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래서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보낸 게 그대인가.”
스텔라를 향한 대공의 시선에 경멸이 섞인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터무니없다뇨.
아주 극비 사항만 친히 적어 보내 드렸습니다만.”
그러니까 지금 스텔라가 그 레사의 주인이고! 대공이 레사에 그녀에 대한 정보 의뢰를 했다, 이거지?그런데 왜? 그가 스텔라의 정보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인가.
“뭐가 적혀 있었는데요?”
무언가 잔뜩 못마땅한 듯 대공이 답했다.
“…싫어하는 음식, 뭐 이런 거더군.”
아, 그거 나도 알고 싶은데.
나중에 달라고 하면 줄까?
“내 것이라면 나중에 주지.”
아니, 네 것 말고 스텔라 거.
각하가 뭘 싫어하는지 내가 알아서 어디다 쓴단 말인가.그렇게 서운하다는 눈빛 보내도 어쩔 수 없다.
나도 아까 간절하게 눈 좀 돌려달랬더니 네가 뭐라 그랬니!난 아직 그 입 모양의 황당함을 잊지 않았다.그리고 이제 슬슬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너희는 쟤네, 신경 안 쓰이니?’
“저 둘은 내가 보낸 이들이라 치고, 저건 또 뭔가.”
저거는 어떻게 봐도 사냥 대회에 참석한 귀족 영식임에 틀림없었다.
“오늘 초대장을 돌리는 날이거든요.
저도 하나 받아볼까 해서요.”
스텔라가 손에 든 것을 흔들었다.받는다고? 강탈한 거 아니야? 저 남자, 살아 있기는 한 건가?그사이 그녀의 뒤편에서 조용히 나타난 복면의 사내가 스텔라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라졌다.
그녀가 쓰러져 있는 영식을 발로 뒤집더니 그 품 안에 좀 전에 건네받은 것을 쑤셔 넣는다.
‘너, 뭐 하는……?’
스텔라가 제 손에 든 봉투를 열어 장식이 새겨진 금화를 꺼내 보여준다.
“이건 좀 특별한 초대장이라.
미리 만들어둔 가짜와 바꿔치기하는 중이랍니다.”
“허!”
대공의 헛웃음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런 거 우리한테 다 보여줘도 되는 건가?
“원하는 게 뭐지, 영애.”
스텔라의 입꼬리가 진하게 미소를 그렸다.
“비오첼라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도박장, 그 안에 존재하는 진짜에 대한 정보.”
사시겠어요?
“…그걸 왜 내가 살 거라고 생각하는데?”
대공에게 향했던 그녀의 시선이 곧장 내게로 향했다.
오늘따라 한층 생기가 도는 스텔라의 눈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갔다.
“영애, 제국의 썩은 가지에 대해 관심 있으신가요?”
썩은 가지라.
난 지금의 제국도, 그를 지탱하고 있는 황가도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그러니 좀 더 나은 제국, 일하는 황가를 위해 내 시간과 노력을 어느 정도 기꺼이 내어줄 마음이 있다.
“있죠.
그걸 도려내는 데 관심 많아요.”
그런 일 하는 것이 황가와 그 신하들, 아니겠어요?
“그렇죠, 각하?”
그리 말한 나는 고개를 들어 대공과 눈을 맞췄다.
황족이자 제국의 신하 아니십니까?
“특별히 500골드에 드리지요.”
500골드면 마차 한 대 값 정도 되려나.
‘각하, 그 정도 충분히 있잖아요?’
깊은 한숨을 내쉰 대공이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어쩐지 심통이 난 아이처럼 날 보던 그가 스텔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게.”
“어머.
정보가 500골드, 이 금화 초대장도 500골드.
도합 1천 골드 되시겠습니다.”
스텔라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저런 미소 처음 본다.
그녀는 수완이 좋았다.
저 정도는 되어야 한 단체의 수장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멋져.’
