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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27화 (27/109)
  • 27화

    *

    - 리안 전하, 엄마가 그러는데 전하는 힘들고 외로운 거래요.

    그래서 제가 친구가 되어주려구요!통통한 볼을 흔들며 척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던 어린 비비안.어쩌면 이때부터였는지 모른다.

    - 전하, 세상은 불공평해요.

    확실해.

    아니면 내게 이럴 수 없어.데뷔탕트 이후 기대에 차 참여한 첫 연회에서 아무도 제게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며 볼을 부풀리며 투정하던 소녀 비비안.

    - 전하, 윈데이너가 딱 뒤에 버티고 있어요.

    저희 돈 좀 많은 거 아시죠?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자신의 개인 금고에 든 금은보화를 제국을 위해 쓰던 비비안.언제나 좋은 황태자라며 나를 칭찬하던 너는 모르겠지.사실 제국을 위해 일하는 나는 그리 순수하고 위대한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으니까.그래도 네가 내가 이룬 것들을 보며 눈을 빛내주어서, 그런 내게 환하게 미소 지어주었으니까.나는 그 미소가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너는 내게 제국밖에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네가 있기에 제국이 좋았다.집무실에 앉아 있던 리안이 멍하니 방을 돌아본다.오후 햇살이 가득 찬 이곳에 몇 번이고 들러준 비비안.그나마 이 삭막한 곳이 싫지만은 않은 건 네가 머문 흔적 덕분이었다.그녀가 주로 앉는 소파를 보면, 지난날 머물렀던 비비안의 모습이 연이어 떠오른다.그렇게 자주 나는 너를 그리며 휴식을 취했다.어느 바람이 좋은 날, 창가에 서 한참 밖을 구경하던 열여덟 살의 비비안에게선 신비함까지 느껴지곤 했다.그리고 이윽고 며칠 전 푸른 드레스를 입고 온 비비안에게 여태 느껴보지 못한 향기가 났다.그 낯섦이 두려웠다.네가 대공을 만난 이후부터 내가 모르는 사람이 돼가는 것 같아서.내가 없는 곳에서 그와 함께 있을 너를 생각하면 때때로 막막했다.대공이 거침없이 너에게 달려갈 때마다 텅 빈 제 손을 바라보며 메말라가는 저를 느꼈다.이내 리안이 이마에 양손을 댄 채 고개를 숙였다.나는 그날 네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것일까.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느냐고.그 사람이 디에고 브라이트냐고.이제 내게 더 이상 기회는 없는 것이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것일까.제가 황태자이기 때문에, 비비안이 황태자비 자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앞세워 애써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그녀를 위한 것이라 스스로 믿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비비안은 날 사랑하지 않아.’

    일찍이 그 사실을 알고도 희망을 꿈꿨다.

    그래도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저를 바라봐 주는 그런 날도 오지 않을까.그러나 그녀가 저를 좋아만 해줬다면, 그랬다면 그래도 나는 고백하지 않았을까.고개를 젖힌 리안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비비안의 눈에 저와 같은 애정이, 욕망이 비쳤다면 아마 단 하루도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자업자득이군.”

    커져가던 마음이 더 이상 그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어졌을 때, 이미 자신은 비비안에게 속해 있었다.눈앞에 없어도 너를 그리는 것이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데.네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아해 주는 것만으로 나는 괜찮을 것 같았는데.

    “차라리 아무도 좋아하지 말지.”

    이런 추악한 것이 실은 제 진실이었다.팔을 들어 눈가를 가린 그가 한참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내가 너를 포기할 수 있을까.너 없이 내 세상이 온전할 수나 있나, 불안했다.

    “…비비안, 조금만 천천히 가줘.”

    아직은.그래, 아직은 제게도 기회가 남아 있을 것이다.리안의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하나 천천히 드러나는 눈동자에는 강렬한 열망이 가득했다.*감상에 취해 대공령에 내려간 그가 보고 싶다고 말했던 자신은 생각이 없는 바보였다.막상 상점가에서 우연히 대공을 마주치고 어찌나 놀랐는지.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면 어떡하지?”

    “아가씨가 말씀하지 않으시면 어찌 아시겠어요?”

    양손을 깍지 낀 채로 머리를 대고 있던 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돌덩이가 내 어깨를 내리누르는 것만 같다.

    ‘…마리, 내가 생각만 하면 끝이야.’

    그랬다.

    내가 그를 보고 무심코

    ‘좋아해!’

    하고 생각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참담한 상황이다.아직 고백할 생각 같은 거 없는데.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처음치고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았다.안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번도 내가 대공을 만나고 싶어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그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자였다.한참을 고민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정말,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이것 말고는 없었다.그 뒤로 나는 혼자 숨바꼭질과 술래잡기가 혼용된 전쟁 같은 짝사랑을 시작했다.

    피할 대로 피하면서 막상 그를 만나면 누구보다 빠르게 그에게 다가가 밀착하는, 눈물겨운 사투였다.

    “어? 아가씨, 저기 들어오시는 분 각하 아니신가요?”

    새로 나온 케이크 좀 먹어보러 나온 상점에서 대공 경보가 울린다.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냅다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놓고 문가를 노려봤다.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간 난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팔을 찔렀다.

    “…비비안?”

    “각하, 안녕하세요.

    어차피 제 테이블에 착석하실 거죠?”

    케이크 먹지도 않으면서 여기 온 이유, 하나다.

