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평소 잘 가지도 않던 연회며, 황궁이며, 상점가까지.
‘이건 모를 수가 없었겠군.’
제가 비비안 윈데이너의 뒤를 쫓으면서도 매번 우연이라며 늘어놓은 성의 없는 변명, 그녀 또한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상점가에서 만났을 때는 제 뒷조사를 했다 시인까지 하지 않았나.황궁 도서관, 저기 보이는 그녀의 행적을 뒤쫓은 지도 벌써 꽤 시일이 지났다.함께 진행한 뒷조사도 더는 할 것이 없었다.그래서 나온 결론.비비안 윈데이너는 특별했다.그녀가 내비치는 욕망이라곤 음식과 휴식에 대한 갈망뿐이다.
그걸 여태 내가 천박하게 여긴
‘욕망’
이라는 단어에 빗대어도 괜찮을까.
‘사람이, 그것도 귀족 자제가 저런 생각만 하며 사는 것이 가능한가.’
감정이나 생각이 연기나 색, 무형의 기운으로 눈에 보이는 건 편리하지만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고역이다.
그런데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편안했다.역겹기는커녕 자꾸 보고 싶어서 탈이군.[아니, 저 인간이 여긴 또 왜!]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제야 나를 발견한 비비안의 머리 위가 시끄럽다.[확실해.
쟤, 내 뒤 밟나 봐.]
“영애, 지금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같이 자리해도 되나.”
“각하, 여기 말고도 자리 많은데요.”
[뭐야, 햇살 등지고 서니까 후광 비치는 조각이 따로 없네.]매번 볼 때마다 이리 감탄해 주니 고마울 따름인데, 절대 티 내지 않으려는 저 경직된 얼굴과 머릿속 생각이 대비되어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누가 쟤 안 웃는다고 했어, 저렇게 웃음이 헤픈데.]졸지에 웃음이 헤픈 자가 되어버렸지만 아무렴 어떤가.반쯤 우기듯 맞은편에 앉은 나는 비비안의 시야에 맞춰 상체를 숙였다.
이어 어쩐지 항상 배고파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젠 습관처럼 챙겨 다니는 초콜릿을 꺼냈다.[왜 자꾸 마주칠 때마다 간식을 주지? 저거 저번에 줬던 그거 아니야.
맛있던데, 어디서 샀지?]
“콘라드 말로는 이국에서 보내온 선물이라더군.”
손바닥에 올려진 초콜릿을 슥 내밀자 비비안의 머릿속이 요동쳤다.
“이 초콜릿 말이야.
그래서 수도에서는 구할 수 없다던데.”
[어쩐지! 처음 봤다 했어.]
“그렇다면 귀한 것일 테니 각하가 드시지요.”
흥분한 머릿속과 달리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침착하고 우아하기 짝이 없었다.
“난 안 좋아해.
그러니 그대가 먹어주면 좋겠군.”
마지못해 먹어준다는 표정으로 초콜릿을 집어가는 비비안의 머리 위로 꽃이 흩날렸다.
‘꽤 마음에 들었나.’
앙상한 그녀의 손목을 보자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저렇게 먹을 것을 좋아하는데 어찌 저리 마른 것이지.
게다가 왜 매번 배고픈 상태인 거야.연회며 상점가며, 그녀를 보기 위해 들렀던 모든 곳에서 비비안이 무언가를 양껏 먹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비비안, 잘 안 먹는 이유라도 있어?”
초콜릿을 입에 담고 자기가 웃는 줄도 몰랐을 그녀의 눈이 커진다.[뭐? 비비안??]
‘아, 하도 속으로 이름을 부르다 보니 실수했군.’
“저, 각하.
방금 호칭이.”
나는 머뭇대며 호소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정이 참 다양했다.
“호칭?”
[너 지금 비비안이라고 불렀잖아! 깜짝 놀랐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닌데!]
“비비안?”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황망한 표정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이내 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턱 아프겠다.’
슬며시 손끝으로 비비안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안 되는 건가?”
어차피 다른 사람 없을 때만 아는 척하는데, 이름 부르면 안 될까?[요망하다, 요망해.]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각하.”
“그럼 다시 영애라고 부르지.”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가.
이름 부르는 게 이렇게 심장 떨릴 일이냐고.]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들썩이는 어깨를 보며 비비안이 또 뭐라 욕할지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아마 그날 이후로 가장 많이 웃는 나날인 것 같군.선황제가 승하한 것이 내 나이 여섯 살 때니, 20년 만인가.
이렇게 평범하게, 평화로운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가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인데.
‘…이건 기회일까, 함정일까.’
저를 빼고 웃는 것이 못마땅한지 입을 삐죽이는 비비안을 눈에 담았다.
“영애는 가지고 싶은 것이 있나.”
아직은 내가 분별이 서는 것 같은데, 이대로 가면 어찌 될지 몰라 걱정이야.조만간 네가 원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게 될까 봐.두렵다.
“전 이미 거의 다 가지고 있는데요.”
[굳이 답하자면 사랑? 평화?]
“풋.”
사랑과 평화라.
내가 이걸 네게 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각하, 지금 비웃으신 건가요?”
빠르게 양손을 저으며 강한 부정을 표했다.
정말 이 이상 웃었다간 밉보일 것 같다.
“아니, 욕심 없어 보이는 게 좋아서.”
[조조조좋아??]
‘아, 더는 못 참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는 양손을 깍지 낀 채 이마를 대고 고개를 한껏 숙였다.
“제가 욕심이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제게 호감을 표하면 늘 저렇게 당황하고 거부한다.
‘내 얼굴은 좋아하면서.’
