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설마.”
고개 들어봐.
너 왜 귀가 그렇게 빨개?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든 그의 눈가가 묘한 열기를 담고 있다.이내 눈을 감은 대공이 한참 만에 손을 내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각하, 왜 그러세요?”
고개를 기울여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보던 그가 입매에 힘을 줬다.
“몰라서 물어?”
내가 생각하는 거 아니지? 말도 안 된다, 진짜.
‘거짓말! 그럼 방금 내가 떠올린 거는?’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의심하긴 했지만 진짜 그런 게 될 거라고 누가 믿어? 그냥 나는 정말!고개를 들 수가 없다.
“비비안?”
“…….”
누가 꿈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도망, 갈 건가?”
도망? 의아한 단어에 고개를 들자 잔뜩 찌푸린 표정의 대공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솔직히 지금 너무 창피해서 당장 도망가고 싶기는 한데.그렇게 인상 쓰면서 물어보면 제가 어떻게 진실을 말하나요?
“제가 왜 도망을 가요?”
침착한 척해보지만 이게 소용 있는 일인가? 쟤가 지금 내 마음 읽는다는데!
“아.
용감하네, 비비안.”
언제 긴장했었냐는 듯 샐쭉 웃는 대공의 얼굴에 여유가 돌아왔다.그러나 나는 여유 따위 없다.
“…진짜 사람 마음 읽고 그래요?”
제발, 아니라고 해.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어!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공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가셨다.한참을 말없이 눈만 맞추고 있던 그가 손을 들어 제 눈썹을 문지른다.
이윽고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쉰 대공의 얼굴이 서늘했다.
‘무섭게 왜 무게 잡고 그래.’
“그대 생각이 보여.”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말을 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는데, 비비안은 그게 확실하게 보여.”
대공의 담담한 어조는 무슨 의미 없는 일상에 대해 말하는 듯했으나, 그런 말투와 다르게 내게는 참담하게 보였다.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패잔병처럼.분명 무표정인데 왜 이렇게 느껴지는 거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대공의 주먹 쥔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 거야.
“…저 더 확인해 봐도 돼요?”
여전히 믿기 힘들다.
그러나 그가 떨고 있었다.
“어떻게?”
살짝 눈을 크게 뜬 대공이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좀 더 가까워진 거리만큼 그의 눈 속에 담긴 내 모습이 잘 보였다.다행이다, 그가 상처받을 만한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아서.
“제가 뭘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또 얼굴을 붉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아, 간신히 민망함을 누르고 있는데 저 얄미운 표정 뭐야.
나만 부끄러웠어? 좀 전에 얼굴 가리고 귀 새빨갛게 물들였던 사람 어디 갔나.어딘가 기대감이 묻어나는 그의 표정이 부담스러웠지만 끝내 나는 정말 마음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을 떠올리기 시작했다.가령 처음 대공을 보고 떠올렸던 늑대가 초콜릿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어제 마리와 함께 먹은 스테이크 같은 것들.
“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그 늑대, 나인가?”
너무 놀라 의자에서 엉덩이가 들썩일 지경이다.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이는 대공의 고개가 갸웃했다.
“폐하가 그대를 절벽의 꽃이라 불렀던 날, 그때부터지 아마? 날 보면서 자주 그 늑대를 떠올리는 것 같던데.”
“…그리고 어제저녁은 든든하게 먹었네.”
내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을 망연하게 쳐다봤다.네가 뭐, 내 엄마니? 나 먹는 거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건데?
‘이게 아니지! 진짜다.’
“…진짜네요.”
내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동공이 속절없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대공이 아무 때나 불쑥 튀어나오는 통에 좀 자주 만났는데! 그동안 무슨 마음이었지, 나?기억할 수 있는 첫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나 이 혼란 속에서 체계적인 사고가 가능할 리 없었다.
‘내가 대공 욕을 했던가……?’
“…제가 그동안 혹시 각하께 죄를 지은 적이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말이야.
속으로 누구든 욕도 좀 하고 부끄러운 생각도 하고 다 그런 거 아니야? 다 그렇게 살잖아.
“죄는 아니지만 오늘이 가장 당황스럽긴 하더군.”
나는 양손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를 쳐다볼 용기도 안 나고 어떻게 좀 숨어보고 싶고, 힘도 없어서 머리를 받치고 싶기도 했고, 그랬다.
“…솔직히 이런 건 진짜 각하가 봐주셔야 해요.”
너무 억울해서 그가 뭐라고 경이라도 친다면 통곡할 자신 있다.
지금 당장 오열 가능이다.
“비비안, 나 좀 봐봐.”
대공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잡고 살며시 옆으로 밀었다.
그 손길이 또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유리라도 된 기분이다.고개를 들자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시선을 맞춰온다.
“미안해.
내가 멋대로 너를 들여다봐서.”
그의 눈이 진지했다.
“내가 본 네 안에서 잘못된 건 하나도 없었어.
물론 잘잘못을 따진 적도 없지만, 비비안이 걱정하는 것 같아서 해두는 말이야.”
“…보고 싶어서 보는 거 아니죠?”
각하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잖아요.곧게 내 눈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살짝 옆으로 비껴갔다.
지금 내 시선 피한 거니? 그거 무슨 의미인 거죠.
