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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20화 (20/109)

20화

“협조해 주겠어, 비비안?”

지척에서 그의 유혹적인 미소를 보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위험하다.

무기가 따로 없구나, 네 얼굴.

“…어떻게요?”

“저번처럼 내가 반응하지 않고는 못 참을 만한 생각 좀 해줘.”

‘…무슨 생각? 저번이라니?’

“그럼 그대도 이게 정말 효력이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있겠지.”

화르륵 달아오르는 얼굴 덕에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 호기롭게 진실을 밝히겠노라 떠올렸던 수많은 그림이 다시금 내게 몰려왔다.

그와 얽히면 어쩜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들만 잔뜩 늘어나는 거지?

‘아무래도 머리 박자.

오늘 내 머리가 기억 일부분을 날려버릴 수 있게 충격 좀 줘야겠어.’

여전히 내 손을 덮고 있는 대공의 손이 보였다.

그의 손이 너무 커다란 나머지 내 손이 그에게 삼켜진 듯했다.슬며시 고개를 들자 내 쪽으로 기울인 그의 얼굴이 보인다.

조금 답답하고 초조한 듯, 그러나 여유를 가장한 미소가 거기 있었다.대공의 눈동자가 잘게 움직이며 내 눈, 입 그리고 어깨까지 무언가를 찾아보려는 듯 집요하게 훑었다.

“진짜 안 보여요?”

매 순간 내 마음을 확인하면서도 태연하게 행동하던 대공의 모습들이 줄이어 뇌리를 스친다.

‘이거 또 사기 치는 것은 아닌가.

애초에 너무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 감도 못 잡겠다.’

그가 눈을 내리깔아 겹쳐져 있는 손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안 보여.”

말을 하던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진짜로 닿으면 보이지 않는구나.

더 확인할 것도 없이 알 것 같다.

내 마음을 알지 못해 초조해하며 뭐라도 놓칠세라 바삐 살피는 그의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내 손을 덮고 있던 그의 손에 좀 더 힘이 가해지는 것이 보였다.

대공에게서 쉽사리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좀 귀엽네.’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아닌 척하며 애쓰는 그의 생소한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언제나 여유로운 건 대공이고 그 앞에서 이리 쩔쩔매는 것은 저였는데.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 못 믿겠으니 좀 더 해볼게요.”

일부러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이제 생각해요, 나? 무슨 생각인지 각하가 말씀해 주시면 돼요!”

나는 손을 대보고 싶은 그의 눈에서 언제나 유려하게 올라가는 그의 입매, 그리고 연회장 테라스에서 내가 침을 삼키게끔 한 그의 목젖을 지나 한바탕 눈물로 적셨던 그의 가슴팍에 시선을 주었다.그리고 본 적은 없지만 그의 비밀을 밝히고자 머릿속으로 옷을 벗기던 그날 수월하게 상상할 수 있었던 복근까지.대공의 몸은 셔츠 따위로는 그 모양새가 다 감춰지지 않았다.멍하니 그러고 있자 대공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심스럽지만 머뭇대던 그가 한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린 후 웃는다.

“저기, 비비안.

또 나 벗기고 있는 건 아니지?”

“…거짓말쟁이.”

안 보인다며!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미쳤지.

“아, 정말인가? 그냥 해본 말인데.”

한결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가 생글생글 웃는다.

너무 안타깝지만 그 모습이 또 억울함을 상쇄시킨다.

“아니! 저번처럼, 이라고 말씀하셔서 나도 모르게.”

다시 해요! 다시! 이건 무효야.그의 손에 잡힌 손바닥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마음 안 보이는 거 아니면 어쩌지? 어디까지 생각해도 되는 거지?

“후우, 갈게요.”

심호흡을 하고 그와 눈을 맞추고 마음속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소리 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제대로 말한 적 없지만 당신의 말이 여러 번 날 안심시키고 기쁘게 했다고, 사실은 너를 만나게 된 것이 정말 좋았다고.말로 하기에 어려웠던 것을 침묵 속에 담아보았다.

“…전혀 모르겠어.”

대공이 나를 향해 몸을 돌린 채로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툭 떨궜다.

이윽고 오후 햇살을 받은 나른한 표정의 그가 손으로 내 눈가를 쓸며 말한다.

“그런데 기분은 좋네, 비비안.”

*

‘이게 벌써 몇 번째지.’

한 입 먹은 케이크에 포크질을 하려던 찰나 또 들려오는 낯선 이의 부름.

“영애, 안녕하십니까.”

반들반들한 얼굴을 한 젊은 귀족이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내게 인사를 건넨다.

“아르도 백작가의 앤드류입니다.

이렇게 영애를 우연이나마 뵙게 되다니 오늘은 운이 좋군요.”

나는 오늘 운이 사나웠다.

간신히 미소 한 자락을 걸치고 인사에 응했으나 앤드류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왜 안 가니.

너 때문에 포크 멈춘 거 안 보이니?’

“영애와 차 한 잔을 나눌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테이블 위의 다 먹지 못한 케이크를 처량하게 보았다.

맛이 참 좋았으나 우린 인연이 아닌가 보다.

잘 있어라, 케이크야.그렇게 케이크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 나는 슬쩍 머리에 손을 얹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어쩐다.

제가 지금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이만 돌아가려던 참이었던지라.”

