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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33화 (33/109)

33화

*

‘작은 마차가 따로 없었지.’

대공의 품은 안락했다.

온몸에 힘을 빼고 온전히 기대도 아무 타격이 없을 것 같은 게 안겨 있는 사람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아가씨, 몸은 좀 어떠세요?”

걱정스레 묻는 마리가 내 팔을 주물렀다.

“괜찮아.”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이게 벌써 두 번째예요.”

“그래도 이번에는 깨어 있었는데, 나.”

대공의 품에 안긴 채 윈데이너 저택으로 들어선 것이 두 번째이나 이번에는 정신이 있었던 터라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렇게 내려달라고 했건만!’

끝내 방까지 안고 들어선 그는 침대에 나를 눕혀 놓고 주변을 살폈다.

- …태피스트리 치웠나?그놈의 태피스트리.

차마 아까워 버리지는 못하고 곱게 접어 넣어두었다.

다시 만날 날, 있겠지.

“각하가 엄청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마리가 신기한 모습을 봤다는 듯 말을 흐렸다.

다시 지난밤을 되새기는 듯 멍해진 그녀를 보자 나 또한 대공을 떠올렸다.

‘확실히 불안해하기는 했던 것 같아.’

어젯밤, 대공은 마차에 올라탄 이후에도 나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꼭 껴안은 채 한참을 상체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내쉬던 그.

- 네가 아픈 게 싫어.애끓는 목소리로 칭얼대는 그의 등을 다독이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지.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니까! 이렇게 내 마음이 싱숭생숭한 거 아니냐고!’

기분이 묘했다.

내 작은 힘겨움에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는 일이란 가슴을 찡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두 분, 뭐 있죠?”

입꼬리를 말며 가느스름한 눈을 한 마리가 은근하게 물었다.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이불을 끌어 올렸다.

아무리 나라도 이건 좀 부끄러웠다.

“어머머!”

눈을 크게 뜬 마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마리한테 숨길 자신은 없는데.’

“비밀이야, 비밀.

알겠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마리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날렸다.

“축하해요! 아가씨!”

“헤헤.”

“어쩜!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셔요.

저는 진짜 어제 두 분이 같이 딱 시야에 잡히는데, 와.

와.

저희 태피스트리 미인들 다 합친 것보다 빛이 나더라니까요? 정말! 정원에 별들이 우수수 떨어진 줄 알았어요!!”

숨도 안 쉬고 쏟아내는 마리의 주접에도 마냥 내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보니 그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

“그래? 그렇게 잘 어울려?”

손뼉 치고 엄지 들고 어떻게 더 표현할지 몰라 답답해하는 마리의 모습을 보는 게 기뻤다.사랑이었다.*하필 이 허약한 몸이 그날의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에 허물어지는 바람에 난 상단주 역할을 잃을 뻔했다.소식을 전해 들은 스텔라가 차가운 눈을 들어 경고했기 때문이다.

-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 대체할 다른 인력이 있으니 그리 아세요.차갑기가 한겨울 같았다.

그러나 이후 몸에 좋다는 각종 약재와 이국의 과일들이 윈데이너 저택으로 한가득 들어왔다.스텔라 마이어 백작 영애의 이름으로.

‘하여간.

사람이 너무 좋다니까.’

흐뭇하게 웃은 나는 스텔라의 마음 씀씀이에 새삼 감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딸랑―

“오셨어요.”

“안녕, 세를린.”

반가움을 담아 미소 지은 부티크의 주인, 세를린이 3층으로 안내했다.

“잘 지냈어?”

“그럼요.

영애는, 잘 지내신 것 같네요.”

무얼 보고 그리 생각하는지 의문을 표하자 세를린이 짙게 웃는다.

“영애의 얼굴이 전과 다르게 생기가 돌아서요.”

‘그런가.’

손을 들어 볼을 꾹 눌러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내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한 이의 반짝이는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이야기 나누시지요.”

“응, 고마워.”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금발의 여인.

판델 남작 영애, 이 계획의 두 번째 필요 인물이 거기 있었다.

“안녕하세요, 영애.”

“아, 안녕하세요.”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는 그녀는 초조한지 손을 꼼지락대며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들었던 성향이랑 좀 다른 것 같은데?’

“제가 갑자기 뵙자고 해서 놀랐지요? 자, 앉아요.”

끝내 고개를 들지 않고 고개만 저은 그녀가 조심스레 소파에 안착했다.제 외모 하나 믿고 오만하고 당돌하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들었는데, 어딜 봐서? 정보가 잘못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영애, 거두절미하고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여기를 나가는 순간 다 잊으셔야 해요.”

“예?”

“그래 줄 수 있지요?”

안타깝지만 난 오늘 여기 제국의 실세, 윈데이너 후작가의 이름으로 온 것이었다.몰락 직전까지 내몰린 남작 영애에게 애초에 내 말을 거절할 힘은 없으니, 그녀에게 지금 이 말들이 얼마나 협박처럼 들릴까.평소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할 이야기만큼은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되었다.역시나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는 영애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고마워요, 영애.”

조금 풀어진 얼굴로 느슨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자 남작 영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확실히 황태자만큼은 아니지만, 밝은 금발과 금안이 황가를 떠올리기에 적합해 보이네.’

“가문에 곤란한 일이 있죠?”

“…아, 아―”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표정, 이리저리 방황하던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끝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쯤 본인도 돌아가는 상황을 얼추 알았겠지.’

