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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26화 (26/109)
  • 26화

    *상점가 거리를 걷던 비비안의 옆으로 얼굴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악!”

    놀란 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가 크게 숨을 내쉰다.

    “…각하?”

    아직 몸을 일으키지 않은 덕에 대공의 얼굴이 비비안과 맞닿을 듯 향해 있었다.스르륵 흘러내린 그의 앞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다.

    “머리.”

    인상을 찌푸린 비비안이 대공의 앞머리를 헤집었다.

    “겨울에 이러고 다니면 감기 걸려요, 각하.”

    손으로 탈탈탈 앞머리를 터는 비비안의 얼굴이 심각했다.당황한 디에고의 몸이 움찔하며 경직됐으나 이윽고 비비안의 손이 닿기 편하게 상체를 숙인 그의 얼굴이 나른하게 풀려 있다.

    “…기분 좋아.”

    노곤한 디에고의 속삭임에 비비안의 손이 멈칫한다.

    ‘미쳤나 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순식간에 혼란이 찾아온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린다.

    ‘아니야, 우선 닿아 있어야 해.’

    제 마음을 인정한 이후 처음 그를 마주한다는 것을 상기한 비비안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와, 이건 절대.

    절대 들키면 안 된다.’

    “…각하, 언제 오셨어요?”

    여전히 그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는 비비안이 어색하게 물었다.

    흡사 이제 막 글을 뗀 아이가 책을 읽는 듯 딱딱하기 그지없었다.나른히 풀려 바닥을 향해 있던 디에고의 눈이 들어 올려진다.

    ‘왜? 뭔데 이렇게, 눈이 야한 거야.’

    마음이 들킬까 비비안의 손이 야무지게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혹여 머리카락만으로는 안 될까 싶어 이마에 손바닥 일부를 대는 것도 잊지 않는 치밀함을 발휘했다.

    “방금.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긴요.

    각하 앞머리 데워주고 있는 거예요.”

    한쪽 입꼬리가 유독 더 위를 향한 채 웃는 비비안을 디에고가 빤히 바라봤다.

    “거짓말.”

    그 올곧은 눈을 마주하지 못한 비비안이 슬쩍 눈길을 피했다.

    “마음 보이기 싫어?”

    그걸 누가 좋아할까 싶어 억울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가 상처 입지는 않을까, 말을 고르는 비비안이었다.

    “…싫다기보다 부끄러운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닌가 싶었지만, 비비안이 그렇다면 그런 거로 해두지 싶은 디에고가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이러면 걸을 수가 없으니까.”

    디에고의 커다란 손이 비비안의 손 근처로 향했다.그의 검지가 비비안의 검지에 닿는다.

    그렇게 허락을 구하듯 그의 손가락이 비비안의 손을 느리게 쓸었다.그 야릇한 접촉을 온전히 느끼던 그녀의 손가락이 움찔한다.그리고 이내 울상을 지은 비비안이 움켜쥐었던 디에고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눈을 휘며 몸을 일으키는 디에고가 비비안의 손을 감싸 쥐었다.*

    - 비비안이 그대에게 나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면 뭐든 들어도 좋아.

    오히려 털어놓을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것도 좋겠어.그 음험한 인간.딱 봐도 고민이 많아 보이는 비비안이 스텔라 맞은편에 자리했다.

    “스텔라, 이건 진짜 만약에 말인데.

    누군가가 영애의 마음을 읽는다면 어떨까요?”

    누가 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비비안의 말에 스텔라가 한숨을 꾹 참은 채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아, 어.

    그러니까.

    사람 마음을 읽는 사람이 있다고 치고, 그런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요?”

    방황하는 동공,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대는 손가락.

    잔뜩 긴장해 힘이 들어간 듯 보이는 어깨.그러니까, 대공이 사람 마음을 읽는데.

    이 맑디맑아 보이는 영애가 그 음흉한 인간을 좋아한다, 이건가.

