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괜찮아?”
그가 고개를 비틀며 속삭였다.
느리게 눈을 내리까는 대공의 시선이 내 입술로 향한다.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맞대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 거리에서 보는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가 내 눈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안 멈춰도 돼?”
고개를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것만 같아서.
그 어떤 답도 하지 못한 채 굳게 다문 입매에 힘만 주었다.
‘정말? 나 지금 이 사람이랑 입 맞추는 거야?’
숨도 쉴 수 없는 정적이 이어졌다.마침내 그가 눈을 내리고 좀 더 고개를 틀어 다가온다.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있자 아직 닿지 않은 입술의 온기가 멀어지며 옅은 한숨 소리가 연이었다.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내뱉는 소리가 마치 신음처럼 들렸다.
“…위험했다.”
작게 웅얼댄 대공이 내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에 이마를 대고 비볐다.
“비비안, 그렇게 무방비하면 안 돼…….”
뭐야? 지금 뭐가 일어난 거지?나 뽀뽀 안 한 거 맞아? 이미 다 한 느낌인데! 입술 안 닿았어? 진짜야?칭얼대듯 치대던 그가 별안간 움직임을 멈춘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찬찬히 그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비비안, 응?”
“…….”
“내가 아직 그대를 좋아한다고, 고백 안 했어?”
아무 생각이 안 나는 와중에 홀린 듯 고개를 저었다.그가 여태 잡고 있는 손에 시선을 주더니, 깍지를 끼었다.
“비비안, 좋아해.”
눈을 휘며 미소 짓던 그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대 마음, 엄청 보고 싶은데.”
깍지 낀 손에 힘을 준 대공이 엄지로 내 손등을 문질렀다.
“…안 보고 싶기도 해.”
고개를 든 그가 나와 눈을 맞춘 채 처음 보는 연약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비안이 날 거부할까 봐, 겁이 나는 것 같아.”
심장이 너무 뛰어서 온몸이 저렸다.그가 자유로운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싼다.
손가락이 속눈썹에 닿는 바람에 파르르 떨려왔다.
“지금 보여줄 건가, 네 마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혹여 그가 손을 놓아버릴까 깍지 낀 손에 힘을 줬다.안 봐도 지금 내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 붉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할지.얼굴에 열이 오른 것이 너무 잘 느껴졌다.
그 열기 덕에 내뱉는 숨조차 뜨거웠으니까.끝내 미치도록 다디단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고개를 떨구자 대공의 웃음소리가 들렸다.그의 손이 내 귀를 설핏 쓸더니 멀어졌다.
“…다음엔 안 물어볼 거니까.”
깍지 낀 손에 힘을 줘 잡은 그가 아쉬운 듯 손을 놓았다.응접실을 나서는 대공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마자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이게 뭐야? 나 지금 살아 있는 거 맞나?더는 앉아 있을 힘도 없어 소파에 모로 누웠다.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터라 온기가 남아 있다.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조금 전의 상황을 되새겨본다.
내가 지금 뽀뽀를 한 것인가, 안 한 것인가.
느낌으로는 이미 두 번 정도 그의 입술과 접촉한 것 같은데!
“와아.”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심장께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해봐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다.
“…좋아해?”
분명 좋아한다고 했다.
“나를 좋아한대…….”
귓가에서 끊임없이
‘비비안, 좋아해.’
가 메아리쳤다.
‘비비안, 좋아해.
비비안, 좋아해.
좋아해.
좋…….’
나도 좋아하는데, 나도 널 좋아하고 있다! 생애 처음으로 받은 고백이었다.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나는 반복해서 기억을 돌렸다.
열 번을 떠올려도 열 번 다 마음이 요동쳐서 계속 흥분 상태였다.목욕을 마치고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순간에도, 그의 손이 닿았던 곳들을 더 유심히 보았다.
‘여기 만지고, 여기 만지고 여기도 만졌어.’
대공이 스친 곳들이 부끄러우면서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그렇게 그날, 복잡한 생각은 뒤로한 채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대공을 그렸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각하는 자고 있을까.
걔도 내 생각하느라 못 잘지도 몰라.’
어쩐지 발가락 끝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다.*내가 지금
‘좋아해.’
에 내내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비오첼라가 만남을 청하더군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전하는 스텔라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물론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오히려 그 돈에 환장한 이가 오래도 참았다 싶다.
“조만간 날을 잡죠.”
‘첫 만남에 다 드러내지는 않을 테고.’
나와 레사가 만든 벨리타 상단은 제국의 물품을 왕국에 납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돈은 워낙 많아서 이 일은 그저 상단 주인의 출신이 왕국이라 제 나라에 도리를 한다는 느낌의 설정이지.
“…약물을 왕국으로 납품하고 싶다고, 그리 접근해야겠어요.”
“하나 쉬이 드러내겠습니까.
사안이 사안인데.”
제 목이 달린 문제인데 제정신이라면 입을 다물어야겠지, 비오첼라도.
그러나 여태 살펴본 바로 영악하고 악랄하나 현명하지는 못한 치들이었다.
“영애, 본디 지나친 욕심은 이성도 마비시키는 법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내가 빙그레 웃자 무심한 표정의 스텔라가 느리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벨리타 상단의 주인을 왕국 출신으로 설정한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비오첼라가 제 진짜 거래 품목에 대해 밝히는 데 부담이 덜할 테지.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으음, 어찌 들키지 않고 그 일을 벌일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캐내고 싶네요.”
