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마음이 훤히 보인다는 것 】
“황태자를 끼고 살던 비비안 윈데이너, 브라이트 대공마저 발아래 깔다.”
숙연해졌다.
“…….”
무거운 정적이 방 안을 내리눌렀다.
“누가 처음 입에 담았는지 모르지만 저게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에요.”
“…나 언제 암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거 아니야?”
쟤네 둘을 추종하는 세력 합치면 그게 바로 제국 아닌가?
“아니죠.
오히려 어디 무서워서 아가씨 손끝 하나 건들 수 있겠어요?”
“표현은 또 왜 저렇게 자극적이야?”
내가 언제 황태자를 끼고 살았어, 대공이 어딜 봐서 내 발아래 깔리게 생겼냐고.
나를 깔았으면 깔았지!
“그리고 저 태피스트리, 이만 치워야 하지 않을까요?”
마리의 담담한 얼굴이 벽면을 가득 채운 미인들에게 향했다.
“…둘이 한참 저걸 봤다고?”
“예, 각하는 왜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자는 없는 거냐고 항의도 하셨어요.”
미쳤다.
앞날이 아득했다.하필 쓰러져도 거기서 쓰러져? 그렇게 아픈 척했어도 한 번을 안 쓰러지던 몸이 하필이면 왜 그때?
‘내 몸, 너무 눈치 없는 거 아니니?’
“그래도 마이어 백작 영애가 여기까지 와줄 줄은 몰랐는데.”
대공하고 단둘이 저택으로 돌아갔다는 소문까지 더해졌으면 일이 더 커졌을 텐데 덕분에 살았다.그리고 그제야 나는 방을 가득 채운 꽃과 선물 상자들을 바라봤다.
“…이게 다 전하가 보내온 거라고.”
“예, 아가씨 쓰러진 날부터 매일 오고 있어요.”
마리가 들고 온 은쟁반 위 세 장의 서신엔 모두 황태자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온통 걱정이 담긴 그의 서신을 보자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만 접하면 리안은 매번 이렇게 서신과 선물을 잔뜩 보내왔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직접 찾아오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그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후작가에 발걸음 하지 않았다.황태자의 서신을 확인하고 고이 접어 내려놓자 은쟁반에 검은 봉투로 봉해진 서신이 남았다.
‘제국의 유능한 정보상 중 윈데이너의 돈 안 들어간 곳이 없을 거다.’
내 취미가 돈 주고 정보 취합하기다.봉투를 열자 여러 장에 걸쳐 작은 초상화와 신상이 적힌 글이 이어졌다.연회장 테라스에서 대공과 나누었던 대화 이후에도 끊임없이 생각했다.
어째서 귀족 영애를 노렸을까.셀빈 자작가는 지방의 영세한 귀족가였다.
점점 스러져가는 가문이라 그에 대해 기억하는 이조차 적었건만 단 한 가지.
셀빈 자작 영애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었다.
‘아름답다고.’
“비오첼라 백작이 여색을 밝혔던가.”
그래서 그저 자신이 취하고자 일을 벌였던 것일까.
단지 그것뿐이라면 어여쁜 여인은 수도 내에도 많았다.
‘자작에게 융통해 준 도박 자금이 지나치게 커.’
그건 자작 영애가 목표였다는 건데.
그만한 돈을 지불하면서 얻으려던 게 정말 무얼까.머리부터 발끝까지 탐욕으로 가득하던 비오첼라 백작.그가 가장 집착하는 것은 돈이었다.
백작가라는 이름에 비해 이렇다 할 권력, 재력, 명예도 없던 비오첼라가 단숨에 사교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돈 덕분이었으니까.
‘벌인 사업들이 성공했다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벌어들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야.’
나는 어느새 침대 위를 가득 메운 초상화와 종이들을 훑었다.
“…이거 너무 무식한 방법인가?”
도박 빚을 진 것에 비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재력.
힘없는 가문에 비해 외모가 특출난 영애.
이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귀족의 신상을 요구했다.그리고 생각보다 많았다.
“세상에 예쁜 사람 참 많아, 그렇지?”
나와 함께 이것들을 살피고 분류할 마리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신을 내려다보았다.그와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후작의 얼굴이 보이자 마리가 재빨리 서신을 치웠다.
“비비안.”
“아버지?”
나는 일어나려 했으나 만류하는 아버지의 손짓에 도로 침대에 기대앉았다.
“누워 있거라.
몸은 좀 괜찮으냐.”
“네.
푹 쉬었더니 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의 얼굴에 수심이 깊었다.
진작에 입궁해서 집무를 보고 있어야 할 그가 이틀째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저 이제 정말 괜찮은데, 궁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한껏 미간을 찌푸린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보려던 참이다.”
여전히 곁에서 머뭇대는 그의 모습이 의아했다.
나를 한 번 보고 바닥을 한 번 보고 다시 나를 보고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나 본데.
“뭔가 할 말 있으세요?”
천천히 뻗어온 손이 내 손을 잡고 나머지 손은 손등을 토닥이며 말이 이어졌다.
“…비비안, 아비가 충분히 막아줄 터이니 이제 그만 몸 상할 만한 일은 그만두거라.”
