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비밀 연애 】
황궁에서 열린 신년 연회.
수많은 귀족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비비안을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가의 수장, 패트릭 던컨 공작이 무표정으로 좇았다.던컨 공작, 회색빛 머리에 얼굴에 진 주름마저 중후한 멋이 풍기는 이 꼿꼿한 노인네가 비비안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찰나 못마땅함이 스친다.
‘비비안 윈데이너라.’
세간에 퍼지는 소문을 공작이 모를 리 없었다.
개국공신 가문인 던컨 공작가는 제국이 세워진 이래 단 한 번도 권력의 바깥으로 나가본 적 없는 굳건한 중심 세력이었다.그들은 자잘한 이익에 흔들리지 않으며 항상 고고하게 황가를 뒷받침한 친황가 세력의 뿌리이기도 했으나.선황제의 신하로서 그 몫을 충실히 이행하던 자이니만큼 지금의 황제가 황위를 차지한 이후엔 정치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나 관조하는 위치를 고집하고 있었다.그런 그의 발걸음이 아직 새파랗게 어린 귀족 영애에게로 향했다.
“영애.”
부름에 뒤를 돌아본 비비안의 눈이 커진다.
귀족이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던컨 공작, 그 사람이 저를 부를 일이 뭐가 있을까.
“공작님.”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린 비비안이 틈 하나 보이지 않는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분명 권유였으나 그가 풍기는 분위기 덕에 협박처럼 들렸다.거절의 명분이 없는 비비안이 공작과 함께 인파가 적은 곳에 자리했다.
“건강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이젠 괜찮은가.”
그의 날카로운 눈이 비비안의 얼굴을 훑었다.
그 속에서 병색을 찾아보려 했으나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과 눈가를 보면 아픈 이 특유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공작이 한참 말없이 연회장을 바라봤다.
“영애, 나는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하오.”
뜬금없는 그의 발언에 북적이는 연회장을 보던 비비안이 고개를 돌려 공작을 바라봤다.
‘뭔데, 이 노인네? 초면에 무섭게 왜 이래.’
잔뜩 긴장해 저를 경계하는 비비안을 곁눈질로 본 공작이 작게 혀를 찼다.
‘대체 황족이란 것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선황제의 최측근으로 고지식과 고집으로는 제국 내 일등 자리를 지금껏 놓치지 않던 던컨 공작은 이제 나이까지 먹어 더욱 꼬장해진 참이다.젊은 귀족은 물론 나이가 지긋한 귀족들마저 공작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혀를 내두르며 그에게 다가가길 꺼릴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다짜고짜 따지는 듯한 말에 비비안이 눈을 껌뻑였다.
‘속셈? 무슨 속셈?’
“무슨 말씀이신지.”
“황태자 전하와 대공 각하 사이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묻는 걸세.”
거리낌 없이 불쾌한 발언을 내뱉는 공작 때문에 순간 비비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빠르게 자신의 표정을 갈무리한 그녀가 속으로 한숨을 삼킨다.
‘뭐, 생각 못 했던 부분도 아니고.’
그래도 난감했다.
그냥 제가 대공을 좋아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어찌 한단 말인가.
‘속셈? 뻔하지! 걔랑 알콩달콩 연애 좀 해보고 싶을 뿐인데!’
생각과 동시에 아차, 한 비비안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혹시나 연회장 어딘가에서 대공이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핏기가 가셨다.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런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저런.
네 피앙세가 노인네한테 잡혀 있는 거 아닌가, 디에고.”
제 할아버지를 닮아 짙은 회색 머리칼의 공자가 옆에 선 대공에게 시선을 주었다.그리 옆에서 알려주지 않아도 항상 그 누구보다 먼저 비비안을 바라보고 있는 디에고였다.
“그보다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
능글능글 웃으며 제 친우의 얼굴을 살피는 공자가 퍽 즐거워 보였다.
가끔 디에고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 맞기는 한 건가 싶었는데, 이렇게 평범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될 줄이야.비록 그 상대가 무척 의외기는 했지만, 내내 눈 한 번을 돌리지 않고 비비안을 좇는 디에고를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자네 부정할 생각도, 숨길 생각도 전혀 없는 건가.”
곁눈질로 공자를 한 번 본 대공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뭘 숨겨야 하는데.”
요것 봐라.
근래 가장 즐거운 날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에게 그런 인간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인데.
처음치고 상대가 그다지 좋지 못한 거 같군.”
공자의 발언에 대공의 무심한 눈이 그에게 향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황태자 전하가 연모하는 이 아닌가.”
충분히 욕심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단 한 번도 잡음을 만들지 않던 디에고 브라이트.
누구든 대공을 보면 그가 타고나길 군림하는 자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그런 종자를, 한 번도 내치지 않고 자유로이 방생하는 지금의 황제는 또 어떤가.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평화가 지금 깨지려 하는 걸까.설마하니 그것도 한 여인 때문에?던컨 공자의 얼굴에 실소가 걸렸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모양이군.”
여유로운 포식자의 미소를 걸친 디에고가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섰다.비비안의 머리 위로
‘노인네! 노인네!’
성난 듯 아우성치는 것이 보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그였다.
“사랑과 평화.”
못 들을 것을 들은 듯 얼굴이 일그러진 공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해리스, 중요한 것은 사랑과 평화야.”
삐딱하게 웃으며 공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디에고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제 분홍 토끼가 잔뜩 성이 나서 씩씩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면 아쉬울 터였다.*
- 각하, 던컨이 지켜볼 것입니다.못마땅함을 가득 담은 표정의 공작이 새침하게 말하고 사라진 자리에 대공이 앉아 있다.나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슬쩍 그의 팔꿈치에 손을 대었다.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래도 되겠어, 비비안?”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것이 얄밉기 그지없지만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내가 그를 흘기자 눈을 동그랗게 뜬 대공이 슬쩍 자신의 팔을 뺐다.
