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대공령은 어때?”
한 번도 가본 적 없을뿐더러 그에 대해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대공령이요?”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가 멈췄던 손을 움직여 다시 머리를 빗겼다.
“전에 다녀온 사람 말로는 산맥이 많다고 했어요.”
산맥, 산맥이라.
대공의 뒤로 크고 험준한 산맥이 배경으로 떠올랐다.
“그렇구나.”
“워낙 넓어서 가는 곳에 따라 분위기가 좀 다르기도 하고,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하던데.”
“오, 눈이 많이 내려?”
나는 새하얀 눈이 내리는 설원에 선 대공을 떠올렸다.
눈과 대비되는 그의 흑발과 하늘과 바다색을 담은 푸른 눈이 조화로웠다.
‘와씨, 상상 속에서까지 이렇게 잘생길 일이야?’
“마리는 대공령 궁금하지 않아?”
멈칫한 그녀가 이내 빗을 든 채로 나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말씀만 하세요.
아가씨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요.”
“지금 가자는 건 아니지만, 든든하네.”
언젠가 한번 가볼까.
특히 설원이 궁금했다.요즘 내 사고는 흐르다 보면 도착하는 곳이 정해져 있다.
- 내가 이렇게 널 만져도 네가 웃어주는 사이.대공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내내 울리는 것만 같다.그래, 그가 날 만져도 웃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니, 우선 어디를 어떻게 만지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 그리고 네가 날 어루만져 주는 그런 관계.…이게 어렵다.나는 마리가 기껏 빗겨준 머리가 아깝게 소파에 드러누웠다.
“…나, 대공 좋아하나 봐.”
중얼거리듯 소심하게 말하자 맞은편 소파가 소란하다.
당황한 마리가 들고 있던 빗이며 장신구를 떨어뜨린 채 얼어 있었다.
“네에에에?”
“…언제는 둘 중에 하나 고르라더니.
왜 그렇게 놀라?”
괜히 머쓱해서 투덜대자 마리가 벌떡 일어나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 아가씨.
진심이세요? 진짜 제가 아는 그 브라이트 대공? 맞아요?”
마리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채 나를 다그쳤다.
“봐봐, 마리.
요 근래의 나를 좀 돌아봐.”
나는 몸을 일으켜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해성사를 하듯 말을 쏟아냈다.잠잘 때 빼고는 대공 생각이야.
창피해서 말 안 했는데 심지어 가끔 꿈도 꾸는 것 같아.내가 대공 만나는 거 못 봤지? 얼마나 내가 그 앞에서 삐거덕대는 줄 아니? 누가 보면 내 얼굴색이 원래 붉은색인 줄 알 거야.내가 진짜!이것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나 각하 앞에서 울기도 했다? 코도 풀었어.
“네에? 울고불고 코를 풀었다고요?”
“…울고불고까지는.”
이제 사실 내가 대공을 좋아하고 말고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더 걱정이긴 했다.첫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날 판이다.아니지, 그것 말고도 문제는 차고 넘쳤다.
‘내 마음 실시간으로 보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데, 나 이거 감당 가능한가……?’
“후우, 10년 거짓말해서 나 한 번에 벌 받는 거 아니야?”
“…어, 음.
어쨌든 아가씨.
첫사랑이죠?”
어색하게 웃는 마리가 덜커덩대며 박수를 쳤다.
조용한 방 안에 짝―짝―짜악―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마저 씁쓸하게 들리는 것은 내 마음 탓일까.
“축하받을 일 맞아? 확실해?”
나는 전혀 기쁘지 않은 얼굴로 힘없이 마리에게 물었다.
“…아마도?”
그녀가 내 눈길을 피해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망했다, 망했어.사랑 아니야, 좋아하는 거야.아직 그에게 사랑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발악인 것 같지만!’
나는 대공령 방향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각하, 거기 눈 내려요? 잘 지내고 계시나요? 저는 덕분에 괴롭습니다.
아주 괴로운 겨울을 나고 있어요.
그래도 시간 되시면 수도 좀 오세요.
제가 아주 조금.
각하가 보고 싶어요.’
*
- 디에고, 힘을 길러라.
살아남아.황제가 명했다.
야속하다 여기며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자 저보다 더 울고 있는 황제가 있었다.나는 아비를 잃었지만 그는 제 형제를 잃었던 날이었다.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나는 그런 마음이 없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건 진실이 되지 못했다.그들이 원하는 건 내 의지가 아니니까.그러니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했다.힘을 가지면 안 된다고 여겼으나 정작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그렇게 살고자 살아왔다.
죽을 날이 언제일지, 곱씹으면서.
‘그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살 만하군.’
자신과 내 사람들을 지킬 정도로 강해진 이후엔 이렇다 할 일이 없이 꽤 평화로웠다.
“오랜만에 바쁘네요, 각하.”
“겨울이잖나.”
대공령으로 돌아온 직후 영지를 돌보는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틈틈이 수도 관련 소식을 죄다 확인하는 그였다.
“수도 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으셨는데, 이번엔 어쩐 일이세요?”
“수도에 비비안이 있어서.”
콘라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해도 괜찮은 걸까.
“조만간 방을 마련해 둬야겠네요.”
무슨 얘기냐는 대공의 표정에 콘라드가 이죽거렸다.
“마님 방이요.”
“아, 글쎄.
비비안이 여기까지 올지 모르겠군.”