“그렇담 물건을 비오첼라 상단에 얹어서 같이 왕국으로 보내고 싶다, 청하는 건 어떨까요.”
‘역시.
언니, 진짜 너무 훌륭하다.’
우리는 참 서로에게 완벽한 협력자였다.
정말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이 조합, 기대된다.
이건 어떻게 해도 되는 조합이야.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한번 내 의견을 던질 때가 되었다.
‘괜히 긴장되네.
한 번 거절당해서 그런가.’
“그래서 말인데…….”
뜸 들이는 나를 스텔라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살핀다.
감도 좋지, 저 언니 진짜.
“제가 그 벨리타 상단의 주인이 되어볼까, 하고.”
나는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스텔라가 내 미소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아직도 그 생각, 안 버리셨습니까.”
아무래도 스텔라는 내가 단지 그 자리를 흥미 본위로 하고 싶어 한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내게는 다 사정이 있었다.우선 증거.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는 때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일을 벨리타 상단으로서 진행하는 것, 그게 내가 목표하는 지점이다.
‘이거면 충분하지.
내가 했다는 것도 숨길 수 있고.’
그리고 그 순간을 지휘할 수 있는 자.
양지에서 제 몸을 드러내고 비오첼라를 철저하게 도려내는 일을 맡아줄 힘과 뜻이 있는 사람.그건 내가 아니었다.굳이 내가 잡아낸 것으로 하고 싶지 않으니 내세울 이가 필요했다.
이 이상 공을 세울 필요도 없고, 이를 빌미로 얻고 싶은 것도 없고.오히려 이래저래 말 도는 것이 몹시 성가실 것 같으니까.
“…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하겠습니다.”
자신감과 진지함을 전달하고자 나는 자세를 정돈하고 눈을 부릅떠봤다.그거 내가 해야 해.
그래야 그 사람을 앞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 같거든.마주한 스텔라의 눈빛에 얼핏 짜증과 혐오가 보인 것은 내 착각이길 바란다.
“하아, 그럼 어디 잘하실 수 있는지 보지요.”
그렇게 시작된 연기 수업은 처참했다.
나는 내가 정말 이 부분만큼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시작할 때만 해도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얼마나 마음이 평온했던가.
나는 이 시험 아닌 시험을 훌륭히 해내 당당히 상단주 자리를 얻어낼 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영애,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으로 하죠.”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스텔라를 만류했다.
“…시간 주시면 할 수 있어요.”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널려진 서류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벨리타 상단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은 하루면 습득 가능해.
“그럼, 다시 해보죠.”
문제는.
“벨리타 상, 단의 벨리, 타, 라고 합니다.”
잔뜩 찡그린 표정의 스텔라와 마리가 나의 기를 꺾는다.그랬다.
저 한 문장 내뱉는데, 누가 봐도 이상하리만치 정상적인 발성이 아니다.나도 내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연기를 못 하는 줄 몰랐다.아니, 나 10년 넘게 연기해 온 사람인데!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상황이야?아픈 연기만 되는 거였나?아니지, 저번에도 내가 연약한 척 연기하면 대공이 그렇게 웃던데…….
‘설마, 나 연기 못 하나?’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하자 혼란스러웠다.
당황한 나머지 아까부터 들이켠 물잔의 수가 열 잔을 넘어간다.
“…굳이 영애가 직접 하려는 이유가 뭘까요?”
스텔라가 입만 웃으며 물었다.
‘얘, 지금 말하는 데 이 악문 거 아니야?’
참다, 참다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내리누른 것이 느껴졌다.나도 단순히 객기로 고집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말할 수 없지만, 이 계획에 난 한 사람을 더 끼워 넣었다고!디에고 브라이트 대공, 비오첼라를 쥐 잡듯이 잡아줄 이로 나는 그를 선택했다.그런데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을 장기 말로 쓰고자 하면서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 않겠나.후작 영애 지위로도 그를 수하 부리듯 하기엔 손이 벌벌 떨리는데.
‘그 일을 이름 모를 누구에게 어떻게 맡기겠냐고.’
“하아…….”
그것 봐라, 라며 포기를 재촉하는 팔짱 낀 스텔라가 보인다.
그 곁에 내 눈을 피하며 이건 아니라는 뜻을 전하는 마리도 보였다.
‘둘의 뜻이 같아 보이네.’
내가 봐도 이쯤에서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그저 철부지 아이가 고집부리는 것밖에는 안 될 것 같다.
“…대공을 수하로 두고 싶어서요.”
어쩔 수 없이 진실을 말하자니 웅얼웅얼 얼버무리게 된다.
누가 들을까 무서운 발언이라 윈데이너 저택인데도 불구하고 눈치를 봤다.
“네?”
역시나 알아듣지 못한 스텔라가 미간을 좁히며 귀를 내밀었다.
“디에고 브라이트 대공을 벨리타 상단주의 수하로 부려먹으려고요!”
눈 질끈 감고 소리치자 잠시간 정적이 응접실을 메웠다.
“아하.”
뒤이어 청명한 스텔라의
‘아하.’
가 종소리처럼 메아리쳤다.
‘과연 내가 정말 대공을 이 일에 끌어들일 수 있을까.’
내 연기를 볼 때와는 다르게 만족한 듯 상큼한 미소를 띤 스텔라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