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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30화 (30/109)

30화

신년 연회가 열리기 전, 나로선 올해가 가기 전에 해둘 일이 있었다.

내내 미뤄뒀던 일.내 자리가 아닌 곳에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기 위해 꼭 만나야 하는 사람.오랜 세월 종종 얼굴을 맞댄 황태자임에도, 이 이야기는 하기가 어려웠다.황태자비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어찌 전해야 할지 초조해하던 내게, 한 줄기 산들바람처럼 리안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비비안, 마이어 백작 영애하고 잘 지내는 것 같던데.”

황후의 온실, 마주 앉은 황태자가 차를 마시며 건넨 말 덕에 한결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제부터였더라.’

내가 말한 적도 없건만 그가 나의 일상에 대해 아는 것이.열한 살쯤이었나.

황제가 나를 은연중 황태자비로 대우하기 시작했을 때, 크고 작은 사건이 있었다.내가 없으면 자신의 딸에게 차례가 오지 않을까.

혹은 더는 윈데이너 후작가에 힘이 실리는 것이 못마땅했던 이들이 나를 노리곤 했다.그리고 벌어진 마차 사고.

보시다시피 멀쩡히 살아 있지만 당시엔 꽤 오래 침대 신세를 져야 했고, 그 뒤로 내게는 언제나 사람이 붙었다.

‘황태자의 사람들.

나 같은 일개 영애한테는 사치다, 사치야.’

“예.

전하도 여러 번 보셨죠? 정말 예쁘지 않나요? 게다가 또 얼마나 솔직한지 몰라요!”

빙긋이 웃으며 쿠키를 입에 물자 리안이 따라 미소 지었다.

“그것참, 귀족치고 드문 장점이군.”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니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황태자 옆에 있는 스텔라를 떠올려보자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다.그래도 이런 일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지.

괜히 설치지 말자.

“저기, 전하.”

그리고 오늘은 꼭 물어야 했다.

내가 이만 네 옆의 황태자비 자리를 진심으로 거절해도 괜찮을지.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내가 퍽 이상한지 눈을 맞추고 있던 리안의 고개가 슬며시 기울었다.

“왜?”

“…그, 저 때문에 전하의 혼처가 정해지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테이블에 놓인 다과에 고정해 둔 시선을 억지로 들자 얼어붙은 황태자가 보였다.

‘…왜 저러지?’

“전하?”

그제야 눈을 깜빡인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며 목울대가 꿀렁인다.

“갑자기 왜?”

‘아, 그거야 너도 나도 이제 어른이고, 무엇보다…’

내게 좋아하는 이가 생겼다.

“이제 윈데이너의 이름이 그다지 전하께 필요한 방패는 아닌 것 같아서요.”

어릴 때는 리안이 무엇을 잘 해내도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다.

디에고 브라이트, 그가 있었으니.황태자 자리에 있음에도 리안은 언제나 쫓기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한 번만 삐끗해도 물어뜯겠다고 이를 가는 이들이 도처에 널렸으니까.

너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매번 상기시키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그를 옥죄었다.그래서 허울뿐이라도 그에게 힘을 줄 수 있다면, 가문이 방패가 되겠다고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젠 그런 허울뿐인 방패가 필요 없지.’

대공은 훌륭히 성장해서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하나 그 못지않게 황태자는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냈다.

“…제게는 이제 전하가 아닌 제국의 미래는 상상하기 어려운걸요.”

리안의 지난 고생이 떠오르며 몹시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온 얼굴에 갸륵해 보일지 모르는 미소가 떠오른 것 같은데, 나 지금.그 순간, 황태자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몹시 괴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내 미소가 그렇게 별로였어?’

“다른, 혼처라도 들어온 거야……?”

“네? 저요?”

어디 아픈 사람처럼 얼굴에 핏기가 가신 황태자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네가 있는데 내게 어떤 놈이 청혼을 한단 말인가! 제국의 황태자를 상대로, 겁도 없이?!

“그럼 그대로 있지.

나는 아직 네가, 윈데이너가 필요해.”

“아…….”

황태자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푹 숙였다.열어둔 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나뭇잎을 흔든다.

정적이 감도는 온실 내, 들려오는 소리라곤 그뿐이었다.

‘저렇게까지 불안해할 줄은 몰랐는데.

내 생각보다 더 의지를 했던 건가.’

나는 급격히 무거워진 분위기에 동공을 데구르르 굴렸다.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던 황태자의 두 손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미안, 미안해.

비비안.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더 곁에 있어줘.”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번졌다.

“전하,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나는 한껏 아무렇지 않은 척, 정말 별일 아니라는 것을 그에게 전달하기 위해 활짝 웃어 보였다.하루, 이틀, 한 달, 어쩌면 1년 더 예비 황태자비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해도 사실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다.다만 이미 나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대공을 향한 이 마음을 얼마나 가만히, 참아낼 수 있을지.

‘하아, 최대한 여러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네.

리안의 불안을 덜어줄,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대공에게 갈 수 있는 방법.’

*

- …할 말이 있어요, 각하.한겨울의 차디찬 밤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에 열이 올랐다.파티가 한창인 연회장을 빠져나와 홀로 테라스에 앉아 대공을 기다리자 이내 그 언젠가처럼 그가 난간을 넘어 다가온다.

“아무도 모르게 테라스로 오라니, 설레는걸?”

장난스럽게 웃은 그가 맞은편이 아닌 내 옆에 앉았다.

