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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34화 (34/109)

34화

【 첫 키스 】

매번 이런저런 핑계로 날 입궁하게 만드는 사람은 황제였다.

아주 가끔은 황후가 그 몫을 했지만, 여하튼 황태자만은 그간 한 번도 내게 입궁을 청하지 않았었는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지?’

안 그러던 사람이 보자고 하니까 괜히 긴장되는구나.

이런 나와 달리 옆에서 걷는 리안의 표정은 한없이 평화롭다.

“전하, 어디 가시는 거예요?”

내 걸음에 맞춰 느긋하게 걷던 리안이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상체를 기울였다.

“봄이 오면 같이 산책을 가자 하였지.”

- 아니야.

그냥 봄이 오면 같이 산책이나 하면 어떨까 하고.유독 지친 목소리로 말하던 그가 떠오른다.

그게 연말쯤이었던가? 그걸 여태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 이 사람.

“설마 그때 이후로 산책 한 번 안 나오신 건 아니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황태자가 소리 내 웃었다.

‘이거 웃을 일 아니야.’

무슨 햇볕 한 번을 안 받은 사람처럼 허연 그의 얼굴이 신경 쓰인다.

“그럴 리가.

그런데 이렇게 궁 밖으로 산책을 가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일지도.”

불쌍하기도 하지.

대체 얼마나 사람이 바쁘면 잠시 야외로 산책 갈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 걸까.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인 그가 그대로 하늘을 바라봤다.

리안의 머리칼과 닿은 햇살이 자잘하게 부서진 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스러울 지경이네.’

아련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이 처연하기 그지없다.

“…전하, 좀 야위신 것 같아요.”

‘얘, 이대로 괜찮은 거 맞나?’

황제 영감탱아! 얘 잠은 재우면서 일 시키는 거 맞냐! 이러다 황제 자리 앉아도 못 보고 드러눕는 거 아닌가 싶다.제 턱을 한 번 쓴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그래도 오늘은 뭔가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한참 떨어진 뒤편에서 커다란 바구니를 양손 무겁게 든 채 따라오는 시종이 보였다.

뭘, 얼마나 챙긴 거지? 저거 둘이 다 먹을 수 있는 건가?그래, 오늘은 내가 아픈 척 안 하고 양껏 먹어줘야겠다.

옆 사람이 맛있게 많이 먹어야 같이 먹는 사람도 흥이 나겠지!그런 결심을 하며 걷자 황태자의 걸음이 느려졌다.

“숲이 크지는 않은데, 초록이 무성해서 비비안이 좋아할 것 같았어.”

이내 멈춰 선 황태자에게서 눈을 돌려 앞을 바라보자 숲의 입구가 보였다.

“와.”

이제 막 잎이 나기 시작해 연둣빛 가득한 나무들이 양옆으로 이어져 마치 동굴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자, 갈까?”

리안이 내민 손에 살포시 내 손을 얹고 발을 내디뎠다.

봄비가 내렸던 흔적이 여기저기 가득하다.

흙 내음과 풀 내음이 한데 섞여 숨을 쉬는 것이 기꺼웠다.

“전하! 여기 정말 아름답네요.”

어느새 흥분한 내가 콧김을 내뿜으며 동조를 구하자 리안이 온 얼굴을 밝히며 큰 소리로 웃는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숲의 요정인가.’

지금 막 숲에 내려앉은 듯 청량한 황태자에게서 신비감마저 느껴졌다.그러나 눈앞의 엄청난 그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좀 불편했다.

구두를 신은 채 물기 머금은 흙 위를 걷는 게, 이 완벽한 휴식과 자유를 방해하는 것 같다.

‘벗자.’

결심한 나는 리안이 붙잡은 손에 체중을 맡기고 구두를 벗기 시작했다.

“비비안?”

“전하, 제가 맨발로 걸어도 실례는 아니죠?”

