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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25화 (25/109)
  • 25화

    *

    “디에고가?”

    황제궁의 정원에서 황제 내외의 티타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래 사교계를 들썩이게 하는 제 예비 며느리에 대한 소문이 퍽 궁금하던 황제다.

    “예, 디에고가 그 아이에게 마음을 주었더군요.”

    “허허, 그것참.

    그럼 우리 리안은? 비비안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황제의 물음에 제피아가 무심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글쎄요.

    저들이 알아서 할 일이죠.”

    늙은이들이 끼어들 자리는 아닌 것 같더군요.

    “왜요? 외척의 힘이 필요할 만큼 힘드신가요?”

    가벼이 웃으며 말을 건네는 제피아를 향해 황제가 피식 웃었다.

    “로렌스는 그리 형편없지 않다오, 제피아.”

    빙긋이 웃은 황제의 미간에 곧이어 주름이 졌다.

    사실 제가 탐하는 것은 윈데이너 후작가가 아닌 비비안인 것을.비비안 윈데이너는 제 아비를 닮아 곧았다.칭호만 가져가지 않았을 뿐 지난 10년간 비비안은 황태자비의 의무를 누구보다 훌륭하게 해냈다.제국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후작가로서 금전적, 정치적 지지를 잊지 않고 행해 황가를 지탱했다.

    더불어 따로 가문의 이름을 대지 않고 툭하면 제 개인 금고를 열어 후원을 하던 아이.황가의 눈과 귀가 되어 귀족들의 입을 은연중에 단속했으며 이 모든 행동을 그녀는 몰래, 뒤에서, 숨어서 한다고 했지만 다 가려지기엔 너무 많이 했다.그러니 비비안은 제 연기 덕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녀의 사기극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저렇게까지 하는데? 저건 황후를 노리지 않으면 다 할 수 없는 일이라 평했기 때문이다.

    “아까운데 말이야.”

    얼굴을 찌푸리며 찻잔을 드는 황제에게 제피아의 시선이 닿았다.

    “뭘, 어찌하실 생각이신가요.”

    차 한 모금을 입에 담은 황제가 지난날을 회상했다.아직 자신이 어렸을 적, 황자의 지위도 간신히 얻은 그때.제 어미의 핍박을 피해 구석에 숨어 있던 저를 찾아내 손을 내밀던 제 하나뿐인 형님.

    - 내가 너를 살려주마.저와 다르게 정식 황후 소생인 그는 날 때부터 고귀했다.

    - 그러니 살기 위해서 잘못된 길을 가지 않겠다고, 나랑 약조할 수 있겠느냐.고개를 끄덕이는 어린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주었던 소년.

    - 그래.

    내가 있는 한 너는 네 미래를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황제는 처음으로 알게 된 그 손의 따듯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그때의 온기가 여태 머무는 것처럼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다 컸구려, 애들이.

    싸우더라도 화해하면 되지 않겠소.”

    그제야 황제와 닮은 미소를 지은 제피아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는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진지하게 고심하는 듯한 황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 내어주는 쪽이 얻게 되겠지.”

    본디 여인의 마음은 그리 얻는 것이 아니겠소.*

    “전하, 머리가 많이 자라셨네요?”

    리안의 맞은편에 앉은 비비안이 제 손으로 이마를 톡톡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손짓에 따라 황태자가 손으로 제 앞머리를 만진다.

    “언제 이렇게 자랐지.”

    눈썹을 넘어 눈꺼풀 위에서 살랑거리는 금실이 보기만 해도 보드라웠다.

    “요새 유독 바쁘신 것 같던데.”

    “아, 응.

    좀 주시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황태자의 웃는 얼굴에 미처 지우지 못한 피곤이 서려 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어요?”

    ‘이래 봬도 귀족으로 스무 해 넘게 무사히 살아온 사람이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아무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말해보라는 듯 비비안이 재촉하자 리안이 고개를 숙이고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비비안, 도움이라면 이미 받고 있어.”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네가 와준 덕에 지금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중이거든.”

    분명 장난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비비안 덕에 손에서 서류를 내려놓을 수 있었으니까.

    “폐하가 전하를 너무 일만 시키시는 거 아니에요?”

    과장되게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낀 그녀가 말하자 리안의 입매가 한층 더 부드러이 올라간다.

    “비비안이 나 대신 폐하께 가서 따져주겠어?”

    황태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제 뒤편의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비비안의 얼굴을 밝혔다.

    그 모습이 또 무척 인상적이라서 잊지 않기 위해, 눈을 깜빡이는 일조차 쉬이 하지 못하는 리안이었다.

    “아무래도 폐하는 나보다 그대를 더 반기는 것 같던데.”

    비비안의 시답잖은 말을 단 한 번도 그냥 넘기지 않고 꼬박꼬박 답해주는 황태자는 지나치게 성실한 사람이었다.차라리 덜된 인간이었다면 보다 일찍이 도망갔을 거란 생각을 하며 비비안이 작게 혀를 찼다.

    “폐하는 이미 뵙고 왔는걸요.”

    황제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내칠 만한 방법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비겁하고 더러운 행동으로 황가를 등지기만 하면 되겠지.

    ‘내가 나로 살기를 포기하면 되는 건데, 도저히 비위가 상해서 못 한 게 화근이었나.’

    비비안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테이블을 향했던 그녀의 시선이 곧이어 세상 선해 보이는 황태자의 얼굴로 옮겨간다.황가의 곁에서, 그러니까 리안 로렌스의 옆을 지키다 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다.그가 얼마나 이 제국을 아끼고 위하는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배신해?’