- 비비안, 이제 그만 나 받아주면 안 될까?좀 전에 그가 한 말이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내 마음,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얼마나 티가 났으면 그렇게 확신에 차서 저를 받아달라 말할 수 있는 거지? 심지어 언제 말로 해줄 거냐고 묻다니, 내 어떤 마음을 그가 본 건지 초조했다.

“지금은 봐도 되는 건가, 아니면 네 손을 잡을 기회일까.”

나는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잡아봐, 우선.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곧 손이 따뜻해졌다.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는 행위에 낭만이 없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래도 이번에는 마음이 아니라 내 입으로 전하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 각하 못 만나요.”

차마 그의 눈을 보고 말할 수가 없어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째서?”

“제가 윈데이너니까요.”

답이 없는 그를 보기 위해 살짝 고개를 틀자 무척 평온한 얼굴의 대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황태자랑 이대로 결혼할 텐가?”

대공의 목소리에 미처 누르지 못한 노기가 느껴졌다.

“아니요.

이제 그만 내려올 거예요, 예비 황태자비 자리에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제 더는 틀어진 자리에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기다려 주세요.”

지금의 나는 네게 바로 갈 수 없지만, 그래도 갈 거니까.조금 멍한 그의 얼굴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그가 잡고 있는 손을 움직여 이번엔 내가 깍지를 꼈다.

“어차피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제 입으로 말한 적은 없으니까.”

다른 한 손을 들어 대공의 나머지 한 손도 감싸 쥔 내가 상체를 숙여 그에게 다가갔다.

좀 더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보자 만감이 교차한다.

“각하, 좋아해요.”

처음 보는 표정의 그가 굳은 채 눈을 깜빡였다.윈데이너로서는 그에게 갈 수 없었지만, 비비안은 이미 오래전에 그에게 닿아 있었다.얼굴을 가리고 싶은지 대공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가 내게 잡혀 있는 손을 빼내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미치겠군.”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당시의 내 모습도 이랬을까.

그런 나를 보며 웃음 짓던 대공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너무 사랑스럽잖아.’

고백은 내가 했는데, 귓가가 붉어진 대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그가 온몸으로 내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한 번 더.”

“네?”

“한 번 더 말해줘.”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와 눈을 맞춘 그의 목소리가 애절했다.그 눈을 보고 나니 화르르, 나 또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진다.

‘얼굴이 너무 야하잖아요, 각하!’

“…좋아해요.”

이미 한 번 뱉었으니 두 번은 쉬울 줄 알았는데, 더 어려웠다.으허헝, 너무 부끄러워.

심장 터질 것 같아!이내 대공이 아이처럼 웃기 시작했다.그러더니 잡혔던 손을 부드러이 풀어낸다.

아주 천천히 더 내 앞으로 다가선 그가 나를 껴안았다.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이 허리를 감싸 밀착한 상태로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한 번 더 힘주어 나를 안은 그가 목이 메는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좋아해, 비비안.”

바로 귀에 대고 말하는 그 때문에 몸이 떨렸다.

간지럽고 이상한,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이윽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서로의 체온과 심장 소리를 만끽하며 행복을 곱씹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계속 이 품에 이렇게 안겨 있고 싶을 정도였다.

‘서로 좋아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너무 좋아서 주체가 안 되는데.’

그러나 고백은 했지만, 만나지는 않을 거라는 내 말을 얘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각하, 그만 놔주세요.”

싫다는 듯 더 힘을 주는 그의 등을 손으로 툭툭, 치자 마지못한 듯 놓아준다.

“제 말은 이해하신 거죠?”

고개를 갸웃한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싫은데.”

“…뭐가요?”

“정확히 만나지 않겠다는 게 어떤 거지?”

그거야, 말 그대로다.

어쩔 수 없이 보는 것 말고는 그와 따로 만나지 않겠다는 건데.

“말 그대로요.

공식적인 자리 말고는 보기 힘들 것 같아요.

아, 물론 그런 자리에서도 각하랑 특별히 가깝게 있을 생각 없고요.”

“…언제까지?”

“제가 정리할 때까지.”

대공이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문질렀다.

방금까지 환희에 차 있던 표정이 단숨에 고뇌에 찬 얼굴로 바뀌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 건데.”

“제 마음 때문에 황가에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아마 아무리 시간이 지난 후라도 결국 내가 대공과 만난다고 하면 그건 그대로 황태자에게 타격이 갈 것이다.그것만큼은 내가 어찌할 수 없겠지.대신 내가 그를 만회할 만한 힘을 황태자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내 빈자리 이상의 것을.지금까진 따로 이렇다 할 일에 뛰어들지 않았지만, 이젠 리안의 든든한 신하가 되어줄 참이다.한숨을 푹 쉰 대공이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만남만 아니면 된다는 거잖아.”

고개를 숙여 내 손을 보던 그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진다.

그 눈이 요망했다.

그 안에 지금 욕망과 애처로움, 더불어 간절함이 맺혀 있었다.

“비밀로 해, 그럼.”

“…비밀이요?”

“응.

비밀 연애하자, 비비안.

내가 잘할게.”

비밀? 비밀 연애라고? 비밀이란 단어가 주는 은밀함과 연애라는 달콤함이 섞여 내 머리를 휘저었다.

“좋아하는데, 매일 보고 싶을 것 같아.

참을 자신이 없어.”

아니라고,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냐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 들키고 말 거라고.애초에 비밀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지?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응? 너랑 이것저것 하고 싶어.”

대공의 입꼬리가 야살스럽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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