곁에 서 있던 마리가 빠르게 내 옆으로 와 부축을 시도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가눌 힘마저 없다는 듯 마리에게 기댔다.

“아! 저런,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가보십시오.”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를 나서는 뒤편에서 앤드류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영애! 몸 잘 챙기시고 다음에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다음은 없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간만의 외출이 진한 피로감만을 안겨주자 짜증이 일었다.

덕분에 마차에 삐딱하게 앉아 마리와 심각한 토론을 이어 나갔는데, 결국 그 피로의 원인이.

“…그러니까.

오늘따라 이상한 것들이 자꾸 찝쩍대는 게.”

“예, 전하와 각하 두 분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아가씨가 젊은 남성 귀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 같아요.”

아무래도 황태자와 대공인 것 같다.

‘저울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무슨 저울질을 해, 내가.”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잘도 한다, 인간들!애먼 사람 잡지, 잡아.그전에는 그저 황태자의 짝으로만 보느라 대상에서 제외됐다면, 지금은 제국 내 정상을 다투는 남자들이 사족을 못 쓰는 여자.그러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 누구랑 만난다는 확증이 없으니 내가 한번 만나보면 어떨까.그럼 나는 제국의 두 남자보다 위라는 이야기 아니야?

“뭐, 그런 생각이 그들을 들끓게 하는 것 같던데요.”

“…다 미친 거 아니야?”

상황이 아주 끔찍했다.

저기 미쳐 돌아가는 판에 나는 없었다.

생각하는 것 하고는!

“이대로 두고 보실 건가요?”

“흐음.”

감은 눈 위로 손을 얹고 고개를 젖혔다.

와, 진짜 말도 못 하게 피곤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문제가 자꾸만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아직 갈피를 못 잡았어.”

여전히 황태자비는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소문대로 대공비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황태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는 내 오랜 친우이자 지지하는 제국의 미래다.그런데 대공, 디에고 브라이트는 내게 뭐지? 정말 단 한 번도 내 인생에 그가 밀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정신 차려보니 그와의 관계를 뭐라 정리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지금에 이르렀다.

‘디에고 브라이트와 나…….’

그다지 좋은 조합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피곤한 이름들이니까.

“저는 아가씨가 황후 폐하가 되시건, 대공 마님이 되시건 따라갈 거예요.”

“혼자 사신다고 하시면 저도 후작가에 남을 거고요.”

라고 말하며 눈을 찡긋하는 마리가 귀여웠다.

“그래도 기왕이면 아가씨 닮은 아가가 보고 싶긴 하네요.”

장난스럽게 웃는 마리를 보자 결국 경직된 얼굴이 풀어지고 말았다.

“아가는 진짜 멀리 갔다, 마리.”

이제 더 이상 내게 유예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어정쩡한 자세로 덮어놨던 일들을 이제는 마주할 때가 왔다.

‘하.

진짜 싫다, 싫어.

고달프네, 인생.’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있자 마리가 은밀한 목소리를 내며 말을 걸어온다.

“아, 그리고 아가씨.

전에 말씀하셨던 가문 중에 판델 남작 가문의 가주가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해요.”

“판델 남작?”

“네.

지금 여기저기 돈을 구하러 다닌다고 하던데, 어찌할까요?”

화사한 금발에 금안을 지녀 무려 지금 황태자와 색이 같다는 이유로 꽤나 유명하다던 판델 남작 영애.가문이 한미함에도 그 미모 하나 믿고 그리 콧대가 높다고 하던데, 그 가주며 영애며.

“그 돈.

우리가 빌려주지.”

‘내 짐작이 맞다면.’

어쩐지 비오첼라가 무척 탐낼 인물일 것 같거든.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영애가 지닌 색이 가지는 상징성.

그거야말로 비오첼라가 내다 파는 헛된 망상의 최대치일 테니까.조사해 본 결과, 비오첼라 백작가와 연이 닿은 채 사라진 영애들이 꽤 되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인원을 다 개인이 취하고자 벌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와 관련한 소문이 하나도 돌지 않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영애들.

“…아니길 바랐는데, 노예가 아닐까.”

마리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진다.

“제국 내에서 같은 귀족을 노예로 삼기는 어려울 테고.”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대공령과 맞닿은 슈베른 왕국.

그가 그랬지, 비오첼라가 꽤 많은 물품을 왕국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고.

단순한 상품을 사고파는 문제로 대공이 이를 조사하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다만 그게 노예일 줄은 몰랐지만.

“왕국의 열등감 넘치는 귀족 나리들에게 제국 귀족 출신의 노예란 어떤 의미일까.”

슈베른 왕국은 안정적인 통치와 상업의 발달로 부유했다.

그 많은 부를 축적했음에도 왕국에 머물며 제국에게 때때로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퍽 못마땅한 귀족들이 많겠지.얼마를 지불하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비오첼라와 거래하고 있을 터였다.

“마리, 나는 그런 자들이 끔찍하게 싫어.”

사람을 팔고자 하는 작자나 사람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자, 모두 세상에 하등 필요 없는 존재들이다.

“…….”

눈을 찡그리며 울음을 참아내는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조금 더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지.

“마이어 백작가에 기별 넣어줘.

만나봐야겠어, 레사의 수장.”

어쩐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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