나 지금 등골이 싸늘한데.
“…조절할 수 없는 건 사실인데,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라서.”
시선을 내린 그의 눈 밑으로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웠다.
우리 사이 거리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손을 뻗으면 그의 모든 것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슬금슬금 앞서는 손에 힘을 줬다.
‘미쳤나 봐, 진짜!’
하필 내가 욕망에 젖은 손 때문에 잔뜩 인상 쓴 순간, 대공이 눈을 들었다.
“역시 불쾌하지?”
“네?”
창피하고 당황스럽긴 하지만 불쾌하다고 말할 감정은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내 마음을 부정하거나 이용한 적이 없었으니까.대공의 머리에 늑대의 귀가 뽁 튀어나오더니 축 처졌다.
그렇게 보였다.
“지금은 안 보이세요? 제 마음, 불쾌한가요?”
잘 보라고 그와 눈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묘한 표정의 대공이 자신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귀 안 튀어나왔어요.”
그 어리숙한 모습이 또 우스워 장난스럽게 미소 짓자 그가 소리 내 웃었다.
“이래서 내가 자꾸 그대가 보고 싶은 거 같아.”
아, 그러니? 나도 네 머릿속을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계속 궁금할 것 같기는 하다.
“저는 이제 더 각하가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나만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인데.
알몸? 이런 거 생각하면 그것도 보이는 거 아니야?!
“…쳐다보지 않으면 안 보이니까.
지금 하고 있는 생각 끝나면 말해줘.”
이건 아니야.
이 남자는 진짜 아니다.
“…각하, 제가 아직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너무 오래 바람을 쐰 것 같군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나 더는 너랑 대화 못 하겠다.
이제 내게 더 이상 남은 정신력이 없다, 없어.*나는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상점가로 기어 나왔을까.
대공이 영지로 돌아간 지금이 적기라 여겼건만.
“뱃놀이 때 쓰러지셔서 어찌나 놀랐던지.
지금은 괜찮으신 건가요?”
청순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입으로 유명한 비오첼라 영애가 물꼬를 텄다.
“예.
보시다시피 멀쩡하답니다.
저 때문에 즐거운 유희가 일찍 파한 것 같아 안타깝네요.”
“무슨 그런 말씀을! 충분히 즐거웠답니다.
그렇지요?”
비오첼라 영애가 양옆에 자리한 다른 영애들을 두루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한 편의 연극처럼 그녀들이 과장된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인다.그래, 내 덕에 무료한 뱃놀이가 한층 볼만했겠지.소문도 살피고 가능하다면 잠재워보고자 나간 자리에서 오히려 잔뜩 먹이를 던져준 꼴이다.
황태자랑 대공 둘 다 그런 자리는 거들떠도 안 봤으면서 왜 그날은! 어휴, 말을 말자.
“마침 그 자리에 대공 각하가 계셔서 영애가 다치지 않았죠?”
얘는 황태자가 아니라 대공 쪽인가 보네.
입은 웃는데 눈이 매서웠다.
‘각하, 이것 보세요.
덕분에 적이 이렇게 늘었답니다.’
“예, 마이어 백작 영애도 함께 저택으로 와준 덕분에 달리 큰일이 없었지요.
두 분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단둘이 아니고 셋이었다? 그러니까 헛소리 퍼뜨리고 다니지 말라고.
“모습을 잘 보이지 않으시던 각하가 근래 저희와 자주 어울려주시니 어찌나 좋은지.”
내 말은 듣지 않는구나.
“영애께서도 이번 기회에 각하와 친분을 쌓으셨나요?”
너보다는 대화를 많이 해본 것 같지만, 말해 뭐 하랴.
“글쎄요.
그다지 자주 만나뵙진 못해서 친분을 논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군요.”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숨기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뒤이어 영애들이 늘어놓는 대공에 대한 찬사가 들려왔다.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정원에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 상대의 얼굴이 잘 안 보일 때가 많아.
연기 같은 게 흘러나오니까, 가끔 그게 시야를 가리지.괴로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괴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무뎌져서,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순간을 상정하지 못하는 사람 특유의 체념이었다.지금 여기 그가 있었다면 어떤 것을 보고 있을까.
‘그다지 좋은 건 못 봤을 것 같네.’
“…아가씨.”
조심스레 다가온 마리가 한 발짝 뒤에서 내 귓가에 손을 댔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마리와 나는 서로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연기를 했다.
이게 다 오랜 세월 다져온 합 아니겠는가!
“저는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네요.
영애의 티타임에 동석하게 되어 즐거웠어요.”
“저희야말로 우연히 영애를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었답니다.”
뭔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탐색과 어떤 말로 날 깎아볼 수 있을까를 고심하던 비오첼라 영애의 얼굴이 심드렁했다.네게도 무의미한 시간이었겠지만 난 더했다.
괜히 대공 생각만 잔뜩 하고 돌아가네.그들을 뒤로하고 나오자 바람이 불었다.
초록이 무성하던 정원에서 대공을 마지막으로 본 날, 햇볕과 나무 그늘로 뒤범벅된 대공에게서 그 계절의 향이 났다.그의 머리칼이 내 관자놀이를 간지럽히며 귓가에 속삭이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아 귀를 매만졌다.
- 비비안, 여름에 보지.그가 돌아온다던 여름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