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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31화 (31/109)

31화

연애도 해본 적 없는데, 비밀 연애란 대체 무어란 말인가.차오르는 마음을 누르며 간신히 대공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한 나는 허탈함이 밀려왔다.그는 애초에 기다림을 모르는 자였다.

‘그래, 참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여태 내게 그랬을 리 없지.’

“아가씨, 오늘은 이 초록색 드레스가 어떠세요?”

발랄하게 드레스를 들고 내게 의견을 묻는 마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네 주인이 지금 늑대의 꼬드김에 홀라당 넘어갔다는 것을.

‘그는 늑대인가, 여우인가.’

나는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계획이 아니었는데.아련하게 분위기 잡고

‘기다려 주세요.’

라고 말했던 게 무색할 만큼 수치스러운 결과였다.왜? 왜 나는 아니라고, 비밀 연애는 무슨! 어디서 배워온 수작질이냐고 따지지 못했는가.

“…나는 속물이야.”

“예?!”

마리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답할 수 없었다.

- 이제 둘이 있을 땐, 비비라고 불러도 돼?제 콧잔등을 내게 부비며 웃는데, 나는 순간 최면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그 잘난 얼굴밖에 안 보이더라.

“마리, 내 잘못이야? 눈 달렸는데 그게 죄야?”

시야 가득 대공 얼굴이 들어찼는데, 거부해? 어떻게?잠 못 이룬 덕에 퀭한 눈을 들어 읊조리자 마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멀어졌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손을 저어 보이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어제 일은 잠시 넣어두고 지금은 오늘의 일정을 소화해야지.

나 비비안 윈데이너, 이래 봬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었다.옳은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공에게 마음을 전한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돌이킬 수 없어.이제 하루빨리 황태자를 위해 건수를 물어다 주는 수밖에 없다.나는 열의를 불태웠다.

지금 눈앞의 과제는 비오첼라와 그에 얽힌 추잡한 인간들을 끌어내는 것이다.마음을 다잡은 나는 늘어져 있던 몸을 들어 옷에 몸을 꿰기 시작했다.이제 스텔라를 만날 차례다.*

‘그나저나 비밀 연애는 마리도, 스텔라도 아무도 몰라야 하나?’

상점가 골목에 들어선 나는 스텔라가 미리 알려준 유리 공예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테사, 테사라고 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나무 명판에

‘테사’

라 적혀 있는 가게를 발견했다.

명판 위 흔들리는 붉은 깃이 스텔라의 머리를 떠오르게 한다.딸랑―

“어서 오세요.”

작은 창문 하나만 나 있던 소박한 외관과 다르게 가게 안은 색색의 유리들로 가득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구현해 놓은 듯 없는 색이 없었다.

“와.”

홀린 듯 가게 안을 살피고 있자, 인자한 미소를 띤 가게 주인이 다가온다.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실까요?”

‘스텔라가 분명.’

“붉은 크리스털로 된 빛을 찾아왔는데요.”

라고 말하면 알아듣고 제게 인도해 줄 거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완전 자기를 비유한 문장 아닌가!방금까지 푸근하게만 보이던 가게 주인의 얼굴에 예리한 안광이 번뜩였다.

“이리 오시지요.

안내하겠습니다.”

그를 따라 비밀의 문을 넘고 넘어 도착한 곳에 붉은 크리스털, 스텔라가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붉은 크리스털의 빛이 너무 눈부시네요.”

과장되게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찡그리자 그녀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 내가 저런 표정을 대공에게 지었어야 했는데.’

어디서 수작질이냐는 표정의 정석이었다.오늘도 가지런한 몸짓으로 친히 차를 우려준 스텔라가 속삭였다.

“대공 각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신다, 이거죠?”

진실을 상기하자 갑자기 자신감이 하락한다.

대공은 모르는 대공의 역할.

해줄까? 해주겠지?제국의 귀족이면, 그것도 고위 귀족인데! 그만한 책임감은 가지고 있지 않겠나!

‘게다가 애, 애, 애인이 부탁하는데.’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얼굴에 열이 잔뜩 오른다.

어휴, 나 좀 봐! 진짜 주책이야!

“…그보다 영애, 뒤를 한번 보시죠?”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스텔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대에게 추적자가 붙어 있는 것 같군요.”

‘뭐? 추적자? 나한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표하는데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쯤 되면 나도 알 것 같다.

‘그래, 네가 나타날 때가 되었지.’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웃는 대공이 서 있다.난 이제 이런 일로는 놀라지도 않아.

“이런.

우연이 다 있군.”

‘우연 좋아하시네.’

상점 안, 비밀스러운 공간까지 파고들어 와 놓고 우연?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그 뻔뻔함을 멍하니 바라보자 혼란스러웠다.

불과 하루 전에 서로 좋아한다며 껴안고 있던 게 현실이 맞나.

꿈은 아니었을까.

“잠시 같이 자리해도 괜찮겠나.”

내게 묻는 것이 아니라는 듯 스텔라를 향한 그의 시선에 힘이 실렸다.

“그러시지요.”

심드렁한 그녀의 대답에 냉큼 내 옆자리를 차지한 그가 연신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비밀이야?’

“아.”

그가 짧은 감탄을 내뱉더니 내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양심은 있니, 그 와중에?

“오늘은 무얼 했지?”

그새를 못 참고 고개를 돌려 내게 묻는 얘는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연애도 모르고, 비밀 연애도 모른다지만, 이런 게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다.