    내 뒤를 또! 또! 밟은 거겠지.의아한 듯 눈동자를 굴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손가락에 온 집중을 다해 그의 움직임을 따라갔다.의자까지 당겨 대공 가까이 앉은 나는 행여나 손가락이 그의 팔에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그와 눈을 맞췄다.

    “새로운 취미?”

    “…이래야 제 마음이 각하께 안 보이죠.”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나도 다 사정이 있어.

    나한테도 이게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인 줄 아니?

    ‘첫 좋아함인데.’

    가끔 나도 모르게

    ‘사랑’

    이라 내뱉기도 하지만, 그냥

    ‘좋아함’

    에서 타협보고 싶은 그런 내 오기다.

    “알았어.

    어차피 비비안 마음 안 봐야 하는 거면, 그대를 쳐다보지 않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좋아.”

    저런 말에 내가 이렇게 기뻐한다는 것을 네게 들키고 싶지 않다.

    대공의 팔에 닿아 있는 손가락이 지금 내 온몸의 신경을 합친 것보다 예민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직은 네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음.”

    “뭐 고민하세요?”

    “…비비안이 지금 무슨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입가를 손으로 가린 그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그러고 보니 그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을 잘도 눈앞에 들이댔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정색하고 부정해도 결국 대공과 헤어지고 돌아갈 때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늘 내가 갖고 싶고, 먹고 싶었던 것들이.

    “각하, 그동안 고민 같은 거 없었겠어요.”

    “뭐, 이런 거로 이렇게 심각했던 적은 없었지.

    그래서 어떤 케이크가 먹고 싶어, 비비안?”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산뜻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

    ‘쯧, 쓸데없이 잘생겨서.’

    “각하 드시고 싶은 것 드세요.”

    눈이 진중했다.

    케이크 하나 고르는 데 누가 보면 제국의 중대 사항 결정하는 줄 알겠다.

    “그럼 종류별로 하나씩 하지.”

    “…다 드실 수 있으세요?”

    “나 말고 그대가 먹을 건데.”

    그래, 그렇구나.

    너는 마음이 보일 때나 안 보일 때나 고민하는 법이 없구나.

    결국 결정은 내가 한다.

    “…초코케이크로 해요, 그냥.”

    요망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은 대공이 주문을 마쳤다.

    그의 옆에서 먹는 케이크는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달았다.*그때 먹은 케이크의 달달함이 입 안에서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대공이 또 우리 집 응접실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일까.잠시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니 툭하면 어디선가 튀어나와 내게 식은땀을 선사한 지난날이 머릿속을 스친다.계속되는 이 고난 같지 않은 고난.그리고 그만큼 내 정신은 고갈되어 이제 이 지경까지 와버렸다.

    “잠깐 손 좀.”

    척 손바닥을 대공의 앞에 들이밀었다.처음에는 간신히 손가락 끝만 그에게 닿아도 정신이 혼미했으나 이젠 그렇지도 않았다.

    대공이 언제, 어디서든 내 시야에 잡히면 쏜살같이 달려가 그를 붙드는 일은, 이제 나 혼자만의 싸움 같은 것이었다.그러다 보니 신체적 접촉이 어느새 설렘보다는 안도감을 주는 지경.

    “…비비안, 너무 감정이 없는 것 같은데.”

    부루퉁하게 말을 내뱉는 대공의 표정이 오묘했다.

    혼란과 이건 아니라는 직감이 혼재된 그런 얼굴이었다.그리고 고요하던 내 마음의 평정이 깨졌다.감정? 가암저엉? 지금 감정이라고 했니.제가 지금 이러는 것이 좋아하는 이 감정 숨겨본다고 이러는 것을.

    ‘네가 알 턱이 있나.’

    “각하, 각하는 숨 쉬는 일에 감정 실어서 하세요?”

    남들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이렇게 전쟁 같은 일일까.

    아니겠지.

    지금 나만 이런 거지?

    ‘정말 나한테만 그런 거야?’

    “아니, 설마 지금 나랑 손잡는 게 그런 수준이라는 건가?”

    화들짝 놀란 대공의 눈이 전에 없이 확장되었다.

    그걸 보니 서러움에 복받쳐 오르던 감정이 차분해졌다.너만 모르는 나의 생존기.

    “예, 제겐 그저 생존의 문제라서요.”

    대공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린다.

    “저기, 비비안.”

    소파에 등을 기댄 그가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한쪽 손은 가지런히 내 손 위에 올려놓은 채.낮게 숨을 내뱉은 그가 손등 아래 틈으로 곁눈질을 한다.

    그게 또 참 야했다.

    “그러면 곤란해.”

    그가 예의 그 요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네 손끝만 닿아도 정신 차리기 힘든데.”

    그래, 저 눈빛이 나오면 꼭 이렇게 나를 죄 흔드는 발언을 하곤 했다.

    “그대가 그리 쉽게 내게 손을 뻗으면, 나도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장담 못 해.”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그가 한 자, 한 자 씹어 내뱉었다.

    그리고 내 손을 감싼 손에 힘을 줘 천천히 제게 당긴다.소파 등받이에 기댄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나와 대공의 시선이 일직선으로 맞닿았다.숨소리가 들리는 지척에서 그의 입이 열렸다.

    이윽고 한없이 낮고 탁한 음성이 나를 뒤흔든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네게 닿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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