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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9화 (19/109)
  • 19화

    *

    “콘라드, 누가 네 마음을 다 본다면 어떨 것 같나.”

    비비안이 느낄 감정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했다.

    썩 내키지 않지만 그를 물어볼 만한 상대가 콘라드 말고는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제 마음이요? 마음을 알아준다는 뜻인가요.”

    “아니, 말 그대로 네 생각을 그대로 읽는다면 말이야.”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던 콘라드가 인상을 찌푸린다.

    “…끔찍한데요?”

    “끔찍?”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등장에 핏기가 가신다.

    “각하도 알다시피 사람 생각이란 게 어디 아름답기만 합니까.

    게다가 말로 내뱉지 않는 생각이란 건 상대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건데, 으, 저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네요.”

    나도 몰랐던 건 아닌데, 간과했다는 게 맞겠지.손에 힘을 줘 여러 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좀 착잡했다.비비안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기 전까지 저도 콘라드와 같은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그녀가 알아챈 그 순간에 숨기려 했고.

    ‘잃고 싶지 않았던 거군.’

    미움은 받아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예 저를 내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한데 정작 그날, 제 걱정과 어둠을 비비안의 따스한 빛이 단숨에 밀어냈다.

    ‘…생각할 겨를이 없음에도, 제 머릿속이 이미 엉망이었는데도.’

    그 틈에 내 걱정을 하는 게 보였다.

    그게 얼마나 저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는지 아마 비비안은 모를 테지만.그래서 그 강함에 저도 모르게 기댔는지 모른다.게다가 비비안이 하는 모든 생각은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던 터라 제 기준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여겼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은 몰랐는데.’

    소파에 몸을 묻은 채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비비안이 울었다.항상 꼿꼿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그 의연함에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한심하게.”

    굵은 눈물방울이 연이어 떨어지고 울음을 참아내려 짓씹은 입술이 붉었다.

    훌쩍이면서 서러움을 토하는 그녀를 보면서 안쓰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동했다.힘들어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은 쓰레기임에 틀림없다.

    “하아.”

    비비안을 두고 어떤 이가 말로 생채기를 내었는지 다 찾아내겠다며 이미 콘라드에게 일거리를 던져주었으나, 제일 큰 원흉은 아마.

    ‘난가.

    반쯤은 내가 울린 것 같군.’

    - 창피해.

    매번 나만 부끄러운 생각 하고! 그거 각하는 다 보고.붉어진 눈으로 코를 훌쩍이며 말하던 비비안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나온다.

    “부끄러운 생각이라.”

    비비안의 생각은 귀여웠다.

    아마 제 생각을 그녀가 본다면 경악할 테지.

    ‘정말 부끄러운 게 뭔지 얘는 모른다.’

    어떤 것이 정말 창피한 생각이고, 나쁜 마음인지 비비안은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말해야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있다.아무래도, 비비안과 닿아 있을 때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꽤 여러 번 그런 순간이 있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낯설어서, 더 그녀의 눈과 모든 몸짓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그리고 이 사실을 나중에라도 비비안이 알게 되면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할까 싶어 초조해진다.이제 제 욕심이 자라 비비안에게 일말의 미움조차 받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싫어하는 것은 다 내 안에서 몰아내고 싶을 정도로.그러니까 결국…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미쳤군.”

    제 생각의 끝에 도출해 낸 결과가 어이없었다.

    무슨 세 살배기 아이도 아니고.벌떡 몸을 일으킨 디에고가 마른세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지금 당장 비비안에게 가고 싶어진 그였다.*내게 이제 더 내려갈 곳이 있을까.

    가지가지 한다, 나 정말.

    “아직도 믿을 수가 없네.”

    내가 정말 대공 앞에서 대성통곡한 것이 현실 맞나.

    꿈 아니야? 차라리 옆 나라로 떠날까.

    나 제국에서 더는 못 살 것 같아.울다 울다 콧물도 흘린 것 같은데.

    콧물에 코 막혀서 숨을 캑캑대자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

    - 흥 해, 비비안.정신없이 울던 제게 가슴팍을 내어주며 코를 풀라던 대공이 떠올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도저히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있을 자신이 없다.

    ‘어디 머리 한번 박고 기억 잃은 걸로 할까?’

    도대체 걔는 나한테 왜 그러는 거지?조심스레 이불을 끌어내린 나는 눈만 내민 채 천장을 바라봤다.대공을 만나면 그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누구나 그를 앞에 두면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정말 문제는 이렇게 그와 같이 있지 않은 순간에도 지나치게 그에 대해 생각한다는 거다.

    “내가 언제부터 이랬더라.”

    정신 차리고 보니 하루도 그를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이제 나는 대공의 나른한 얼굴, 미소 짓는 얼굴, 못마땅한 표정, 정말 재미있어서 소리 내 웃는 것까지.그의 다양한 모습을 머리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그만큼 그가 내게 보여주었다.대공이 했던 말들 중 어떤 것은 나의 일부분을 지탱해 줘서 이제 떼어낼 수 없는 것마저 생겼다.나를 알아줘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어서.필요로 했던 순간에 내어주어서.

    “…여자 경험이 많은가?”

    뭐가 그렇게 능숙하고 자연스럽고, 막 마음을 건드리고, 어떻게 그러지?

    ‘영지에 애인 여럿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괜히 심각해진 나는 답답한 마음에 몸을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그 얼굴에 그 몸에, 그 나이까지 여자 안 만났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그와 사귀지도 않으면서 억울한 마음이 솟았다.