“…저희 약속은 저녁 아니었나요?”

대공을 만나기로 한 건 맞지만 지금 여기, 이곳은 아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영애하고 단둘이 만나는 것으로 알았는데.”

스텔라가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느리게 돌려진 대공의 얼굴에 미소가 있었으나 무척 딱딱했다.

툭 치면 금이 쩌적, 갈 것처럼 말이다.

“내가 있으면 곤란한 대화라도 하고 있었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목이 말랐다.

눈을 도르르 굴리자 스텔라가 포크로 케이크를 가르며 웃고 있었다.남 일이라, 이건가.

우리 한 팀 아니었어?

‘어차피 오늘 말하려고 했잖아.

나, 힘을 내라.

차라리 잘되었어.’

스텔라까지 있으니 이참에 다 같이 의견을 나눠보는 것도 좋지 않나.

좋을까? 이 둘이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었나?

“…사실은 레사와 제가 가짜 상단을 하나 만들었어요.

비오첼라의 흥미를 끌 만한.”

더 말해보라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비오첼라에서 관심이 있는지 상단 측으로 만남을 청해왔고요.”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상단주 역할을 제가 하려고 하는데.”

숨을 크게 들이쉰 대공이 눈을 휘었다.

웃어도 사람이 무서울 수 있구나.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제 목표는 비오첼라의 욕심을 부추겨서 그가 왕국과 어떻게 노예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었는지, 그 방법을 캐내는 데 있어요.”

그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다 테이블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는 몇 번이나 영애를 말렸답니다.”

장난기가 듬뿍 담긴 스텔라의 말에 고개를 든 대공이 코웃음을 친다.

조금 신경질이 담긴 그의 시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를 향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그 꼴을 절대 못 보겠다면?”

짓씹듯 내뱉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미간을 구긴 내가 단번에 말을 받아쳤다.

“그러면 곤란한데.

각하는 저랑 같이 가셔야 하거든요.”

“뭐?”

“저 상단주.”

나는 검지로 내 가슴을 툭툭, 치고 다시 대공의 탄탄한 가슴을 꾹, 눌렀다.

“각하가 내 수하.”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키운 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지금 왕국 출신의, 돈이 많아도 너무 많은 그런 상단주거든요? 그런데 비오첼라가 거래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껴서 우리 물건 얹어 같이 한번 해보고 싶다! 이렇게 접근할 거예요.”

나는 뿌듯하게 우리의 장황한 계획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그가 반대할 틈을 안 주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리고 저희가 그 비밀을 딱! 잡아내면 각하가 그 순간 비오첼라를 확! 팍! 쓸어주시는 역할인데, 괜찮죠?”

‘할 거지? 나랑 같이? 응?’

어느새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그를 올려다보자 대공의 눈썹이 꿈틀댄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미묘한 그런 표정.

“…각하가 그 역할을 해주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지만요.”

고개를 기울이며 세 번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이 꽤나 작위적일 것 같기는 한데, 먹히기를 바란다.대공이 손으로 제 눈썹을 쓸더니 고개를 젖혔다.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기를 두어 번.

내리깐 눈이 지긋이 나를 담는다.

그 눈동자에 애정과 친밀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순간 세상에 둘만 남은 기분이 들었다.

“비비안, 나한테 선택권 준 거 맞아?”

그의 입매가 짓궂게 올라갔다.

‘안 줬다.

네가 아니면 안 되니까.

애초에 다른 차선책 따위는 없다.’

이런 내 마음을 이미 읽었을 그가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읽으라고 하는 생각이다.

“그럼요.

각하께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지요.”

‘해라, 해.

그냥 한다고 해!’

이내 고개를 숙인 그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이거 탐이 나서 거절을 못 하겠군.”

“어머!”

가증스럽게 손뼉을 치며 기뻐하자 대공의 눈매가 부드러이 휘었다.

반면 반대편 스텔라의 표정은 어마어마했다.마치 여기 너희 둘만 있니? 라고 묻는 듯한 눈빛.

‘…비밀 연애, 가능한 거야?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약속은 이미 잡혔나?”

스텔라를 바라보는 대공의 눈에 온기가 전혀 없다.

사람을 대하는 데 온도 차가 아주 확실한 사람이구나, 너.

“예, 준비는 제 쪽에서 다 마쳤으니 그날 나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준비?”

내게 따로 무언가 필요하다고 언질한 적은 없는데! 언니, 혼자 뭘 준비한 거야?

“두 분 다 워낙 유명하신지라 그 외모, 좀 가려볼 것을 준비했지요.”

싱긋 웃은 스텔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복면의 사내가 나타났다.

상자 하나를 내려놓고, 다시 벽으로 흡수되듯 자취를 감추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이게 다.”

“왕국은 보통 이렇게 밝은 머리 색이 많더군요.”

긴 것은 은빛이요, 짧은 것은 하늘빛을 띤다.

‘와, 대공의 푸른 눈이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힐끔 옆을 바라보자 무덤덤한 얼굴의 그가 눈을 맞춰온다.

“비비안은 어떤 머리를 하든 예뻐.”

못 하는 말이 없다, 정말! 쟤는 정말 아무것도 숨기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게 분명하다.

나라도 정신 바짝 차리자.상자 안에는 그 외에도 반투명한 천들이 있었다.

하얀색 천을 손에 들고 스텔라에게 물었다.

“이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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