    지금?스텔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딱 봐도 이 이상 이들에게 엮이고 싶지 않은데.

    그녀가 눈을 들어 제 앞에서 포로로, 한숨을 내쉬는 비비안을 봤다.

    ‘어쩌다가.’

    언젠가 한 번 스치듯 본 기억이 난다.

    황가에 인간을 꿰뚫어보는 이가 종종 태어난다는 오래된 문헌.

    ‘그냥 좀 머리 좋은 자가 태어나면 칭송했나 보다 싶었는데.’

    제 이마를 손으로 한 번 쓴 스텔라가 무심하게 입을 연다.

    “대공 각하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라면 해도 좋아요.”

    더 커질 수 없을 것 같던 비비안의 눈이 확장되고 입까지 벌린 모습을 본 스텔라가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레사잖아요.”

    ‘레사, 세상에.

    대체 뭐 하는 곳이지, 거기?’

    레사는 무슨, 그저 제가 좋아하는 이가 혼자 고민을 끌어안는 것조차 볼 수 없던 그 남자의 술수였다.

    “그래서 지금 영애가 각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중이었나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비비안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런 이야기 아닌데.”

    “예, 아니면 말고요.”

    아쉽다는 듯 애타는 시선을 보내오는 저 작은 짐승 같은 이를 보자 그녀의 한숨이 짙어졌다.제 보기에 대공은 맹수, 야수, 짐승이었다.딱했다.

    지금 비비안은 그게 어떤 짐승의 아가리인 줄도 모르고 들어가려 하고 있다니.

    ‘이대로 둬도 되는 것일까.’

    어쩐지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는 스텔라였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해요.”

    들어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테니까.이후 반짝이는 눈을 한 토끼 한 마리가 재잘대는 오후는 참 평화로웠다.

    ‘비록 그 사랑, 전혀 응원할 마음은 안 들지만.’

    스텔라가 비비안의 분홍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에 시선을 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처음 제가 황태자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땐 이미 비비안이 리안의 곁에 있을 때였다.그리고 자신은 언제나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알았다.그가 누구를 얼마나, 어떤 마음으로 연모하고 있는지.그 상대가 과연 그의 그런 마음을 받아도 될 만한 사람인지, 오만하게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그리고 비비안 윈데이너는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다.오히려 어째서 황태자의 마음에 응해주지 않을까, 그가 이렇게나 너를 원하는데.눈앞의 그대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인데.두 사람이 함께 웃는 것을 보아도 좋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둘에게서 흠을 찾아볼 수 없었다.세상사, 사람 마음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 그 오랜 세월 사랑받았던 비비안은 이제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스텔라, 다음에 봄이 오면 같이 숲에 가지 않을래요? 후작가 숲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가 있는데.”

    환하게 웃는 비비안을 보자 아무래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스텔라였다.

    “그럴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를 때 퍽 다정해서, 이제 그녀는 지금이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슬슬 비오첼라를 움직여볼까 하는데, 어때요?”

    맹랑한 토끼가 저와 함께 나아가려는 길이 어떤 길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안 그래도 그쪽도 탐색은 얼추 끝나가는 것 같더군요.”

    벨리타 상단에 대해 다섯 군데가 넘는 정보상에 의뢰를 하던 비오첼라는 각기 다른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그 내용은 다 달라도 결국 도출되는 결과는 하나.

    ‘벨리타 상단은 말도 안 되게 많은 돈을 소유했으나 그다지 영리하지 않다.’

    “처음에는 정상적인 상단으로서 접촉해 오겠지요.”

    아무 감정 없는 비비안의 목소리에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하게.

    아마 왕국에 물건을 납품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들어 만나고자 할 겁니다.”

    이윽고 미간을 찌푸린 스텔라가 눈을 치켜들어 비비안을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영애가 하시렵니까.

    그럴 이유가 그다지 없는 것 같은데.”

    곧이어 마주친 눈동자를 보며 그럴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한 스텔라가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모았지?”