대공이 지친다는 듯 손을 저었다.
“콘라드, 지불해.”
“그렇게 돈은 모아서 뭐 하려고.”
라는 대공의 심드렁한 질문에 스텔라가 여상히 답했다.
“글쎄요.
돈은 그저 수단이라.”
‘레사, 레사라.’
레사에 관해선 나도 생각해 둔 바가 있는데, 이거 우연히 엄청난 것을 얻어가네.뱃놀이도 그렇고 사냥 대회도 그렇고.
덕분에 내 정신은 마구 상처 입었지만, 나쁘지만은 않아.스텔라가 손을 흔들며 선심 쓰듯 한마디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매력적인 악당 같다.
“저는 정보로 판을 흔드는 것이 좋은 거랍니다.”
“그것참, 음습한 취미로군.”
판을 흔든다라.대공은 가벼이 웃어넘겼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비오첼라 도박장 안의 진짜.’
그럴 만했다.
제국법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은 만족스러운 돈을 가져다주지 못했겠지.셀빈 자작이 탕진한 금액이 이미 어마어마했다.
뭐, 비오첼라가 빌려주고 비오첼라가 다시 회수해 간 셈이지만.
사람을 담보로 들먹일 수 있는 한정된 공간, 분명 있겠지.
“각하, 이미 알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어째서 스텔라가 휘두르는 대로 어울려준 걸까.
“…비비안, 그대가 원했잖아.”
어울리지 않게 삐친 듯한 표정의 그가 나를 향했다.
“정말? 저 그냥 한 말인데, 그것 때문에?”
놀란 얼굴로 대공을 살피자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이내 입꼬리를 올린다.
“겸사겸사.
레사는 아군으로 두는 편이 좋지 않겠어?”
“아.”
그렇지, 레사.
그 레사라니.
그런데 왜 스텔라는 정체를 드러낸 거지?
“레사의 수장이 그대를 퍽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은데.”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휘는 그의 얼굴이 온화했다.나는 귀족을, 힘이 있는 자들을 쉽게 믿지 않는다.
날 때부터 그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수군대는 귀족들 사이에서 적당히 어울리며 사람을 사귀는 방법은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보에 그렇게 목을 맸지.
아는 게 많을수록 유리하다 여겼으니까.’
그렇게 살아온 거의 모든 나날을 조금은 외롭게 버텨왔다.
그리고 덕분에 믿고 싶은 자들을 분별해 내는 능력만은 뛰어나다 자부한다.대공의 옆모습을 보며 인정해야 했다.
‘이미 믿고 있네, 나.’
스텔라와 대공의 보좌관이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나는 대공에게 속삭였다.
“…각하, 비오첼라는 사라져도 모를 한미한 가문의 외모가 뛰어난 영애들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요.”
제국의 구석구석 수백 개의 가문을 들여다보았다.
“지난 3년간 행방이 묘연해지거나 죽었다 여겨지거나 병으로 칩거했다 알려진 이들을 알아봤어요.”
그리고 그들 중 비오첼라가 운영하는 도박장에 한 번이라도 갔던 이가 얼마나 되는지.
“꽤 되더군요.
그리고 최근 그 덫에 걸려 있을 법한 가문들도 뽑아봤는데.”
무력도, 당장 휘두를 권력도 없는 제게는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비비안, 폐하가 그대를 탐내는 이유를 알겠어.”
“제가 좀 유능하죠?”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내 웃은 대공이 손을 들어서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왜 없어.
네가 나를 휘두르는데.”
한없이 느리게 그의 손가락이 귓바퀴에서 귓불로, 목선까지 닿을 듯 말 듯 훑어 내려갔다.
“내가 네 무력이고 권력이야.”