    “전하는 어떤 제국을 만들고 싶으신 거예요?”

    뜬금없는 질문에도 차분히 비비안과 눈을 맞춘 황태자의 얼굴에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려 있다.

    “…비비안이 원하는 제국.”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입을 헤벌린 채 긴 속눈썹을 팔랑였다.

    ‘어, 음.

    나? 아니, 이거 뭐지? 도리어 신하를 시험하는 상관의 역질문인 건가.

    나는 단지 황태자의 이상에 맞춰 일을 도모하려 했을 뿐인데.’

    비비안의 당황이 전해진 것인지 리안이 고개를 돌리고 웃기 시작했다.

    “…제국민이 원하는 제국, 이란 뜻이었어.”

    ‘…저기요? 그걸 그렇게 표현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오해했잖아요.’

    샐쭉 리안을 곁눈질한 비비안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자연스레 찻잔을 붙든 하얀 손에 설핏 눈길을 준 황태자가 긴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비비안,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을 느끼지 못한 비비안이 쿠키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럼요.”

    그녀의 명랑한 고갯짓을 확인하고도 황태자가 망설이듯 뜸을 들였다.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지 않은 채 그의 입이 열린다.

    “…혹시.”

    한참을 망설이던 리안이 고개를 들어 비비안과 눈을 맞춘다.정말 좋아하는 비비안의 눈동자, 그 안에 제가 담길 때면 어김없이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너를 보는 눈과, 네가 나를 보는 눈이 다름을 알게 된 것이.’

    “…전하?”

    결국, 고개를 저으며 눈을 휘는 리안이다.

    이미 답을 알면서 물어보기에는 아직 용기가 없었다.

    “아니야.

    그냥 봄이 오면 같이 산책이나 하면 어떨까 하고.”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던 비비안이 이윽고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때도 제가 전하를 서류 더미에서 구해 드리겠어요.”

    이내 건강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 비비안을 행복한 표정으로 한참, 이 시간이 영원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리안이 바라보았다.*비비안과 리안이 나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황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도 경계의 숲.흙먼지를 휘날리며 봄 산책까지 기다릴 수 없는 남자가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기다리자.’

    라고 말한 지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며칠이 걸리는 여정을 기어이 나선 대공이 산뜻하게 말에서 내렸다.

    “…각하, 제대로 된 숙소에서 묵지 않고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이랍니까.”

    대공령을 떠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콘라드의 행색이 집 떠난 지 반년은 된 듯했다.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콘라드.”

    “근래 서류만 보느라 몸도 굳은 것 같던데.”

    라고 덧붙이는 그 무심한 어조에 콘라드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힘을 주지 않으면 다 큰 청년이 커다란 사내 앞에서 눈물을 보일 것 같았다.

    “거의 다 오지 않았습니까.

    이 숲만 지나면 수도인 것을.”

    좀 전에 지나온 마을에서 하룻밤 묵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굳이 달리고 달려 끝내 숲에서 밤을 지새우다니.

    “…거의 다 왔으니까.”

    아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숲 너머를 바라보던 대공은 스스로가 우스워 실소했다.이 너머에 비비안이 있다고 생각하니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이래서 어릴 때 놀아야 한다니까.”

    첫사랑을 앓아도 된통 앓고 있는 제 상관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콘라드였다.그리고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콘라드를 관통했다.

    ‘그런데 각하, 영애랑 만나는 사이인 것은 맞나?’

    급격히 불안감이 치고 들어왔다.

    저자는 지금 거의 미쳐 있는 상태인데 아무리 지난날을 돌이켜보아도 영애가 각하께 마음이 있다고 확신할 만한 순간이 없었다.마음이 무거워졌다.

    제 상관의 처음 보는 모습이 인간적으로는 축하할 만한 변화인데, 콘라드 개인에게는 벅찼다.

    ‘부디 영애가 각하를 받아줘야 할 텐데.’

    수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우수에 찬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콘라드의 얼굴이 착잡했다.

    ‘아, 진짜 차이면 난리 나겠는데.’

    채 빛이 다 들지도 못한 새벽녘, 잠을 자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디에고가 말에 올라탔다.재촉 아닌 재촉을 하는 제 상관에 못 이겨 눈을 비비던 콘라드도 말에 몸을 맡긴다.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할 때, 수도에 들어선 둘의 나아가는 방향이 갈렸다.

    “각하? 지금 어디 가세요?”

    거기는 대공저 방향이 아닙니다만.

    “…비비안.”

    이젠 진짜 질린다는 듯 경악한 표정의 콘라드가 디에고의 앞을 막아섰다.

    치솟는 한숨을 삼키고 최대한 진지하게 디에고를 설득하기 시작한 콘라드였다.

    ‘한 달.

    한 달, 기억하자.

    한 달을 넘기면 큰일 나는 거야.’

    “우선 대공저로 가셨다가 영애를 만나러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각하, 씻지도 않았잖아요.

    “아.”

    이어진 콘라드의 잔소리에 디에고의 멍한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미간을 찌푸린 그가 순순히 방향을 틀었다.

    같은 수도 안에 비비안이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비비안.’

    기다리는 것은 제 성미에 맞지 않는 듯했다.

    비비안이 정말로 제게 꺼지라고 하지 않는 이상, 언제고 그녀에게 향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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