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황제 탄신 축하 연회가 시작되기 두 시간 전, 황태자의 집무실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살폈다.
“웬일로 독대를 청하셨나 했는데.”
무표정이지만 드물게 기분 나쁨을 드러내고 있는 황태자가 대공에게 말했다.
“전하의 마차가 이번에도 윈데이너 후작가로 향할까 싶어서.
전하도, 저도 같이 묶어두기 위한 계책이지요.”
비비안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발을 묶어두는 일이라 해도.
“…제가 후작가에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비비안이 힘들어해.”
디에고의 뻔뻔한 발언에 리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인상을 썼다.
근래 비비안을 제일 힘들게 하는 이가 누구인가.그러나 사냥 대회 때 그녀가 울면서 토로한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디에고는 진심이었다.
비비안이 속상해한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녀의 우는 얼굴만큼은.다시금 그 얼굴을 떠올리자 좀처럼 가라앉히기 힘든 감정이 솟았다.
비비안의 붉어진 눈가가 자꾸 마음을 동하게 했다.
‘…이거 정말 미치겠군.’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디에고가 오늘 황태자를 찾아온 목적을 상기했다.비비안의 이름이 거론되자 날 선 반응을 보이던 리안의 기세 또한 한풀 꺾였다.
“이렇게 제 발을 묶지 않았어도 오늘은 그런 일 없었을 겁니다.”
한숨을 삼킨 그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사냥 대회, 초조한 마음에 벌인 충동을 제가 얼마나 후회했던가.물론 비비안과 함께 올라탄 마차 안, 무릎이 맞닿을 거리에서 그 아이를 양껏 바라볼 수 있었던 그 순간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다.그래도 마차에서 내릴 때 귀족들의 시선에 찰나 흔들리던 비비안의 동공만큼은 역시.
‘상황이 안 좋았어.’
그 뒤 수군대던 귀족들의 칼날 같은 말들이 비비안을 향하는 것을 보며 제가 얼마나 속이 탔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는 리안이었다.
“이번 연회에서는 둘 다 그 말을 지켜보자고.”
빤히 대공을 보던 황태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를 확인한 디에고가 어린 동생을 보듯 기특한 미소를 보였다.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임에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훌륭했다.이윽고 다리를 꼰 채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디에고의 미소가 조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제가 거금 들여 소식 하나를 물어왔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더불어 마이어 백작 영애를 떠올린 그가 작게 혀를 찼다.
비비안을 앞세워 저를 휘두르려는 것이 뻔히 보였으나 애매했다.
그녀 주위를 감싼 연기는 분명 보기 드물게 맑았으니까.
“소식이요?”
“비오첼라 백작.”
알 만하다는 듯 황태자의 얼굴에도 경멸이 담겼다.
“거기서 도박장을 운영하는데, 아시다시피 뻔하지 않습니까.”
대공이 테이블 위에 금화를 올려놓았다.
제국에서 통용되는 모양과는 다른 금화를 본 황태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린다.
“비오첼라의 문을 한 번 더 열 수 있는 초대장이라더군요.”
“하, 가지가지 하는군.”
실소를 터트린 황태자의 눈에 분노가 일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대공이 전해온 것만으로 이미 자신의 가설이 더는 가설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 황태자다.
“그 짓을 하고자 제 영지를 지나는데, 제가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시겠습니까, 전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잔뜩 찌푸린 채 테이블을 노려보는 황태자를 대공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몇 번, 통행하는 백작의 상단을 검문한 적이 있습니다.”
황태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목록 그대로 평범한 물품이었으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도에서 충분히 쉽게 돈을 만지는 자가 굳이 품을 들여 왕국과 거래를 한다는 것이.이어진 대공의 말에 리안이 자신의 미간을 손으로 문질렀다.
“…하면 어디에 숨겨서, 어떻게 전달하는 것인지.
그걸 못 찾겠다?”
대공의 한쪽 눈썹이 꿈틀대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라는 뜻이겠죠, 형님?”
황태자의 또 다른 얼굴이 짙은 미소를 걸친 채 차갑게 응했다.
“이럴 때 꼭 형님이라고 부르네, 리안.”
여유롭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대공이 제 입가에 손을 댄 채 눈을 휘었다.
“전하, 조만간 백작가 하나 잃게 되실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서로 닮은 색 하나 없는 두 사람이지만, 사냥을 시작하기 전 풍기는 분위기는 퍽 같았다.
【 첫사랑 】
야했다.
대공은 그냥 잘생긴 것이 아니었다.
테라스에서 내 손을 붙들고 웃던 그가 나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몹시 부끄럽고 간질거리면서 숨고 싶은 순간이었다.아직도 손바닥에 대공의 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어, 어루만져?’
그날 이후로 방심하면 되새겨지는 테라스 사건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어루만져 주는 관계란 어떤 관계지? 어디를? 어디까지?
“영애, 더우세요?”
“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셨어요.”
내가 또 지금 무슨 생각을! 정신 차리자.
여기는 마이어 저택이다.
“아뇨.
괜찮아요.”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고 눈만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 몸이 아니라 마음이 더우신 거였나.”
짓궂게 웃는 그녀를 보자 얼굴에 더 열이 올랐다.
나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대는 거지?
“…그런 거 아니라고요.”