*
- 그럼 뒷정리는 제가 할 테니 먼저 돌아가시지요.할 일을 다 했는지 한껏 상쾌해 보이는 스텔라와 대공의 보좌관을 두고 나는 그와 돌아 나왔다.이렇게 둘이 거닐고 싶지 않아서 스텔라에게 붙어 질척댔으나 그녀는 차가웠다.한적한 숲을 거닐자 내 몹쓸 버릇이 튀어나온다.
이제 정말 이런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그는 승마복도 잘 어울렸다.
“승마복 입은 거 취향인가?”
‘또, 또! 멋대로 내 마음 읽지?!’
“난 또, 자꾸 벗기길래 아무것도 안 걸친 게 그대 취향인 줄 알았지.”
얄궂은 대공의 발언에 눈물이 핑 돈다.
내가 또 언제 그렇게 너를 벗겼나.한 번? 두 번? 세 번……?
‘하아, 나 정말 변태였나?’
“비비안, 승마복이 익숙해 보이는데.
혹시 말 탈 줄 알아?”
“…저요?”
“응, 어쩐지 자주 입어본 태가 나는 것 같아서.”
“내 착각일 수 있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그의 말투가 여상했다.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알아채는 거지?
“…후작가가 소유한 숲이 있어요.”
말을 타고 달리기에 무척 적합하죠.
꽤 좋아해요.
“역시, 그랬나.
다음에 나도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군.”
그가 앞을 바라보느라 나를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 하는 생각은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다.왜 네가 나를 알아봐 주는지.
어째서 드러내지 않은 내 모습을 자꾸 끄집어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인지.
“…그리고 아까 많이 힘들었어?”
그가 여전히 앞을 보며 내 걸음에 맞춰 걸었다.
“심술부려서 미안해.
며칠 만이라, 계속 네게 눈이 갔어.”
전보다 더 수군대는 귀족들 험담을 흘려듣는 게 익숙한데.
그런데 그런 나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달래준 이는 없었다.당황스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하필 가장 의외의 인물에게 듣게 될 줄이야.여태껏 켜켜이 쌓아두기만 했던 힘겨움이 대공 앞에서 범람하려 했다.
‘왜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것처럼 그래?’
좀 전 대공과의 대화가 계속 내 가슴을 뛰게 했다.내 노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내 안에 자리 잡았던 허탈함까지 날려버려 주는 이.
- 내가 네 무력이고 권력이야.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워 멈춰 서자 대공이 그제야 나를 돌아본다.
“비비안? 왜 그래, 어디 아파?”
당황한 그가 바짝 다가와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왜 또 다정하게 굴어, 원래 그러면 더 우는 거 모르나!
“여기 잠깐 앉아봐.”
나는 대공의 손에 이끌려 커다란 바위 위에 앉혀졌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나를 올려다본다.
“왜 울어, 응?”
이건 아닌데, 여기서 내가 왜 우나! 입 안의 살을 깨물어도 보고 눈에 힘도 줘봤지만,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린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어 입술을 물자 그의 손이 스치듯 내 입술을 건드렸다.
“괜찮아.
그러다 상처 나.”
대공의 속삭임이 끝내 내 마지막 이성을 날려버렸다.
“내, 내가 쳐다보지 말라고 흑, 그렇게 말했는데.”
“응, 그랬는데.”
이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는 새 훌쩍이며 입이 멋대로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보고 대체 뭘로 둘이나 꼬신 거냐며!”
그래도 이 와중에 험하고 상스러운 단어들을 순화시키는 스스로가 다행이었다.
더불어 정치적인 이야기로 나를 몰다 못해 가문의 이름을 들먹이던 모욕도 삼켰다.
“응.
그리고 또?”
“꼬, 꼴에 승마복 입고 왔다면서.”
승마복은 내가 지들보다 훨씬 더 많이 입었는데! 억울하다, 억울해.이것도 힘들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들고.
“각하는! 자꾸 창피한데, 흑, 내 마음 보고.”
너무 창피해서 못 살겠고.
지금 이러는 내가 이미 후회스럽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