‘왜, 왜 이러는데!’
“…각하?”
“응?”
다시 손을 뻗자 쉬이 피한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넘쳤다.
‘나 좋다는 사람 맞아?’
너 그날 귀도 빨개지고, 막 나 좋다고 엄청 환하게 웃고.겁이 난다는 둥 그런 말 하지 않았어?그 후로도 일곱 살 아이나 할 법한 실랑이가 몇 번이나 이어졌다.지난날, 설렘으로 밤을 지새우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나는 그때 얼마나, 얼마나 이 사람을 어른이라고 생각했던가.
‘이건 아니야.’
그와의 만남에 장애물은 차고 넘쳤다.
황가와의 관계, 흔들릴 귀족들.
오늘만 봐도 평소라면 말 한 번 섞을 일 없는 던컨 공작이 다가온 것 봐라.
- 영애, 이 늙은이가 이제 와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거라 믿어도 되겠는가.바라던 바다, 다행이지.
던컨 공작이 허튼 생각을 하는 이는 아닌 것 같아.의외이기는 했다.
워낙 선황제를 따르던 자라 대공을 세우고자 하는 뜻이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아무튼 안 그래도 이리 머리 아픈 일이 가득함에도 제일 걸림돌이 되는 것은.그가 내 마음을 대놓고 훔쳐본다는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나는 오늘 깨달았다.마음을 읽고, 말고의 차원을 넘어섰어.
가히 인성을 의심해 볼 만하다.
나는 흐린 눈으로 그를 훑었다.이내 더는 물러날 수 없었던 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이런 짓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굳게 마음을 먹고 테이블 아래, 드레스 자락에 가려진 발을 대공의 다리를 향해 뻗었다.드디어 그와 접촉하게 된 내가 기쁨에 취해 그에게 턱을 치켜들었다.
‘어때, 내가 이런 사람이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를 비웃자 대공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발이라니, 야해.”
뭐? 야해? 뭐가 야해.황당했다.
진짜 야한 게 누군데? 네 셔츠 앞자락이 탄탄한 가슴으로 인해 팽팽히 당겨진, 이런 게 야한 거 아니야?당황한 나머지 나는 딱 붙이고 있던 발을 슬쩍 내렸다.
“비비안도 내 마음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네 마음? 음흉한… 마음?’
대공의 고개가 살짝 숙여지더니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물론 야한 생각 많이 해.
그래도 비비안만큼은 아닌가?”
‘내, 내가 언제!’
나를 매번 긴장하게 하는 예의 그 눈빛과 미소를 장착한 그가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비비안은 생각도 시선도 몸짓도, 모두 야해.”
‘대체 어디가……?’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게 그런 재주가 있었던가.
그럼 왜 아직까지 나 한 번도 연애 못 한 건데?
“내 눈에 그래.”
요사스럽게 웃는 그가 상체를 숙여 내 귓가로 향했다.그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끝나고 나는 경악했다.
‘미쳤나 봐!’
천연덕스럽게 멀어진 대공이 턱을 괴고 나를 봤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전에 못 춘 춤, 지금 청해도 될까?”
춤춘다고 해야 제 몸을 내어줄 것 같은 낌새다.그래, 내가 아주 오늘 그동안 묵히고 묵힌 억울함을 가득 담아서 네 발을 가만두지 않겠어.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갰다.연회장 홀로 향하는 내내 귀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저는 그저 표정만 봐도 기분이 나쁜데.
눈으로 그걸 보는 대공은 그동안 오죽했을까.
“각하는 용케 저들의 마음을 보고도 번듯하게 잘 자랐네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고 했나.
“알고 보면 각하, 너무 순한 것 같아요.
저라면 수없이 난장을 쳤을 것 같은데 말이죠.”
때마침 탐욕과 시기가 버무려져 추악하기 짝이 없는 한 귀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대공에게 속삭였다.
“마음이 넓으시네요, 각하.”
어쩐지 너무 조용해서 옆을 돌아보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튼 대공이 보였다.그의 귀가 또 붉었다.
“설마, 부끄러우세요?”
뭐야, 뭐야? 지금 수줍어하는 거야? 그렇게 능글거리던 자가?나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자꾸만 고개를 트는 그를 끈덕지게 쳐다보았다.그를 이 치욕 아닌 치욕 속에서 구해준 것은 때마침 시작된 음악이었다.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를 되찾은 그가 정중하게 내 허리에 손을 댔다.몹시 즐겁다는 듯 능숙하게 춤을 추는 대공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그저 춤을 추는 것뿐인데 지나치게 행복해 보여서.
‘…의외로 춤을 좋아하나?’
그가 한층 더 고개를 숙여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조금 익숙해진 그와의 거리가 또다시 나를 설레게 한다.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로 시선이 향했다.저 입술이, 닿을 뻔했는데.
‘아, 지금 몸이 닿아 있어서 진짜 천만다행이다.’
지금 내 속마음을 알면 또 그가 얼마나 놀려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나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비비안, 언제 말로 해줄 거지?”
어쩐지 기대감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뭘 말하라는 거야? 내가 말로 해야 할 게 있나?
“나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뭘 기다려?그의 눈이 곱게 휘었다.
“비비안, 이제 그만 나 받아주면 안 될까?”
대공의 애틋한 목소리가 내게로 떨어짐과 동시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 물음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