다.

    한 손을 들어 신호를 주자 여태 뒤를 지키고 서 있던 대공이 품에서 자루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뒀다.느리게 제자리를 찾아가면서도 나와 끈질기게 눈을 맞추려 드는 것이 그다웠다.산뜻하게 자루의 입구를 개봉하자 색색의 보석이 쏟아진다.

    휘둥그레 떠진 눈의 백작이 보석에 손을 뻗었다.

    “부탁드려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인 백작이 입을 달싹였다.

    “…마차, 우리가 제작하는 마차가 필요하네.”

    “마차요?”

    최면에 걸린 거 아닌가 싶게 정신없어 보이는 그가 손 안에서 보석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하는 데 돈이 좀 들지만 그대가 이리 진심이니 내 준비해 보도록 하지.”

    양심도 없지.

    금으로 마차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여태껏 받아먹은 것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떤 마차이길래.

    그리 특별한가요?”

    “아, 뭐.

    그런 게 있네.

    그게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이 국경을 넘어갈 수 있지.”

    “멋져라.

    그럼 언제쯤 저희가 함께할 수 있을까요?”

    마차에 비밀이 있는 듯한데.

    더는 그에 대해 말해주지 않을 것 같으니 이 지루한 술자리를 이만 끝내야겠다.

    “준비가 되면 내 다시 그대를 부르지.”

    보석이 퍽 마음에 드는지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백작이 술을 들이켰다.

    “하루빨리 그날이 오면 좋겠어요.

    벌써 설레네요!”

    진심이었다.

    저자가 하루빨리 지옥에 떨어지기를.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잔 안에 호박색 술이 찰랑인다.

    그 표면에 비친 내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벌써 몇 잔째인지 모를 술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앞을 바라보았다.술과 보석에 취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환몽을 꾸는 듯한 백작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지.”

    내 명에 대공이 비오첼라가의 문을 열었다.나는 화려하게 치장된 저택을 빠져나오며 그의 몰락을 그렸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고통도 커지는 법이니, 그들이 더 탐욕스럽게 굴기를 바랐다.

    “괜찮으십니까.”

    아직도 저 말투를 고집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도 사람이 붙었나 보다.

    “응, 괜찮아.”

    이때 아니면 언제 대공에게 하대해 보겠나.

    “바람을 좀 쐬고 싶구나.”

    턱을 치켜들고 푸른 머리의 대공을 응시하자 일말의 당혹감도 보이지 않는 그가 웃는다.

    ‘어째서 매번 저렇게 여유로울까, 쟤는.

    얄밉게.’

    “모시겠습니다.”

    그가 주변을 눈으로 살피더니 어느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잠시만 여기 계십시오.”

    “응?”

    안심하라는 듯 내 손등을 스치듯 잡았다 놓은 그가 뛰기 시작했다.

    ‘너 어디 가니? 와, 수하 맞아?’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황당함에 헛숨을 터뜨렸다.

    이게 뭐지, 지금?멍하니 땅바닥을 발로 툭툭, 차고 있자니 저 멀리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말?’

    흑마 한 마리가 순식간에 시야를 점령했다.

    말 위,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달빛을 머금은 채 나를 내려다본다.

    “…안 내리니?”

    수하가 지금 주인 버려두고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와? 그러더니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어?!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말에서 내린 그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웃었다.

    “가실까요, 주인님?”

    난 어디서 용기가 샘솟았는지 대공을 위아래를 훑은 후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을 참기가 힘든지 잠시 고개를 숙였던 그가 이내 바짝 다가온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손쉽게 양손으로 내 허리를 붙든 그가 단숨에 말 위에 나를 안착시켰다.

    ‘…이게 이렇게 쉽게 되는 거야?’

    뒤이어 뛰어오른 대공이 나를 감싸 안은 형태로 말에 올라탔다.

    “그럼 이제 다 따돌리고 단둘이 되어볼까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리는 바람에 몸이 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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