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조금 진정이 되니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누구 앞에서 이렇게 오열한 것이 언제 이후로 처음이더라?
‘내가 낯설다…….’
“저, 안 울어요.”
내가 들어도 그다지 신빙성 없는 말을 읊조리며 대공의 눈을 피했다.
“그래, 그래.”
셔츠의 소매를 당겨 내 눈가를 조심스레 쓰는 그가 너무 다정했다.
그 때문에 좀처럼 울지 않던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얘, 손에 무슨 눈물 짜내는 그런 능력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건 없는데.”
대공의 얼굴에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쳐져 있다.
“여기, 턱이 이상한데.
귀여워.”
그가 내 턱을 검지로 콕, 찌르며 눈을 휘었다.
‘…울음 참는다고 턱에 힘줘서 그런가.
호두같이 쪼글쪼글한 게 분명해.’
“비비안이 보지 말라고 할 때는 안 볼게.
그리고 그대는 그 누구도.”
말을 하던 그가 이내 무언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구긴다.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조심스레 감싼 그가 나를 올려다봤다.
“네 주위를 맴도는 건 나잖아.
꼬시는 것도 나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는 대공의 눈에 내가 비쳤다.
울어서 발개진 눈가와 코, 부끄러운데도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기가 어렵다.
“승마복은, 내가 여태 봐온 누구보다 잘 어울려.
말도 꽤 잘 타지? 보면 알아.
비비안은 말이랑 잘 통할 것 같거든.”
이렇게까지 길게 말하는 그는 처음 봤는데.참 다정하고 다정했다.
“…이만 갈까?”
일어선 대공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만났던 날도 보았던 그 손.
‘이걸 붙잡는 데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망설이며 그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니 이제야 숨이 쉬어졌다.
아까랑 같은 숲이 맞나 싶게 공기가 달랐다.
“…지금은 보지 말아주세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내 옆에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대공을 만나고 연이어 터지는 일들로 확실히 내 삶이 좀 더 피곤해졌다.
내 평생 휘말린 사건의 수를 다 합친 것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지금, 다양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감정은 널뛰기하고 이리저리 사람과 사건에 휩쓸리고, 분명 달갑지 않은 현상인데.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빠르게 갔다.하루가 언제 가나, 지루하게 시간을 곱씹던 일상에 색들이 들어찬다.남들은 다 이렇게 살아왔던 걸까.
내 세상에만 이런 색채가 없었던 것일까.이제 이런 것들을 잃고, 잊고 전처럼 무료한 하루를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게 뭐지, 비비안?”
앞을 보던 대공이 나를 보더니 아리송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은 늑대가 오색찬란하게 빛나는데?”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대공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이거 진짜 안 되겠다.
그게 그렇게 보인다고?’
“…보지 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낮고 간지러운 웃음의 잔재가 잦아들자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본다.
‘아, 늦었다.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는지도.’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느껴지지 않던 감정이 내 안에 자리했다.
나 몰래 그가 씨앗이라도 숨겨두었던 걸까.내 안에 뿌리를 내린 아직은 작고 여린 이것을 나는 차마, 뽑아낼 수 없을 것 같다.*황제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냥 대회, 덕분에 대회의 시작 전 곳곳에 흩어진 귀족들이 제각기 담소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오셨군요, 각하.”
서글서글하게 웃는 데이비드 후작을 돌아본 대공이 눈을 찌푸렸다.
“누구?”
뱉어놓고도 아차 한 디에고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마에 손을 얹은 그가 눈가를 찡그린 채 다시 후작을 보았다.
“…데이비드 후작입니다.”
알렌 데이비드는 끓어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를 잠재우며 눈앞의 대공을 봤다.
‘재수 없는 새끼.’
“아, 미안하군.”
자욱한 회색빛 안개 무리가 디에고의 시야를 덮었다.
불투명한 회색에 검은 먹물이 번지듯 피어오르는 것을 보자 한숨이 짙어진다.
연기가 상대의 얼굴을 가려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데이비드 후작이라.
“아닙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한 제 탓이죠.”
“그대가 나와 자주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비비안을 보고자 사냥 대회에 온 것인데, 정작 절대 다가오지 말라는 거부의 말만 내내 본 대공은 심기가 불편했다.그나마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라도 그녀를 보는 것 자체가 즐겁기는 하다만.데이비드 후작의 시선이 대공을 따라 비비안 윈데이너에게 향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윈데이너 후작 영애는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부드럽게 말을 잇는 데이비드 후작에게 대공의 시선이 옮겨간다.
“그런가.”
그제야 알렌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걸쳐졌으나, 아쉽게도 디에고에게는 그저 질척한 연기만이 보일 뿐이었다.
“후작, 어린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아 힘들지는 않은가.”
“…아버님의 빈자리가 더없이 크니 그걸 메울 수 있을지.”
“저런.”
그의 곁에 있던 귀족 하나가 알렌의 순하고 처연한 표정을 보며 탄식했다.그를 무표정으로 보던 디에고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마이어 백작 영애와 대화하던 비비안의 얼굴에 티 없이 맑은 미소가 한가득 담기자 대공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제가 물어놓고도 그에겐 하등 관심 없다는 듯 없는 사람 취급하는 대공의 옆에 선 알렌의 눈에 불이 일었다.후작에게서 뻗어 나오는 짙은 안개가 덩치를 더해가자 대공이 손을 휘적였다.
