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 하얀 천은 지금, 내 눈 밑부터 목까지 늘어져 있었다.
외모를 감춰보자더니, 그냥 다 가리는 방법을 택했을 줄이야.
“…왕국에서 유행하는 게 이런 건 줄은 몰랐네요.”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르는 한밤중 마차, 이번엔 가면 대신 검은색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대공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응.
그러게.”
마차 창에 머리를 댄 대공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 있다.
푸른 머리칼이 가닥가닥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 색이 달라서 그런가.
소년 같아.’
“소년이라기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천에 가려 입매는 볼 수 없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만연했다.
“…….”
안타깝게도 지금 그가 내 마음 읽고, 말고를 신경 쓸 여유가 내겐 없었다.
비오첼라 백작을 만나러 가는 길, 혹여 내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긴장되어 죽을 것 같으니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 마, 비비안.
여차하면 내가 있잖아.”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구하는 그의 눈동자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 모습을 보자니 더욱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늘었다.
‘쟤가 나서는 일은 없어야 해.’
그가 팔을 들어 내 허벅지 위에서 흔들리던 은발을 한 줌 쥐었다.
“이것도 예쁘다.
비비는 머리칼이 없어도 아름다울 것 같아.”
제 손에 감긴 머리칼을 향하던 그의 눈이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미치게 좋아.”
때마침 마차가 멈춰 서고 느릿하게 일어선 그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안아 올렸다.찰나, 시야가 검게 물들며 이마에 미약한 숨결이 닿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나랑 약조할 수 있지?”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의 눈꼬리가 유려하게 휜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내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한층 더 예쁘게 웃은 그가 가볍게 마차에서 내렸다.
‘지금… 내 이마에 입술, 입술 갖다 댄 거야, 쟤?’
처, 천 너머 입술이기는 한데! 내 이마랑 네 입술 사이에 천이 있기는 했는데!슬며시 손을 들어 이마에 대봤다.
‘아.
미쳤다, 진짜.’
마차 문 앞에서 내게 손을 내밀고 있는 그를 보니 비오첼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내 최대 난관은 아무래도 쟤야.’
한층 차분해진 마음으로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갰다.
“가시죠, 주인님.”
잠시 후 나는 능글맞게 미소 짓는 대공의 옆에 서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뒷문을 바라봤다.
‘돈이 탐나서 부르기는 했다만, 신분 차이는 확실히 하고 싶다, 이건가.’
이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벨리타다.
왕국 출신 평민, 돈으로 물건도 사고 땅도 사고 사람도 살 수 있다 믿는 머리 빈 사람! 그게 나야!한차례 최면을 걸고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쾨쾨한 냄새가 진동한다.
“괜찮겠어?”
나도 모르게 코를 막고자 들어 올린 손으로 대공의 팔뚝을 두드렸다.
‘…냄새 정도야.’
지난 시간, 혹독하고 지독했던 스텔라와의 연기 수업을 떠올렸다.
뜻깊은 시간이었다.
어찌나 악독하고 놀라운 발언들로 나를 당황하게 하던지!
‘비오첼라 백작이 그 무슨 말을 뱉어도 나,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
벽 너머로 자잘한 소음이 들려왔다.
도박장 내 사람이 바글바글하네, 이 시간에도.아마 이 통로는 가벽으로 만들어졌겠지.
반대편 도박장에서는 평범한 벽으로 보일 터였다.
‘숨길 것도, 죄지은 것도 많으니 구멍 만드는 일에 열 올릴 만하지.’
복도가 꼬불꼬불 어두침침, 길기도 길었다.한참을 걷다 발견한 단정한 문 하나.
대공이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나와 눈을 맞췄다.
“들어갈까요, 주인님?”
저놈의 주인님 소리.
놀리는 게 분명해.
“그래, 열어.”
여유로운 미소를 걸치고 명하자 작게 웃은 그가 문을 열어젖혔다.탁―뒤로 문이 닫히자 순식간에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눈 둘 곳을 못 찾을 만큼 휘황찬란한 방 안의 풍경.유들유들한 비오첼라 백작이 그 두툼한 살덩이를 소파에 풀어놓은 채 이쪽을 바라봤다.
이렇게 젊은 여자가 들어올 줄은 몰랐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백작의 눈이 커졌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벨리타 상단의 벨리타라고 합니다.”
그러나 곧 내가 한껏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리자 백작이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손을 휘저었다.
‘제 딴에는 이편이 더 다루기 쉽단 계산이겠지.’
“어서 오게나.
앉지 그래.”
제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와 대공을 훑는 것이 느껴진다.
붉은 천에 금실로 수를 놓은 소파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갑갑하게 했다.소파에 자리하자 내 뒤편에 굳건히 서 있는 그의 온기가 전해진다.
“…저자는?”
‘본능적으로 거북하겠지, 그 기분 내가 잘 알아.’
정체를 숨기고 있다 한들 사람을 내리누르는 기운은 어찌 감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눈도 못 마주치며 대공을 힐긋대는 백작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아, 제가 늘 데리고 다니는 수하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긋 웃으며 부드러이 말하자 달랑 한 사람 달고 온 것을 물리라 할 수는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아.”
뒤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손짓을 전하자 대공이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상자를 테이블로 내밀었다.쿵―
‘…무겁기도 하겠지만, 저거 일부러지? 지금 쟤, 더 힘줘서 소리 낸 거 같은데.’
나까지 좀 화들짝 놀라 모양새가 이상했다.
“이게 무언가?”
달칵―친절하게 상자까지 열어둔 그가 다시 내 뒤로 돌아갔다.
“이, 이건!”
‘좋기도 좋겠지.
