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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21화 (21/109)

21화

*

“오늘은 백작 영애가 아니라 다른 쪽을 만나보고 싶어서 왔어요.”

웃음기가 지워진 스텔라의 날카로운 눈이 나를 향했다.

‘거절하면 어쩌지?’

속으로 진땀을 흘리면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 힘을 줬다.

그쪽이 안 만나주면 이쪽 스텔라랑 차 마시고 돌아가야지, 뭐.

‘그리고 내일 다시 오자.’

혼자 굳은 다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스텔라의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시지요.”

뒤를 따라 마이어 저택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평소 향하던 방향이 아닌 2층으로 올라섰다.

“오늘은 그쪽이 아니에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모습이 마치 음모를 꾸미는 사람의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다.스텔라의 뒤를 따라 올라선 2층 복도가 고요하다.

필요한 때가 아니면 사용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 같았다.깊이 들어선 곳에서 장미 넝쿨이 조각된 문을 열자 꽤 넓은 방의 모습이 드러난다.

‘와, 여기 스텔라 방 같은데?’

화려하지만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무게를 더한 방은 해가 지는 순간의 아늑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을 가로질러 책장 앞에 선 그녀가 책등을 손으로 쓸었다.탁―주홍빛이 도는 책 한 권을 들었다 놓자 책장이 갈라지며 또 다른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와.”

입을 벌린 채 바삐 눈동자만을 데굴데굴 굴리던 내게 스텔라가 손짓한다.

‘멋있어.’

나도 돌아가면 다음 저택 보수 기간에 이런 거 만들어야지.

어릴 때 부모님 몰래 간식 먹던 순간의 두근거림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비밀의 방 안, 책상에는 잘 정돈된 서류 더미가 줄 맞춰 있다.

원형 탁자 위에 능숙하게 두 사람 몫의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내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얼까요, 영애?”

내게는 돈과 계획이 있지만, 경험과 움직여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자를 잡아야만 내게 행동의 자유가 생긴다.

“영애는 저와 완벽한 짝이에요.”

‘와,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스텔라가 짜증을 가득 담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 짝은 제가 찾겠습니다.”

‘으음~ 아니야, 언니.

우선 내 말 좀 들어봐.’

“그대는 정보와 움직일 단체가 있고, 나는 돈이 넘쳐나죠.”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답니다.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나 앉아 있던 스텔라가 몸을 바로 한다.

느슨했던 그녀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무슨 생각이죠, 영애?”

이미 이 계획을 떠올렸을 때부터 나는 꼭 스텔라를, 그녀가 지휘하는 레사를 포섭하리라 마음먹었다.

“레사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비오첼라에 대해서?”

스텔라의 고개가 기울며 매력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다.

“영애가 알고 계신 것만큼은 알죠.”

“그렇군요.

그럼 저와 손을 잡고 비오첼라를 치는 일에 관심 있으신가요?”

판은 벌어졌고, 나는 이 판에서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정했다.

“그거, 무척 기대되는군요.”

어서 더 말해보라는 듯 그녀가 눈썹을 들어 보였다.

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서서 일을 벌이는 것은 처음이라 이게 과연 통할지 의문이지만.

“상단이 필요해요.

실체는 없어도 좋아요.”

그럴듯한 이름이 필요했다.

그리고 신뢰.

비오첼라 백작을 속여 그 뱀의 뱃속까지 침투할 수 있을 존재가.

“…슈베른 왕국 출신이 이끄는 상단으로 해두죠, 돈이 너무 많아서 주체를 못 하는 이가 재미 삼아 운영하는?”

어쩐지 뒷말은 나를 놀리는 것 같았지만 넘어가기로 한다.

‘아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마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 같네.’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레사’

, 어쩌면 허공에 흩어져버릴지도 모르는 내 계획에 실체를 선사해 줄 최고의 조력자.

“주체 못 할 정도로 돈이 많다는 게 마음에 드네요.”

이 아늑하고 멋진 비밀의 방에서 스텔라와 나는 서로의 찻잔을 마주 대며 빙긋이 웃었다.*

“하아.”

그렇게 병약한 척하고 눈에 띄기 싫어하면서도 매번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자 오기였다.

‘오늘은 빠질 수 없는 연회기는 하다만.’

황제 탄신 축하 연회.시종이 육중한 문을 열자 가장 화려해서 오히려 쓸쓸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한껏 치장한 귀족들이 가득한 홀로 들어서며 그 수백의 눈길을 피부로 느낀다.이젠 시선 정도로 고개를 숙이거나 도망치는 일은 없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난 나를 잃어야 했다.

누군가와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고 거짓을 말하면서 태연하게 웃었다.

‘그렇게 잃은 줄도 몰랐던 것들이 지금에 이르러 애틋해지는 것은 왜일까.’

샹들리에보다 빛나는 스텔라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와 함께 아는 체를 한다.

누군가가 이런 장소에서 나를 반겨준 것이 얼마 만이지.나는 망설임 없이 스텔라에게 향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한참 자리를 찾아 헤매던 때와는 달랐다.

“제가 지금 영애와 포옹을 나누고 싶네요.”

스텔라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사양하겠어요.”