애초에 마님 자리에 앉아줄지도 의문인데.태연하게 웃으며 말하는 대공이 기가 막혔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각하, 그, 가볍게 연애만 하실 생각이세요? 그러기엔 상대가 좀 그렇지 않나요? 무려 예비 황태자비에 그 윈데이너 후작가라고요?”
가볍게? 인상을 찡그린 그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혀를 찼다.
“무슨 소리야.”
지금도 대공령이고 나발이고 수도로 달려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데.수도에 두고 온 비비안이 눈에 밟혀 밤에는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특히나 알렌 데이비드, 그 자식의 행태를 보고 난 후라 더 걱정이 됐다.
수도 잡놈들이 그녀에게 허튼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비비안에게 붙인 호위는?”
난감한 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던 콘라드가 멋쩍게 웃었다.
“황태자 전하가 이미 여럿 붙여뒀던데요.”
“리안이?”
“예, 꽤 오래전부터 그 일을 해온 듯 능숙해서 저희 쪽 사람이 비비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흐음.”
비비안의 안위가 걱정되어 호위를 붙이려던 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지만, 그녀의 소식을 알고 싶은 개인적 욕심도 있었다.
“…호위 목적이 아닌데 따라다니는 건 염탐이지?”
“그렇죠.
그건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각하가 굳이 그러고 싶으시다면야, 뭐.
콘라드의 시선에 찝찝함이 깃들었다.
“…아니야, 됐어.”
손을 저은 디에고가 이내 서류로 눈을 돌렸다.
집무실 책상 한 귀퉁이에 놓인 다과가 시야에 잡히자 들고 있던 것을 잠시 내려놓고 초콜릿을 손에서 굴린다.
“이거 대공령에서만 생산한다고 했었나?”
“그거요? 네, 과일 향이 나서 인기 많아요.”
“윈데이너 후작가에 보내도록 해.”
초콜릿을 입 안에서 굴리며 좋아할 비비안을 떠올리자 기분이 한결 좋아진 그였다.그렇게 온종일 영지를 시찰하고 서류를 들여다보며 보내던 나날 중 다를 바 없는 하루, 디에고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가 멍하니 푸른 숲이 그려진 태피스트리를 바라봤다.한참 눈을 깜빡이며 보던 그가 비비안을 떠올린다.결 좋은 분홍 머리의 감촉이 아직 손에 생생했다.비비안의 눈동자가 너무 신비로워 눈꺼풀에 가려졌다 드러나는 시간조차 기다리기 힘들다 생각할 때도 있었다.눈을 반짝이며 웃는 그녀의 머리 위로 꽃잎과 초콜릿이 떠다니는 생각을 하며 그가 소리 내 웃었다.
‘하나 해야겠다.
아침마다 행복하겠어.’
비비안의 초상화를 받아다 태피스트리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는 디에고였다.태피스트리에 담을 그녀의 이런저런 모습을 구상하던 그가 뒤로 누웠다.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이는 디에고가 중얼거렸다.
“비비안, 보고 싶다.”
벌써 대공령에 머문 지 한 달 반이 지나간다.
매일 눈을 뜬 순간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 비비안이 다녀갔다.옅어질 만도 한데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는 기억이 다행이었다.이번에 수도로 가게 된다면 자신이 얼마나 자제할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 …각하, 놔주세요.제 양손을 붙잡은 내게 그 밤, 비비안이 애원했다.
도서관에서 차마 손댈 수 없었던 붉은 귀를 만지자 열기가 느껴졌다.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그럼에도 나를 내치지 않는 것이 애틋해서.디에고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럼에도 좀처럼 비비안이 지워지지 않는다.영지를 돌며 설원을 마주할 때마다 비비안이 생각났다.
예쁘고 좋은 걸 보면 어김없이 네가 보고 싶어진다.그 어여쁨이 비비안인 것 같고, 네가 웃으며 좋아할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할 것 같은데.실없는 감상을 나누고 공감하고 그렇게 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을 만끽하고 싶다.
“…기다리자.”
그녀가 벅차하지 않도록, 직접 내게 올 수 있도록.
“각하, 오늘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디에고에게 콘라드가 물었다.
“…….”
답이 없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선 콘라드가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 아프세요?”
“…안 되겠어.”
“네? 뭐라고요, 각하?”
“못 기다리겠어.”
벌떡 몸을 일으킨 대공이 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콘라드, 뒤를 부탁한다.”
탈주하는 제 상관을 보며 한껏 입을 벌린 그가 뒤늦게 달리기 시작했다.
“각하! 어디 가세요!”
“비비안한테.”
“네에?! 이렇게 갑자기요?”
좀! 진정해 보세요, 각하.
그렇게 급하게 가실 것 없잖아요.
금방 준비할게요.
네?어딘가 맛이 간 듯한 디에고를 붙잡아두고 콘라드는 재빨리 수도로 갈 채비를 했다.디에고를 보좌한 지 10년이 넘어가는 콘라드는 오늘 새로운 다짐을 하나 했다.
‘한 달이 한계인 것 같군.’
제 완벽한 상관은 애인을 한 달 이상 못 보면 정신이 나간다.그리 확신한 그는 앞으로 대공의 일정에 이 중요 사항을 적극 반영하기로 마음먹었다.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소파에 침잠해 있는 디에고에게 흐린 눈을 한 콘라드가 다가갔다.
“그리 주체가 안 되실 정도로 영애가 좋으신 겁니까.”
한껏 고개를 젖히고 소파에 몸을 묻은 그가 눈을 감았다.
그러면 비비안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응.”
더 이상 어떤 말로 꾸며야 할지 모르겠던 디에고가 답했다.좋았다, 비비안 윈데이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