“예,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까부터 멍하니 계신 것 같은데.”
고민은 넘쳤다.
다만 말할 수 없을 뿐.황후 되기 싫어서 내내 사기 쳤어요.
대공이 내 마음을 자꾸 봐요.
대체 어루만지는 관계는 어떤 관계죠?디에고 브라이트가 너무 신경 쓰여요!매일 대공의 얼굴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데, 이건 여섯 살짜리도 알겠지.그러나 나는 그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진심이다.
생각만으로 막막한 길임에 틀림없으니까.
“아, 비오첼라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스텔라가 무심하게 뱉은 말에 정신이 들었다.
“의뢰가 들어오더군요.
우리의 벨리타 상단에 관해서.”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진한 웃음을 보인다.벨리타 상단, 레사와 나의 합작품.
실상 하는 일은 도박 빚에 허덕이며 돈을 구하는 한미한 귀족 가문에게 돈을 융통해 주는 것뿐인데.레사의 꾸밈 덕에 활발히 상단 활동을 하는 것으로 급부상 중이다.
“더는 무시할 수가 없겠죠.”
벨리타 상단이 호탕하게 돈을 융통해 주는 상대, 그게 죄다 비오첼라가 노리는 영애들의 가문이니까.
“아무래도.
일에 방해가 되는 것도 있겠지만.”
스텔라의 눈에 조금의 흥미로움이 비쳤다.
“벨리타 상단의 재력이 그자의 눈에 띄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돈에 눈먼 백작이 침 정도는 흘려줘야지.
내가 지금 벨리타 상단에 수도 저택 몇 채를 쏟아부었는데!
‘도박은 정말 무서운 것이야.’
비오첼라가 단숨에 그리 많은 재력을 쌓을 수 있었던 토대를 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영애, 그렇게 많은 돈을 이리 써도 괜찮으신가요?”
스텔라가 내 걱정도 다 해주고.
정말 우리 사이 많이 발전한 것만 같아 기쁘다.
“마르지 않는 광산이 여럿이랍니다, 윈데이너는.”
그랬다.
우리가 따로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윈데이너가 신념대로, 다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사실 그 바탕에는 앞으로 몇백 년은 거뜬히 금과 보석을 내어줄 광산이 한두 개가 아님에 있다.
“…그것참, 대단하네요.”
정말 순수하게 놀랍다는 반응의 스텔라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그녀를 마주하자 또 하나의 과제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제 예비 황태자비 자리에서 내려올까 해요.”
차분히 이야기를 듣던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걸 제게 말씀하셔도 괜찮으세요? 제가 그 정보를 어떻게 이용할 줄 아시고.”
얼핏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그녀를 한참 바라봤다.
‘다른 누구보다 스텔라가 이용해 주길 바라서 하는 말인데.’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고 배시시 웃었다.
양껏 이용해 주라.
네가 알아줘야 할 사안이거든.황태자가 사랑은 아니더라도 내게 호감 정도는 품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꽤 오랜 시간 리안은 한결같았으니까.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내가 먼저 물을 수는 없었다.
‘불확실한 리안의 마음은 둘째 치고, 내 마음은 내가 알았으니까.’
긍정의 답을 내놓지 못하는 데 마음을 전하라 할 수는 없었다.만약 그사이에 내가 먼저 그에게 이 관계를 청산해 달라고 요청할 만큼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줬더라면 달라졌을까.그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됐는지도 모른다.시간이 지나 리안에게 다른 이가 생길 거라고 기대하며 마냥 기다렸던 것은, 다른 누구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았음을 이제야 알다니.
“시간이 많아서, 또 지금의 황가가 좋아서.”
귀족 사회에 거론될 만한 사건들을 쫓다 보면 모두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암전, 고리가 끊기는 곳.하나하나 따로 보면 절대 알 수 없는 공란.10년을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봤기에 알 수 있었던 것.그 모든 공란이 암시한 것은 황태자의 안위, 그의 무사함이었다.
“오랫동안 이것저것 정보를 모으고는 했어요.”
“알고 있어요.
영애는 우리 레사의 큰 고객이니까.”
‘…응, 나름 분산해서 의뢰한다고 한 건데.’
레사는 사실 제국에 퍼져 있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정보상의 집합체였다.
각기 조직의 우두머리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하찮고 저렴한 의뢰부터 거금을 들여야만 가능한 의뢰까지.
그 수많은 범위와 고객층으로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을 펼치는 것이었다.
‘나 똑똑하게 일 처리한다고… 같은 건, 여러 조직에 의뢰하고 그랬는데…….’
아무튼!같은 것을 집요하게 쫓았기에 알 수 있었던 사실은
‘레사’
가 때때로 황태자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 수 있었던 건데.
스텔라는 황태자를 지지하지요?”
헌신, 이라고밖에 표현하기 어렵던 그 활동의 의미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느리게 찻잔을 내려놓은 스텔라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가 흔들렸다.스텔라가 레사의 수장임을 안 뒤로 리안과 함께할 자리가 있을 때면 그녀를 살폈다.대체 무엇 때문이었는지, 마이어 백작이 황태자의 사람이었던가.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스텔라 마이어, 한순간 그녀가 황태자를 바라볼 때 눈에 담았던 온기.
‘사랑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