근래 판델 남작에게 융통해 주던 돈을 끊었다.끈질기게 이 영애를 놓지 않던 비오첼라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분명 남작가에 어떠한 기별이 갔을 터.

“비오첼라가 뭔가 요구하던가요?”

퍼뜩 들어 올린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다.

“저, 저를.

백, 작의 첩으로 삼으시려는 것인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웠다.

‘과연.

여색을 밝혀 제가 취하려는 것처럼 포장해서 들이나 보군.’

“그렇게 하면 빚을 다 변제해 주겠다고 하던가요?”

이제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것에는 별다른 신경을 쓸 수 없는지 하염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영애, 정신 차리고 내 말 잘 들어요.”

나는 그녀가 힘주어 맞잡았음에도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 내 손을 얹었다.

“거긴 첩보다 더한 자리예요.

이대로라면 영애는 왕국에 노예로 팔려갈 겁니다.”

“네?”

황망히 떨리는 눈동자는 제가 들은 말을 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

“이게 처음이 아니니까.

비오첼라는 이런 식으로 힘없는 가문의 영애들을, 왕국의 귀족에게 노예로 팔고 있어요.

여태 선심 쓰듯 변제해 준다던 금액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받으면서.”

“노, 노예라뇨…….”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의 영애가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췄다.

“그러니까.

앞으로 영애가 해줄 일이 있어요.”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을 손끝으로 쓸어내 주며 최대한 단호하고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영애도 다른 그 누구도, 그들에 의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죠?”

애처롭게 온몸을 떨던 그녀가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결국 무너져 내린 그녀의 등을 한참 쓰다듬어주며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아.

네가 노예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아무래도 오만하고 당돌하던 성격이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는 발휘되지 못한 듯싶다.한없이 불안해진 그녀 스스로는 헤쳐 나갈 방법이 없었고, 그게 결국 자신을 다 갉아먹었겠지.

그 어떤 자신감도, 자존감도 남겨두지 않은 채.

“우선 무섭고 힘들겠지만, 비오첼라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세요.”

영애를 상품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그녀를 험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전에 어떤 수를 써서 왕국까지 건너갈 수 있었는지 제가 알아낼 거예요.”

그리고 판델 남작 영애가 포함된 상단의 이동이 있을 때, 그 순간을 칠 예정이다.

“방법을 알아내면 영애를 무사히 구해내고, 또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드릴게요.”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 두려움에 삼켜진 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꼭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조금만 힘을 내줘요.”

“…네.

저, 뭐든, 뭐든 잘 해낼게요.”

“좋아요.

고마워요.

우리 같이 해봐요.”

조금 더 진정이 된 후에 돌아갈 수 있도록 영애를 남겨두고 내 쪽에서 먼저 자리를 털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걸음이 무겁다.

‘나쁜 새끼들.’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말아 물어야 했다.

이 일에 더 가까이 들어갈수록 이젠 돌이킬 수 없을 과거의 사건들이 더 생생히 다가왔다.

“하아.”

세를린이 열어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자 내가 나오기를 기다린 마차가 있다.그리고 그 앞에 기대서 있는 한 사람.

“비비안.”

고개를 기울이며 환하게 웃은 대공이 내게 걸어온다.

“…여기서 뭐 하세요?”

“봐줘.

아무도 모르게 왔어.”

어느새 앞에 선 그가 손을 들어 내 양 볼을 감쌌다.

“아픈 데는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런 얼굴이지? 응?”

축 처져 있던 손을 조심스레 들어 그의 등으로 향했다.

어쩐지 지금은 뭐라도 부여잡고 싶은 기분이라 그의 셔츠가 구겨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갑자기 품으로 들어선 나 때문에 놀란 대공의 눈이 커진다.

“하아.”

무언가를 참듯 한쪽 눈을 찡그린 그가 한숨과 함께 나를 제 품에 더 끌어들였다.

“…사실 각하가 따로 준비하던 계획 있죠? 그런데 왜 제 장단에 맞춰주시는 거예요?”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웅얼대자 머리 위에 내려앉은 대공의 턱이 느껴진다.사실 비오첼라를 먼저 주시하고 있던 건 그였다.

아마 내가 아는 것을 대공은 뭐든 먼저 알아냈을 테고, 수완이 좋은 사람인만큼 이미 계획도 다 세웠을 터였다.그런데 그저 묵묵히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는 이유가 뭘까.

“너랑 따로 행동하고 싶지 않아서.”

그가 말할 때마다 머리 위에서 움직이고 있어 자꾸 정수리가 간질거렸다.

“너는 하고 싶은 대로 뭐든 해.”

“…….”

“말했잖아.

내가 네 무기이자 힘이라고.”

낮게 웃으며 입술을 부비는 그 때문에 머리에 진동이 느껴졌다.

“마음껏 휘둘러줘, 비비.”

정작 휘둘리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가.방금 전까지 꽁꽁 얼어 금이 가는 것 같았던 마음이, 그의 등장만으로 봄 햇살을 받듯 녹기 시작했다.

“…정말 뭐든 다 해도 돼요, 나?”

느리게 내 어깨를 잡고 아주 작은 틈만큼 밀어낸 그가 다시 내 얼굴을 감싸 당긴다.이마에 닿은 그의 입술 사이로 따스한 온기가 번져 나갔다.

“응.

대신, 뭘 하든 나와 함께해 주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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