손에 걸린 구두를 흔들며 장난스레 묻자 이내 그의 눈이 곱게 휘었다.

“곁에서 함께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그렇게 도란도란 리안과 대화하며 도착한 곳에 어느새 준비한 건지 넓은 천이 깔려 있다.

“…허!”

시종들이 잽싸게 차려 놓은 곳은 어마어마했다.

천을 대체 몇 겹을 겹쳐 깐 건지.

도톰한 이불이 펼쳐져 있는 줄 알았다.

사람 다섯이 누워도 남을 것 같은 크기다.

“낮잠 자기 좋아 보이네.”

여상히 말한 황태자가 바구니에서 천을 꺼내 들었다.

“비비안, 여기 앉아봐.”

그가 이끄는 대로 앉자 그 앞에 황태자가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뻗은 리안이 내 한쪽 발을 제 무릎에 얹었다.

“전하?!”

‘이게 무슨 일이야?! 뭐야?!’

나는 발을 내리고자 꼼지락댔으나 그대로 발을 천에 감싼 리안이 미소 짓는다.

“괜찮아.

잠시만 얌전히 있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무 창피한데! 당황스럽고! 황태자가 이래도 되는 거야? 아니잖아!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으나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기는 했다.

‘누구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기는 한데…….’

다른 쪽 발이라도 사수하고자 바짝 힘을 줬으나 깨끗이 닦인 발을 천 위에 내려놓은 그는 거침없이 다른 쪽도 채갔다.

‘간지럽고 창피하고 아주 미치겠네, 진짜!’

차라리 빨리 끝나기를, 눈을 질끈 감고 있자 그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발을 닦아내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아, 구두 왜 벗어 가지고!’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눈을 감고 있는 비비안의 얼굴이 붉었다.제 두 손 안에 잡힌 하얀 발을 보며 리안은 생각했다.

올해 들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일부러 천천히 마무리한 그가 아쉬운 듯 발을 내려주었다.

“배고프지?”

슬쩍 눈을 뜬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 분위기가 어색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움직임조차 사랑스러워 자꾸만 웃음 짓게 된다.

“…전하는 권위 의식이 너무 없으신 것 같아요.”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던 비비안이 작은 샌드위치 하나를 집었다.

사과가 든 그 샌드위치는 어느 날의 티타임엔가 다과로 나왔었는데 차마 먹지는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던 그것이었다.

‘여기 있는 게 전부 네 눈길을 받은 음식들이긴 하지만.’

황태자는 자신은 먹는 둥 마는 둥 온통 비비안이 입에 넣는 음식들만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 위엄이 없나, 내가.”

고운 미간을 찌푸린 비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음.”

“아니라?”

“너무 너그러우세요.

아, 아까도.

그런 건 절대 하시면 안 된다고요.”

손에 든 샌드위치를 입에 물며 고개를 푹 숙인 비비안의 정수리를 바라보는 리안의 눈이 한없이 따스하다.

‘사실 애초에 난 한 번도 비비안 네 위에 서본 적이 없어.’

“네게만 너그러울 수도 있지.”

그 말에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비비안이 이내 활짝 웃는다.

“그러고 보면 저도 전하 앞에서 좀 더 솔직해지니까.

남매 같은 거죠!”

‘남매라.

네가 내 여동생이었다면 큰일이었을 텐데.’

대답 없이 그저 부드러이 입매를 올린 그가 비비안에게 음료와 음식을 살뜰히 챙겨주었다.

“전하도 드세요!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아요.”

걱정스레 바라보며 제 앞에 들이밀어진 음식을 도로 황태자에게 밀어 넣은 그녀가 잔소리를 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배불리 먹은 비비안의 눈 깜빡임이 현저히 느려졌을 때, 리안이 천 위로 누웠다.

“비비안, 우리 이제 낮잠 자자.”

“네?”

“너도 어서 누워.”

눈을 감았다.

