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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22화 (22/109)
  • 22화

    *황제 탄신 축하 연회, 제게는 그저 빠질 수 없어 잠시 얼굴만 비치고 돌아가면 그만인 일이었는데.

    “오늘은 영애 곁으로 안 가십니까.”

    “응, 귀족들이 비비안 귀를 더럽히니까.

    자제하기로 했어.”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즐겁군.그녀는 줄곧 이쪽을 힐끔거리며 세차게 갈등 중이었다.

    나를 피하고 싶고, 떨어져 있고 싶지만 제 생각을 읽고 있을 게 걱정되어 차라리 닿아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온통 제 생각으로 가득한 비비안을 보는 것이 기껍다.한 발짝 다가왔다 두 발짝 멀어지고, 그러다 다시 슬쩍 한 발을 내밀어 가까워지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그렇게 흐뭇하게 비비안을 보는데, 그녀 앞에 기분 나쁜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뭘까.’

    속이 시커멓다 못해 썩어 보이는 데이비드 후작이 비비안의 앞에 서 있었다.

    “…춤?”

    난데없는 춤 신청에 절로 비비안에게 향하던 발걸음이, 황태자 뒤로 가려진 그녀에 의해 멈춰졌다.이내 두 사람이 후작을 지나쳐 정답게 연회장 중앙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이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또다시 나를 옥죄여 오기 시작한다.

    ‘…딴 놈들 욕망에 욕을 해댄 것이 무색하군.’

    아마 제 감정도 눈에 보였다면 그 누구 못지않게 질척하고 어두운 것이 지금쯤 자신을 휘감고 있을 게 선했다.비비안은 아름다웠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춤을 추는 모습은 눈을 떼기 어려웠으나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심에 괴롭기도 했다.그렇게 나는 당장이라도 비비안의 곁으로 가려는 발을 연회장 바닥에 묶어둔 채 감정을 추슬렀다.

    ‘쉽지가 않군.’

    “…후작은?”

    “테라스로 들어갔습니다.”

    비비안의 머리칼이 하늘거리며 그녀의 등에 나붓이 내려앉는 것에 한 번 시선을 두고 테라스로 향했다.

    “콘라드, 데이비드 후작에게 사람 붙여.”

    “예, 캐면 뭐든 나올 것 같은 인사던데요.”

    나로선 후작 주변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뭐가 없을 수가 없지, 그런 자식은.황태자에게 가로막힌 순간.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던 어둠, 그럼에도 눈과 입을 모두 휘며 웃던 그 낯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딸칵―

    “내가 들어오지 말랬지!”

    씩씩거리며 돌아보는 후작의 얼굴에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다.

    ‘제대로 화가 났나 보군.’

    “이런.

    쉬는 데 내가 방해한 것인가, 후작?”

    한껏 당황한 표정이 금세 예의 그 사근거리는 것으로 바뀐다.

    가면 쓰는 데 도가 텄어.

    “각하, 이런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잠시 몸이 안 좋아서 그만.”

    여전히 사나운 기운을 두른 채 애처로이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우습다.

    “불쑥 들어온 내 탓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나저나 얘도 금발이네?’

    아까 비비안이 이 자식 외모를 칭찬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그보다 내가 말이야, 후작.

    언제부턴가 금발과 적발이 싫어졌어.”

    태피스트리의 망령이 또다시 나를 덮쳐왔다.

    이쯤 되면 이건 진실이다.근래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같이 금발 아니면 적발이었다.

    슬쩍 눈을 치켜뜨니 이마를 덮은 흑발이 보인다.그래, 흑발에 푸른 눈은 없었지.

    “…예?”

    “그대가 내 편견을 부추기는 데 한몫하는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변변찮은 네가 하는 거 없이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온통 진흙을 뒤집어쓴 듯 질척한 그의 주변이 답답하다.얼마나 모난 생각과 더러운 감정을 품고 살기에 이 지경일까.

    “나는 윈데이너 후작 영애에게 금발과 적발이 다가가는 것이 싫다는 말을 하는 걸세.”

    황당하다 못해 불쾌하다는 듯 후작의 미간에 주름이 진 것을 보며 두 사람을 떠올렸다.

    내 인생에 금발과 적발은 황태자랑 마이어 백작 영애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아.

    “후작, 내 눈에 거슬리지 마.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알아듣겠나?

    “…각하, 이게 무슨.”

    아직도 웃음을 유지하려는 후작의 입매가 기괴하게 비틀려 있다.뭐, 이런다고 사고 칠 놈이 안 치는 거 아니겠지만.

    “그냥 경고야.

    네가 일을 치면 내가 이성적으로 굴 자신이 없어서.”

    비비안을 향한 후작의 관심이, 그 눈빛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내게도 이리 무서운 것이 있었나.

    비비안이 얽히면 겁부터 났다.

    “제가 무슨 일을 치겠습니까.”

    무표정이면 이런 얼굴인가.

    내내 생글거리는 것보다 보기 편했다.

    “그래, 부디 그 생각 변치 않기를 바라네.”

    그럼 마저 쉬어, 이만 가볼 테니.닫히는 테라스 문 뒤로 고개 숙인 후작이 검은 안개 속에 파묻힌다.

    “하아.”

    눈을 감았다 떠도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많을수록, 특히 탐욕스러운 자들이 모일수록 내가 보는 것은 얼룩진 그림뿐이었다.

    “…넘치다 못해 뒤덮이기 시작했군.”

    천장까지 가득한 색들을 한 번 보고 옆을 보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이번에는 적발인가.’

    화려하게 치장한 마이어 백작 영애가 테라스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대는 여기서 뭐 하나?”