    그냥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진지하게는커녕 가볍게 스쳐도 보지 못한 자의 분노였다.

    “아직 안 좋아해.

    호감이야, 호감.”

    스스로 세뇌라도 시키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직까진 이 마음에 호감, 관심이란 단어까지만 허용할 수 있었다.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기엔 감당해야 할 것들에 한숨부터 나온다.그러나 우습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커져버린 마음과 기억이 존재했다.그 아우성을 온전히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뻔뻔하지도, 굳세지도 못했다.그리고 그는 내게 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누가 왔다고?”

    “대공 각하요.”

    “…….”

    “아직 오신 것은 아니고 곧 방문하신다고 시종이 기별 넣고 돌아갔어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할 수만 있다면 문을 걸어 잠가버리고 싶다.사냥 대회 이후 며칠이나 지났다고 또 나를 찾아온단 말인가.게다가 그 앞에서 울어버린 일 덕에 나는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부끄러웠다.더 참혹한 것은 대공을 만날 거란 생각에 떨림과 설렘이 커져간다는 거다.

    애써 누르고 외면하고 싶은 그 감정 덕에 거울에 비친 얼굴이 울상이었다.그러나 내겐 선택지가 없다.

    한참을 몸부림치다가 대공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반쯤 울면서 그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슬쩍 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있던 대공과 곧바로 눈이 마주친다.

    ‘놀래라.

    문을 왜 쳐다보고 있어, 쟤는!’

    “비비안.”

    “…각하, 오늘은 또 어쩐 일로.”

    도저히 그와 시선을 맞추는 것이 어려워 바닥을 보며 소파에 자리했다.

    “괜찮은가 해서.”

    뭐가 괜찮은지는 묻지 않기로 한다.

    사냥 대회 관련해서 입도 뻥긋하기 싫었다.힐끗 들어 올린 눈에 보인 그의 얼굴은 처음 브라이트 대공을 보았을 때를 떠오르게 했다, 너무 달라서.아직 그와 내가 한마디 대화도 하지 못했던 때.그때의 대공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아주 잠깐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저런 얼굴이라니.’

    한없이 풀어진 그의 눈매와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햇살이 내려앉은 온기와 밝음이 그의 얼굴에 담겨 있다.

    “너와 마주하고 있어서 그래.”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지금도 다른 이들 앞에선 처음 그대가 본 그 모습 그대로니까.”

    ‘방심했다.

    생각하지 말자.

    어떤 생각도 떠올리지 말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비비안, 쳐다보지 않는 것 말고도 방법이 하나 더 있어.”

    “방법이요?”

    “응, 네 마음을 보지 않는 방법.”

    숙였던 고개가 퍼뜩 들어 올려졌다.

    평범한 일상의 실마리를 발견한 내 눈이 번뜩였다.

    “심지어 이건 그대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지.”

    ‘그래?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말했어야지! 뭔데, 어서 말해봐.’

    잔뜩 기대에 부푼 내 앞으로 그가 불쑥 다가왔다.대공이 손을 뻗어 내 뺨에 갖다 댔다.

    커다란 손이 내 한쪽 뺨을 감싸자 따듯한 온기가 퍼진다.

    ‘뭐 하는 짓……?’

    “이렇게, 닿으면 안 보이더라고.

    그대 마음이.”

    나는 즐거운 듯 웃는 그의 얼굴을 마주한 채 눈을 깜빡였다.얼마간의 정적이 지났을까.

    “…거짓말.”

    나는 그가 나와의 접촉을 위해 파렴치한 수를 쓰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내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는 대공의 눈에 어리둥절함이 비친다.

    “음…….”

    대공이 뺨에 대고 있던 손을 거두며 난감하게 웃는다.

    “못 믿는 모양이군.”

    ‘봐라.

    다 본 거야, 내 마음.’

    괜히 뺨 한 번 만져볼 구실을 댄 것 아닌가.나는 그가 지나간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그를 더 노려보았다.

    “이런 반응은 생각 못 했는데.”

    나는 상체를 뒤로 물린 채 의심스런 시선으로 대공을 훑었다.

    사실 요 며칠 그의 여성 편력을 의심하던 차라 더했다.

    이미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편견이 그를 바람둥이로 확정 지은 참이다.

    “…이건 못 넘어가겠군.”

    눈썹을 들썩이며 인상을 찌푸린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까지 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망설이듯 제 눈썹을 문지르던 그가 눈을 들어 나와 시선을 맞춘다.

    “…누군가 만난 적 없어, 한 번도.”

    “…….”

    “애초에 이렇게 보고 싶은 것도, 오래 대화한 것도, 손이 닿은 것까지 전부 그대가 처음이라고.”

    “…저는 각하의 마음을 보지 못하니 알 수가 없네요.”

    뾰로통하니 내뱉은 내 말에 그가 황당함과 억울함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그러다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꼬리가 상승한다.

    “그러니까 지금 비비안, 질투해 주는 건가?”

    있지도 않은 내 전 애인들을?어머머, 쟤 좀 봐.

    뭐라는 거야! 질투? 내가 그걸 왜 한담!급격히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나를 짓궂게 놀리던 대공이 별안간 소파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이동했다.

    “그보다 오늘은 제대로 확인해 보도록 하지.”

    그가 느리게 손을 뻗어 무릎 위에 얹어진 내 손 위로 포갰다.

    “나도 궁금하거든.

    이게 확실한 방법인지.”

    요사스럽다, 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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