“잠시 쉬어야겠으니, 그만 가보게.”
그 더러운 욕망이 비비안을 가리는 것은 못 봐주겠던 대공이 축객령을 내렸다.
“아, 제가 귀한 시간을 뺏었군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각하.”
단번에 얼굴색을 바꾼 후작이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를 선보이며 물러났다.꼿꼿하게 걷던 데이비드 후작이 인적 드문 사냥터 한쪽으로 향했다.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 우뚝 멈춰 선 그가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이내 어깨를 들썩이는 그에게서 분노와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퍼져 나간다.
“하!”
고개를 젖힌 그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다.재작년, 마차 사고로 부모인 후작 내외를 잃은 그는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후작이 될 수 있었다.
어차피 제 것이었던 것을 조금 이르게 받았을 뿐이라 여긴 그는 만족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너 나 할 것 없이 제 앞에서 설설 기는 것에 익숙해진 그에게 황태자와 대공은 제 속을 진창으로 처박는 존재들이었다.특히 자신을 버러지 보듯 하는 대공의 시선, 저를 한낱 미물인 양 거들떠도 보지 않는 그 태도.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웃어야 하는 제 처지.
“…황제가 당도했다고 합니다.”
시종이 후작에게 말을 전하고 죽은 듯 몸을 사렸다.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른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 거지 같은 기분이 좀 나아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심하며 그가 발길을 돌렸다.
“아가, 승마복이 이리 잘 어울리는지 미처 몰랐구나.”
황제의 말을 들으며 어색하게 웃는 윈데이너 영애, 황족을 구슬리는 재주라도 있는 것인지.
‘예쁘긴 하군.’
황태자와 대공이 한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더니, 헛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여색은 밝히지 않는다는 듯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만.
‘결국 다 같은 놈들인 거라고.
너희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알렌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금세 자취를 감췄다.귀족들이 모이는 자리면 온통 제게 잘 보이려 아부를 떨던 이들이 저 둘의 등장으로 제 존재를 지울 때마다 어찌나 치욕스럽던지.근래 저치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엔 어김없이 비비안 윈데이너가 있었다.
‘비비안 윈데이너라.’
그의 끈적한 시선이 비비안을 훑었다.
그동안은 황태자에게 딱 붙어 있었기에 그다지 제 흥미를 끌지 못했으나 다시 찬찬히 보니 제법 쓸 만한 외모였다.그리고 그런 알렌의 음험한 시선을 매섭게 바라보던 황태자가 비비안을 한 번 보고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여태 비비안 모르게 그녀 주위로 몰리는 인사들을 꼼꼼히 살펴왔던 리안이 데이비드 후작을 곁눈질하고 사냥터로 돌아섰다.휘잉―황태자의 화살이 짐승의 숨통을 한 번에 끊어낸다.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탄 어린 칭찬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리안이 말 위에서 짐승을 내려다봤다.숨이 멎은 것을 확인한 그의 눈에 동정이 스쳤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고통이라도 줄여주는 것이 예의라 여긴 그가 속으로 짧은 애도를 전했다.뒤이어 들어섰을 다른 귀족들을 생각하며 황태자가 데이비드 후작을 떠올렸다.
‘그자에게 경고해 둘 필요가 있겠어.’
사냥터를 배회하던 황태자가 탁한 금발의 후작을 보고 다가갔다.
“후작.”
부름에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갈무리되지 못한 섬뜩한 미소가 남아 있다.황태자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서 헐떡이는 짐승에게 옮겨갔다.
딱 죽지 않을 부위에 화살이 여럿 꽂힌 채 피를 흘리는 가련한 짐승의 모습에 리안의 가슴이 싸해졌다.
“아, 전하.”
어느새 무해한 얼굴로 웃는 그 낯짝이 황태자는 우스웠다.제 영지에서 다 수습하지도 못할 만큼 방탕하게 노는 그가 어디 감히 그 눈으로 비비안을 훑는단 말인가.무감한 눈으로 후작을 보는 황태자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갑작스레 후작 내외를 잃어 상심이 클 테지.”
“…영지민들을 생각하면,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는지라.”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군.
나는 그대가 영지가 아닌 수도 저택에서 종종 크고 작은 연회를 연다기에, 부모 잃은 공허함을 달래려는 아이의 마음이려니 하고 측은하게 여겼는데 말이야.”
유려하고 우아하게 한가득 말을 쏟아낸 리안이 웃었다.반면 처연한 미소를 유지하던 후작의 얼굴에 순간 금이 갔다.
“…예, 아직은 텅 빈 영지의 저택이 낯설어 수도에 오면 이래저래 연이 닿은 이들과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그만.”
“그래, 그럴 수 있지.
아직 그럴 나이 아닌가.”
저보다 어린 나이의 황태자가 내리깐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짓눌리는 기분을 느낀 알렌의 입매가 부들거렸다.
“그럼 이만, 후작의 사냥을 방해하지 않겠네.
그대의 사냥 솜씨가 시간을 제법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으니.”
미련 없이 돌아서 가던 황태자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후작,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가진 것을 지키는 일만으로도 그대에겐 벅찰 테니.한참을 굳은 채 황태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후작이 검을 들어 고통에 몸부림치다 지친 짐승의 몸을 난도질했다.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