눈도 못 떼는 걸 보니 곧 침이라도 흘릴 꼴이네.’
“처음 뵙는 자리인데 소박한 성의 정도는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해서 준비했습니다.”
빛을 받아 한층 더 샛노랗게 반짝이는 금들이 영롱하다.
“이렇게 많이?”
정말 품위가 없기는 없다, 너.
테이블에 거의 코를 박을 듯 상체를 숙인 그가 금을 어루만졌다.
“백작님께서 운영하시는 상단이 저희 왕국에 많은 물품을 조달해 주신다 들었어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한 그가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가진 자가 베풀어야지, 안 그런가!”
제국의 다른 귀족들은 다 저 먹고사는 일 말고는 관심이 없다는 둥, 자기가 이리 마음이 여려서 이런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낸다.
‘우습다.
스텔라의 발언들에 비하면 쟤가 구사하는 말은 그냥 아기 수준이네.’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미소 짓자 신이 나는지 한껏 어깨를 들썩이는 꼴이 한심했다.
“아! 백작님, 혹시 약물도 취급하시나요?”
기회를 봐 해맑게 묻자 별안간 경계 태세로 들어간 백작이 나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약물? 무슨 약물?”
“남녀가 서로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약물이라던데?”
꽈악―가죽이 뭉개지는 소리에 옆을 보자 대공이 손으로 소파 등받이를 쥐어짜고 있다.
‘왜 이래? 뭐 문제 있어?’
미간을 찌푸리고 그에게 눈짓하자 간신히 고개를 가로젓는 그가 보인다.
“허허.
뜨겁게 사랑이라.”
철없는 손녀 보듯이 바라보는 시선을 보니 내가 어지간히 모자라 보이는 듯했다.
“네.
도통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잔뜩 왕국에 보내고 싶은데.”
나는 아쉬움을 표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백작이 금을 한 번 보고 검지로 소파를 두들기다 괜히 방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었다.
‘갈등하네.
갈등해.’
“혹시 그걸 취급하는 상단, 알고 계실까요?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물건만 많으면 좋겠는데.”
“그대가 아는지 모르겠으나, 찾고 있는 물건은 정상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품목이 아니라네.”
“어머! 어쩐지! 전혀 찾을 수가 없더라니.”
마치 고민하는 척 손으로 제 턱을 쓸며 미간을 좁힌 그가 슬쩍 운을 띄웠다.
“그렇지만 이리 성의를 보인 것을 모른 척하기가 그러니 한번 알아는 봐주겠네.”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이래놓고 다른 상단 소개해 주는 척 비오첼라가 해 먹겠지.
뭐가 됐든 이렇게 잔뜩 먹이를 던져주었으니 그 욕심, 어디 한계치까지 쑥쑥 키워봐라.
“정말이신가요? 백작님, 이렇게 인연이 닿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인데 이리 도움까지 주신다고 하시니! 정말 기뻐요!”
나긋나긋 저를 띄워주는 황금 덩어리를 보는 것이 기꺼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백작.
“어려 보여 그리 큰 상단을 운영하는 것이 내심 걱정되었는데, 그렇지만도 않구만! 아주 야무져.”
‘얼씨구.
입이 귀에 걸렸네, 걸렸어.’
이제 더는 이 작자와 나눌 이야기도 없고, 이 너저분한 공기 속에서 숨 쉬고 싶지도 않았다.
백작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노예로 넘기며 그 사람들을 절망 속에 빠트렸을지.이 공간에서 그와 마주하고 있을수록 그 사실이 마치 형체를 가진 듯 시시각각 내 목을 조여왔다.
“그럼 백작님의 귀한 시간을 이만 뺏어야겠어요.
제가 종종 작은 선물로나마 찾아뵐 수 있도록 허해주실 거죠?”
일개, 그것도 왕국의 평민 출신이 제국의 백작과 마주 앉아 있는 것부터 틀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서슴없이 말을 내뱉고 먼저 자리를 뜨겠다 청하는 데도 백작은 웃는다.
‘신분보다 돈이라는 거군.’
“그리하도록 하게나.
내 그대가 부탁한 것은 조만간 일러주도록 하지.”
나는 손에서 금을 놓지 못하는 백작에게 다시 한번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리자 대공의 팔이 허리를 감싼다.
“괜찮으십니까.”
‘왜 아직도 이 말투지?’
인상을 쓰며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사람이 붙었어.”
“아.”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미약한 힘으로 밀어냈다.
순순히 물러난 그가 여전히 가깝게 붙어 걸었다.들어서기 전보다 속이 좋지 않아 통로의 냄새가 더 역하게 다가온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지나 턱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답해줄 처지가 못 되었다.재빠르게 뒷문을 연 그의 뒤에서 손을 무릎에 대고 숨을 골랐다.
바깥 공기를 맡자 한결 상태가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쉬면 될 것 같은데.’
“잠시만.”
한 손을 들어 의사를 표하자 시야에 걸려 있던 그의 다리가 내게 향한다.
“…어?”
빠른 동작으로 한쪽 팔은 내 무릎 뒤로, 나머지 하나는 내 등을 휘감은 그가 나를 안아 들었다.
분명 땅을 보고 있었는데 눈 한 번 깜빡인 찰나에 하늘이 비친다.
“마차까지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대공이 나를 안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내리깐 눈에 담긴 걱정과 애달픔에 차마 거절의 말이 안 나왔다.
‘아, 이 안정감 뭐야.
팔, 가슴… 왜 이렇게 단단한 건데?’
그의 품에 안기자 좀 전까지 흔들리던 세상이 제자리를 찾아간 듯 평온하다.
나는 그 안락함에 취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