“어, 음, 보석도 좋아하고 그림도 모으고 드레스도 어찌나 많은지! 제 드레스룸 보면 각하도 깜짝 놀라실 거예요.”
횡설수설 연신 말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나른한 기분이 든다.
“비비안, 또 뭘 좋아하는데?”
손에 턱을 괴고 재잘대는 비비안을 보며 묻자 눈이 한껏 커지고 입이 살짝 벌어진다.[…또 이름을 불러? 눈은 왜 그렇게 뜨는데.]얼굴을 빤히 보던 그녀가 끝내 작은 한숨을 쉰다.
“그거 아세요? 안 그래도 제가 황태자 전하의 짝으로 말들이 많은데, 각하까지 이리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니까.”
[얼마나 귀족들이 난리 치는지 너는 모를 거야.
알면서 이러지는 않겠지?]
“제가 정말 곤란해요.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말이에요.”
[이쯤 되면 우연 아닌 거, 너도 알고, 나도 알지?]우연이란 단어에 힘주어 말하는 비비안의 얼굴이 화난 다람쥐 같다.네가 이런 내 관심을 토대로 원하는 것을 쟁취할 생각도, 즐길 생각도 없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확실히 내가 일을 키우고 있기도 하고.
“미안하군.”
화들짝 놀란 비비안의 얼굴이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했다.[뭘 또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고 그래?! 무슨 대공이 저렇게 사과가 쉬워?]지금까지 벌인 일에 대한 사과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미리 해두는 말이기도 했다.
“다 가진 그대가 좀 봐줘.”
[뭐……? 왜, 저렇게 웃는 거야.]
“…무엇을 봐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하는 거, 생각하는 거.너랑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거.지금 그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고 즐거운 일이거든.
‘너와 시간을 갖는 것.’
그러나 지금 네게 전할 수 있는 진실은 이 마음의 한 토막뿐이다.네가 겁을 먹고 여기서 더 도망갈까 싶어서.
“내가 비비안에게 보이는 관심.”
분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나온 귀가 붉었다.귓가에 닿고 싶어 뻗어 나간 손이 그녀의 머리 한 자락을 움켜쥐었다.비비안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애처롭다.
‘…내 눈을 만져보고 싶다고 했었나.’
그 기분을 알겠군.이내 벌떡 일어난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댄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아직 더 같이 있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 보내줘야 할 것 같다.
비비안의 주변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응.
조심히 가, 비비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쉽다.가만히 손을 들어 바라보자 손끝에서부터 초봄의 여리고 청량한 새순이 피어오르는 듯했다.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듯한 이런 것도 감히 생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나는 생애 내내 너만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너를 만나 그동안 잊고 지냈던 삶이라는걸, 살아보고 싶어서.그 어리석은 바람을 여태 간직해 왔나 보다.*
“콘라드, 대공비가 황후보다 일이 적지?”
더 자유롭기도 하고? 아니, 애초에 대공령은 여태 대공비 없이 잘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비비안이 황태자비를 극구 거부하는 이유가 아무래도 그런 데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후작의 말이나 평소 비비안의 생각을 보면 충분히 그럴듯해.’
비비안은 권력에 욕심이 없는 만큼 일 욕심 또한 없었다.디에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콘라드를 바라봤다.자작가의 삼남으로 태어난 콘라드는 그대로 흘러가기엔 가진 재주가 많았다.
일찍이 그를 보고 대공저에 붙들어 놓은 지 벌써 10년 정도 되었나.
“죽을 때까지 대공저에서 하던 일 계속할 거지?”
끔찍한 소리라도 들은 듯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콘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십니까.”
아무래도 네가 앞으로도 하던 일 잘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비비안의 자유를 위해서.그녀가 쓰러진 지 이틀이 지났다.
후작은 약속대로 비비안이 깨어난 직후 서신을 보내왔지만, 당부도 잊지 않았다.[딸아이의 안정을 위해 당분간 저택의 방문을 자제해 주십시오.]
“더 기다리기가 힘든데.”
쓰러진 이를 저택까지 옮긴 사람으로서 병문안 정도는 가도 이상할 거 없지 않아?눈이 감기며 품으로 쓰러지던 비비안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후작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 있음에도 잃을까 두려웠던 순간이 생생하다.
“제가 확인차 여쭤보는데 각하, 윈데이너 영애 좋아하십니까.”
그 투명한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기는 것을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쎄.
어떤 것 같나.”
콘라드의 가늘어진 시선이 집요했다.
“선물이나 준비해.”
직접 가봐야겠으니까.
“왜 하필 윈데이너 영애입니까.”
잔뜩 인상 쓴 얼굴로 한숨을 쉬는 콘라드의 주위로 걱정과 답답함이 솟았다.
“뭐가 문젠데.”
“오래전부터 황태자비 예정자였던 분입니다.
한미한 가문도 아니고, 그 후작가의 영애라고요.”
대공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각하가 결혼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시면 그러려니 할 거예요.
차라리 어느 날 평민을 데려와서 애인이라고 소개하셔도 이보다 황당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숨도 안 쉬고 말을 이어가는 콘라드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아니! 평소에 그렇게 남들과 다른 행동만 하시다가 왜 여기서 이렇게! 지극히 귀족적인 조건을 찾으십니까.”
“조건?”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가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있습니까.
황태자비 예정자만 아니었어도 제국 내 귀족들이 죄다 한 번쯤 청혼서를 넣었을 겁니다.”
제국 내 모든 귀족이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남자들의 행렬을 떠올리자 불쾌해졌다.
‘황제에게 감사해야겠군.’
“콘라드, 그만 떠들고 후작가에 기별 넣어.”
지금은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거든.
비비안의 안중에 없다는 점에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