희미하게 웃으며 내 대답을 종용하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먹먹해진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미소 짓는 아버지를 껴안았다.
“감사해요.”
“그래, 이만 가볼 테니 쉬고 있거라.”
문으로 향하던 그가 멈칫하더니 단호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대공에게는 아비가 감사를 표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각하께요? 그래도 제가 직접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고개를 젓는 얼굴이 비장했다.
그렇게까지?
“아니다.
그는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어쩐지 혼잣말처럼 연이어 되뇌던 그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듯 저택을 나섰다.*아버지 말이 맞았다.아니야, 그는 정말 아니다.나는 커다란 나무가 에워싼 정원 한쪽 테이블에 자리한 채 그를 마주했다.
“괜찮다니 다행이군.”
우거진 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 대공의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야속하게 그게 또 한 폭의 그림 같아 자꾸 감상하게 된다.
“그날은 감사했어요, 각하.”
차라리 네 품이 아니라 바닥으로 쓰러진 것이 나았을 텐데!
“그대가 다치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었지.”
뭐가 좋은지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여태 저택으로 날 만나러 온 사람은 리안이 전부였다.
‘…내 인간관계, 무슨 일이지?’
종종 후작가에 들러 소소한 시간을 갖곤 했던 황태자가 공식적인 사유가 없는 이상 찾아오지 않겠다며 명분 없는 개인적 방문의 끝을 알려온 날이 있었다.그날 마차에 몸을 싣던 그의 말과 표정이 기억난다.
- 비비안, 널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리안의 나이가 열여섯이었던가.처연하기까지 했던 그 얼굴이 눈앞의 대공과 겹쳐졌다.
아마 황태자도 내 상태를 보러 오고 싶었겠지.그런데 이 인간은 뭔데 이렇게 거리낌 없이 우리 집에 쳐들어오는 거지? 저렇게 해맑은 웃음으로?
“식사는 잘 하고 있는 건가?”
집요한 눈이 내 몸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감각이 예민해진다.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 역시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파도가 치긴.”
내 손목에 머물던 그의 시선과 내 시선이 얽혔다.깨어난 직후 내내 생각했다.쓰러질 때 분명 그가 했던 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했던 그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파도, 쓰러지기 전 마치 땅이 파도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그러니까 정확히 내가 마음속으로 했던 그 말.
“각하께서 하신 말씀인데,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한층 깊어진 눈이 매서웠다.대공이 내 마음을 읽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물론 그만큼 그가 날카롭고 예민하다는 뜻이었지, 말 그대로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그 상황에
‘파도’
라는 단어가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뭐,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의식이 희미해지던 참이라, 제가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테이블 위에 놓인 초코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저번 상점가에서 대공을 만났을 때 갔던 가게의 것이었다.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케이크를 챙겨주던 그.
“이 케이크, 기억나세요?”
“맛있었나 보군.”
눈을 휘며 웃는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사실 초코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다음에 사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각하가 그날 사주셨죠.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상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대공을 향한 내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찜찜하다.혹시 정말 그가 마음을 읽는다면 지금도 알고 있을까.사실 그가 저택에 당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 이미 이 지워지지 않는 가설을 확인해 보고자 결심했었다.어차피 이 허무맹랑한 내 짐작이 틀렸다 한들 손해 볼 일은 없으니, 나는 확인을 해봐야겠어!의심이 싹튼 이후 내내 생각해 온 방법.
‘좋아.
방법은 이것뿐이야.’
대공의 얼굴에 머물던 시선이 도드라진 목젖을 지나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그리고 머릿속에서 대공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러면 쟤도 당황하겠지, 정말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바빴다.
머리로는 그를 희롱하며 눈은 대공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찻잔을 들어 입가로 향하던 대공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다시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모습은 제 알몸을 상상하는 이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닌가? 역시 내가 과하게 생각한 걸까.’
“비비안 방에 있던 태피스트리, 꽤 인상적이던데.”
올 것이 왔구나.
그게 남아 있었어.
이 문제에 대해서도 뭐라 말할지 고민했으나 그 어떤 답도 구차하기만 했다.
“…제가 미인을 좋아한답니다.”
“혹시 취향이 금발 아니면 적발인가?”
그건 그냥 그 색이 화사해서 그런 건데.
눈앞의 흑발에 시선을 주느라 답을 늦추자 찻잔을 보던 대공의 눈꺼풀이 유려하게 들리며 오묘하게 빛나는 푸른 눈이 드러났다.
‘흑발, 푸른 눈의 미인이라.’
좋다.
색이 다 무슨 소용이야.
“딱히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닌데, 각하는 있으세요?”
“나는 분홍 머리에 보랏빛 눈이 취향인 것 같은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는 대공을 보자 심장이 요동쳤다.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을 그가 알까 두려웠다.한 번만 더 확인해 보자.이건 내게도 꽤 위험을 감수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게 아니면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자, 이번에도 반응이 없으면 이제 의심 안 한다!’
이윽고 대공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지고 그대로 테이블 위로 무너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그가 중얼거렸다.
“…그만.
비비안, 이제 됐어.”
디에고 브라이트의 귀가 새빨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