    “쓸 만한 정보가 있나 살피는 중이죠.”

    백작 영애의 시선을 따라가자 여전히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둘이 보였다.

    비비안의 주위로 구름 같은 것이 둥실 떠다닌다.

    ‘좋은가 보네.’

    “참 두 분이 잘 어울리죠?”

    옆으로 내려다본 백작 영애의 표정이 온화하다.

    고개를 돌려 사뿐사뿐 춤을 추는 비비안을 보자 입매에 힘이 풀렸다.

    “비비안이 예뻐서 그런 거지.”

    “…각하도 정말 어지간하시군요.”

    황태자를 향한 비비안의 마음이 보인다.

    천진하게도 그녀는 리안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다.저를 바라보는 그 상대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데.

    “그런데 요새 비비안하고 뭘 꾸미는 건가?”

    눈을 맞춰오는 백작 영애의 얼굴에 비웃음이 들어찬다.

    “각하께 일일이 보고 드려야 할 의리는 없는 줄로 압니다만.”

    그야 그렇지.

    비비안이 무언가를 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단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위험하지는 않을지 지켜보고 싶을 뿐.

    “레사에 의뢰하도록 하지.

    우리 비비안이 어떤 훌륭한 계획을 짜고 있는지, 궁금하네.”

    춤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였던가.

    아님 내가 안달이 난 걸까.

    “영애, 비비안 춤 마치면 테라스로 데려와 주겠나?”

    “…500골드 하시죠.”

    이 여자, 500골드에 한 맺혔어? 절로 미간에 주름이 가는 것을 느끼며 백작 영애 주변을 훑었다.

    예상과 다르게 강이 흐르듯 투명한 기운이 넘실댔다.보이지 않았다면 오해하고도 남았다.

    “돈은 수단이라더니.”

    “제 조직이 원체 커야지요.

    유지비가 좀 들어요.”

    “…강도가 따로 없군.”

    각하 금고를 믿는다며 장사꾼의 미소를 한껏 선보이는 백작 영애를 뒤로하고 비어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시끌벅적한 연회장과 달리 조용한 테라스에 앉아 있자 비비안이 더 보고 싶어진다.

    아까 멀리서 볼 것이 아니라 곁에 있을 것을.

    - 영애를 노리는 놈들이 늘어났습니다.

    여러모로 지금, 이렇게 표현하기 뭣하지만 가장 쓸모 있는 패라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콘라드의 보고에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 모양이라니…….이제 나는 네가 다치는 것이 이토록 겁이 난다.

    “…내가 어디까지 하려나.”

    너를 위해서.문을 열고 놀란 듯,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더 키운 비비안이 굳은 채 서 있다.

    그녀에게 뻗어 나간 손이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손목에 닿았다.

    “어서 와, 비비안.”

    네 곁에 있는 대가로 내가 무엇까지 내어놓을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지금 제 마음 안 보이는 거 맞죠?”

    아직 그가 감싸 쥔 내 왼쪽 손목을 스쳐 그의 눈을 바라봤다.

    “응, 안 보여.”

    맑은 눈을 끔뻑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미쳤다, 미쳤어.

    저 덩치를 어쩌자고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

    “그럼 우선 계속 잡고 있어 봐요.”

    움찔, 떨리더니 곧이어 조금 더 힘을 줘 손목을 감싼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서 얘기해.”

    살짝 내 팔을 당겨 옆에 앉힌 대공이 제가 쥔 손목에 한참 시선을 두었다.내가 지금 미친 듯이 흔들리는 마음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 손목 꼭 쥐고 있어 봐.

    ‘후우, 이게 뭐람.’

    춤, 춤이라.

    방금 전에도 추고 온 그깟 춤! 왜 대공이랑 춘다고 생각하니까 세상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는 걸까.지금 그와 춤을 추면 분명 대공의 발을 끊임없이 밟을 자신이 있었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한동안 연회만 가면 누가 나한테 춤 신청 안 해주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곤 했었는데.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런데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하나는 뻔히 꿍꿍이가 보이는 거였고, 하나는 구출인 데다.마지막은, 무서웠다.내가 따라갈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두고 앞질러 가는 기분이다.

    그가 붙잡은 손목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빠르게 뛰는 맥박이 대공에게 전해질까.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대공의 눈에 내가 담겨 있다.

    ‘그게 왜 기쁠까.’

    저 푸른 바탕에 분홍색 점이 찍혀 있는 것을 보는 게 좋아졌다.

    “…기분이 어때요?”

    난 항상 대공의 마음을 알 수 없었는데.

    보이던 마음이 안 보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제야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불안해.”

    돌이켜보면 원치 않았는데도 봐야 했던 순간들이 오히려 그에게 불공평했던 것은 아닐까.대공이 엄지로 내 손목을 지그시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목에 박혀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런데 몰라서 좋기도 해.

    덕분에 네 모습을 더 찬찬히 살펴보게 되거든.”

    느리게 속삭이듯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이제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대공이 보이는 이 관심을.그러나 그걸 알았다고 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쯤 체념한 듯 애원조로 그에게 말했다.

    “…각하는 뭘, 어쩌고 싶으신 거예요?”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너에게 뭘 해줘야 하는 건데.마음을 알고 싶어서 집중해 바라본 네 눈에 비치는 것은 나였다.

    그의 눈이 나를 담은 채로 부드럽게 휘었다.

    “내가 이렇게 널 만져도 네가 웃어주는 사이.”

    대공이 내 남은 손을 잡아다 자신의 뺨에 대고 기대왔다.

    “그리고 네가 날 어루만져 주는 그런 관계.”

    푸른 눈에 열기를 눌러 담은 디에고 브라이트가.나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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