    빛이 들지 않는 축축함과 깊은 지하 특유의 냄새로 가득한 계단을 내려가던 청년이 물었다.

    “이제 일곱입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움직여.”

    혀를 찬 그가 쇠창살 안쪽에 시선을 주며 조소했다.

    “금발, 너 참 곱다.”

    그의 말에 한쪽에서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고 있던 여자의 몸이 움찔, 떨린다.

    “찾느라 애먹었는데 보람이 있네.”

    눈앞의 금발은 비록 금안은 갖지 못했지만 꽤 준수했다.

    원래 노리고 있던 영애가 뜻밖의 이유로 좀처럼 손에 떨어지지 않아 간신히 하나 주워온 패.

    “값을 두둑이 받아야겠어.

    생각보다 희귀한 편에 속하더라고, 네가 가진 색 말이야.”

    만족스러운 듯 상품을 평한 남자가 내려온 계단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오르고 올라 밀어낸 벽 너머로 호화로운 풍경이 비친다.그가 자연스럽게 소파로 가 앉은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오라버니! 이번 연회에 정말 데이비드 후작님이 오시는 거 맞아요?”

    잔뜩 들뜬 제 여동생의 물음에 부드러이 미소 지은 그가 말을 이었다.

    “글쎄.

    초대장은 보냈다만 모르겠구나.

    그보다 대공이 좋다 할 때는 언제고?”

    한숨을 쉰 그녀가 소파에 몸을 묻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윈데이너 영애랑 소문이 자자한데, 필요 없어요.

    흥!”

    황태자 전하가 좋아질 때 비비안 윈데이너가 그의 짝으로 거론되어 포기했다.

    시간이 지나 좀 쌀쌀맞아 보이긴 해도 그를 뛰어넘는 외모와 작위가 끌려 대공을 흠모하던 차, 이번에도 또 그녀가 제 앞을 막아선다.

    “다들 뭐가 좋다고 그렇게 걔한테 목을 매는지!”

    잔뜩 분해하던 그녀가 한동안 투정을 늘어놓고 돌아가자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던 남자의 분위기가 바뀐다.비오첼라 백작가의 장남, 레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생긴 거하고 다르게 취미 한번 고약하단 말이야.”

    - 분홍색 머리, 가진 계집 찾아봐.그는 며칠 전 대화를 나누었던 알렌 데이비드를 떠올렸다.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처럼 유순한 후작이 뒤로는 이런 주문이나 하고 있다는 것에 레오 비오첼라가 고개를 저었다.무표정한 얼굴에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눈을 번들거리던 후작.

    “분홍 머리라.”

    백작이라는 작위를 갖췄으면서도 그만한 재력을 쌓지 못했던 그들이 발견한 한 줄기 빛.그 흔한 염문설 하나 없이 깨끗하고 고고한 황가 덕에 그 아래 귀족들 또한 너 나 할 것 없이 눈치를 보며 윤리를 따졌다.하나 언제, 어디서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강한 빛은 짙은 어둠을 의미하기도 하는 법.타고난 잔혹성과 탐욕을 표출할 길 없어 억눌려진 자들의 갈증은 실로 대단했다.그 틈을 이용한 것이 그들, 비오첼라였다.도박, 약물.

    이 두 가지를 통해 그들은 1년 치 백작가의 풍요로운 생활을 얻어내곤 했다.그러나 진짜는 그게 아니었다.

    “그도 그렇지.

    자기들 구미에 맞게 이런 거, 저런 거 색깔 맞춰주랴.

    크기 맞춰주랴.”

    코웃음을 친 레오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분홍 머리의 그녀를 떠올렸다.

    - 비비안 윈데이너.

    그녀를 닮았다면 값의 두 배를 쳐주지.광기에 물든 후작의 표정에서 애정 따위가 느껴질 리 없으니, 조만간 그의 손에 떨어질 노예의 앞날이 안 봐도 빤히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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