제가 먼저 잠이 드는 것을 본 후에야 비비안이 편히 잘 수 있겠지.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꾸벅꾸벅 졸던 비비안이 참지 못하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최근 비비안이 하는 일이 많다 들었다.

저는 그녀의 손과 발을 묶을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나마 쉼을 주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자 감겼던 리안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몸을 옆으로 돌리자 웅크린 채 곤히 자고 있는 비비안이 보인다.한차례 나뭇잎에 걸러진 빛이 부드러이 비비안의 얼굴에 내렸다.

눈부시지 않게, 아주 옅은 따스함만 남은 채로.바람 한 줄기가 살랑이며 비비안의 머리칼을 넘기자, 리안의 손이 그녀의 얼굴 근처까지 가서 망설인다.주춤대던 손가락이 섬세하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좋아해, 비비안.”

애달픈 목소리가 처음으로 상대를 찾아갔다.

항상 혼자 외치던 그 말을 그녀 앞에서 소리 내 말해본 리안이 요동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눈을 감았다.꽤 오랜 시간 제 마음을 추스르던 리안의 입이 열렸다.

“나와.”

그 작은 속삭임에 나무 위에서 복면의 사내가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몸을 일으킨 리안이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내를 바라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비비안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사내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힐긋 잠든 비비안을 확인한 사내가 눈을 내리깔았다.그는 원래 황태자, 리안 로렌스의 호위를 맡았으나 10년 전부터 비비안 윈데이너의 그림자가 되어 살고 있었다.처음 그 명을 받았을 때의 그는 솔직히 이해도 가지 않고 불만이 많아 소홀했었다.그러나 비비안의 마차 사고 이후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은 채 시들어가던 황태자가 어느 날 그를 방으로 불렀을 때.

- …비비안 윈데이너, 지켜.무릎을 꿇고 올려다본 작디작은 소년은 반쯤 망가진 듯 허물어져 있었지만, 여태 봐왔던 그 어떤 때보다 커다랬다.태생이 황가라는, 황제의 그릇이란 이런 것인지 그 어린 나이에도 명을 내리는 데 힘이 깃들었다.

- 네 소명이 나를 지키는 것이지.눈을 맞춘 소년은 또렷한 빛을 내며 말을 이었다.

- 그러니까.

내 목숨, 잘 지키라고.

“…기억해.

애초에 황태자비를 지키라는 명이 아니었어.

비비안을 지키라 했지.”

“예, 명 받들겠습니다.”

황태자는 비비안을 지키되 그녀가 하는 모든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었다.

위험인자가 아니면 제게 보고조차 하지 말라던 그의 진정한 주인.근래 영애가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 그는 보고한 적이 없지만, 황태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제가 황태자비에서 멀어지려는 영애를, 더는 진심으로 지키지 않을까 봐 굳이 말을 덧붙이는 황태자를 보며 사내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어찌…….

저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전하,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평소에 대답하는 것이 다인 사내가 말을 올리자 리안이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 말하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이는 황태자를 확인한 사내가 입을 달싹인다.

“영애가, 다른 사람에게 가시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제가 말을 하면서도 목이 메어 침을 크게 삼킨 그의 말이 끝나자 정적이 이어졌다.사내가 숙인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이내 고개를 똑바로 한 리안이 제 옆의 비비안에게 시선을 두었다.한 번 잠이 들면 이리 소란해도 깨지 않는 아이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자 휘몰아치던 제 마음속이 잔잔히 가라앉는다.

“내게 오기를 내내 기다렸는데, 오지 않는다라.”

생각해 보았다.

네가 오지 않는 그날.그때가 온다면, 나는 너를 어찌 볼 수 있을까.

내가 너를 미워하게 될까.

혹은 너를 보는 것이 한없이 괴로워 평생 보지 않는 것을 택할까.

“아직은 모르겠는데.

가늠이 안 되는군.”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린 리안이 짙은 미소를 담아 읊조렸다.

“나는 아직 비비안이 내게 와줬으면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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