작게 소리 내 웃고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이 순간, 황궁의 연회장이 달리 보였다.그리고 전과 다른 감정은 스텔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다.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황태자와 대공이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둘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같이 있는 것이 퍽 사이가 좋아 보인다.어김없이 나와 눈이 마주친 대공이 짧게 미소를 보이고 시선을 돌린다.

‘왜 쟤는 헤매지도 않고 단번에 나를 찾는 거지?’

그리고 당연히 그를 피할 생각만 하던 내게.대공이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다고 그가 나를 안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처럼 내내 뚫어져라 바라보지는 않지만 틈틈이 나를 따라오는 대공의 시선이 느껴졌다.

‘…좋은 거지?’

헷갈린다.

옆에서 알짱대지 않는다고 그가 내 생각을 안 보는 것도 아니고! 이젠 닿으면 내 마음이 지켜진다는 것도 알았는데!혼란스러웠다.

같이 있지 않아서 귀족들의 눈초리를 받지 않는 것은 좋았으나, 옆에 있었으면 어떻게든 그와 접촉해 내 생각을 보호받을 수 있었을 텐데.

‘이것 봐.

내가 내내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거, 저 인간 다 알 거라고.’

한 손을 이마에 짚은 채 자리에 앉아 있자 내 앞에 멈춰 선 구두가 보인다.느리게 고개를 들자 곱슬거리는 탁한 금발에 녹안을 지닌 미남자가 쑥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저 외모, 데이비드 후작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짐짓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이 강아지를 닮았다.

“영애가 저를 알고 계시다니, 이거 기쁜걸요.”

‘후우, 너도니? 너도 나 찔러보니?’

얘도 후작이라는 작위에 훤칠한 외모, 넉넉하기로 유명한 영지까지.

갖출 것 다 갖춰서 꽤 인기 있었지.나는 이제 놀라지도, 분노하지도 않기로 했다.황태자에 대공에 후작 하나쯤 얹어진다고 뭐 크게 달라지겠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영애께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춤? 추우움?와, 이젠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리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생긴 건 순하고 소심해 보였는데, 얘 뭐야?’

아, 간만에 추는 춤을 얘랑? 그것도 첫 춤을 추는 건 아닌 거 같은데.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대고 있는 사이 내 앞을 가로막은 등이 보인다.

“이거, 안됐지만 내가 먼저라서 말이야.”

찬란한 금발이 흔들리며 리안이 나를 돌아봤다.

“그렇지, 비비안?”

그의 뒤로 보이는 탁한 금발이 황태자 앞에선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네, 전하.”

그가 온전히 내게 몸을 돌리고 손을 내밀더니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눈을 휘었다.

“그럼, 갈까?”

“전하, 감사해요.”

그와 춤을 이어가며 대화를 하는 것이 작년 황제 탄신 축하 연회에서였으니 꼬박 1년 만이었다.

“무엇이?”

“원치 않는 사람과 춤 안 추게 해줘서?”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번만큼은 내가 황태자라 다행이군.

상대가 누구든 비비안을 구해줄 수 있을 테니.”

“정말 권력을 제대로 쓸 줄 아시는 분이세요, 전하.”

제가 이래서 제국민 합니다.내 넉살에도 관대하게 웃어주는 그의 모습이 따듯했다.

‘오라버니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든든하고 지지해 주고 싶고, 마음 한구석이 포근했다.

괜히 감상에 젖어 리안을 바라봤다.어릴 때부터 봐왔던 찬란한 금발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한들거린다.

“전하, 저는 정말 전하 편이에요.

후작가로서가 아니라 비비안 윈데이너로서 말이에요.”

아, 물론 전하에게 필요한 건 후작가겠지만! 그것도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리안이 춤의 일환으로 내 허리를 바짝 그에게 당겼다.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그의 이마가 내 이마에 내렸다.

‘어?’

그의 눈동자만이 시야에 가득 찬 상태로 얼마간 지났을까.

“…나는 후작가보다 비비안이 내 편인 게 더 좋아.”

작게 속삭인 그가 이내 멀어졌다.그렇게 끝난 음악에 맞춰 황태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어쩐지 흩어질 것같이 연약한 미소를 보인 그가 자리를 떴다.나는 리안과 닿았던 이마를 괜스레 문지르며 자리로 돌아갔다.

“…영애, 테라스로 가서 좀 쉴까요?”

그리고 이어진 스텔라의 권유로 함께 테라스로 향하면서도 황태자가 걱정되었다.

‘리안이 좀 이상했는데.’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황태자의 잔상에 멍하니 테라스의 손잡이에 손을 대자 스텔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다과라도 좀 챙겨 오도록 하죠.

먼저 들어가 계세요.”

그래, 그것도 좋겠다.

이제 보니 좀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배고프면 머리가 안 돌아가지, 암.

“저는 케이크가 좋겠어요.”

뻔뻔하게 제 몫을 요구하는 내가 어이없는지 헛웃음을 지은 스텔라가 이내 귀찮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갔다.테라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그리고 긴 다리를 꼰 나른한 맹수가 나를 맞이했다.

‘스텔라, 이 배신자.’

“…각하.”

“어서 와, 비비안.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네.”

그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느리게 쥐었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

거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으로 나를 제 쪽으로 당긴 대공이 고개를 젖힌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언제 그대와 춤을 출 수 있을까?”

“…각하, 춤도 추세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보자 그가 푸스스 웃는다.

달빛을 받아 그 얼굴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랑은 추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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