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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7화 (7/109)

7화

*마차에서 간신히 내린 내 입으로 쿠키가 달려들었다.

“어서 드세요.”

내 허리에 팔을 두른 마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투정했다.

“저는 이제 뭐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꾀병인지 모르겠어요, 아가씨.”

너도 그러니? 나도 그런 것 같아! 그 아가씨에 그 시녀네.한 끼 정도 굶으면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몸.

이 장점 아닌 장점을 이용해 밖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면 이렇게 굶고는 했다.마리에게 한껏 기대 저택으로 들어서자 애처로이 서 있던 자작 영애가 인사를 건넨다.

“영애, 어쩐 일로 나와 계세요?”

“저기.”

외출복 차림으로 선 그녀가 손을 꼼지락댔다.

“머물 데는 있으신가요?”

움찔, 몸을 떤 그녀가 입을 달싹였으나 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이제 몸도 추슬렀고 해줄 이야기도 다 했으니 더는 머물 이유가 없다고.

“…당분간 윈데이너가 머물 곳이 되어 드릴게요.

영애가 무언가 하고 싶어지거나, 가고자 하는 방향이 확실해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죠.”

고개를 든 자작 영애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그러나 이 감동적인 분위기를 더 이어 나가기엔 내가 너무 지쳤다.

“그, 제가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이만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네.

정, 정말 감사해요.”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녀를 뒤로한 나는 마리와 2층으로 향했다.

“자작 영애, 잘 살펴줘.

쉬이 가시는 상처는 아닐 거야.”

“네, 아가씨.

안 그래도 매일 들여다보고 있어요.”

지방 몰락 귀족의 차녀였던 마리는 어느 늙은 귀족에게 첩으로 팔려갈 뻔한 순간, 인연이 닿아 나와 함께하게 된 이였다.

‘그러니 더욱 마음이 안 좋겠지.’

“그나저나 연회장에 오래 계셨네요?”

“응, 오늘은 좀 달랐거든.”

“예― 예에.”

나는 전혀 기대감 없이 답하는 마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일단 배가 너무 고프니 고기 좀 씹고 뜨듯한 물에 몸 좀 담그고 나서 어마어마한 오늘의 이야기를 네게 풀어주겠어.하지만 마리 앞에 선 내 입은 구름보다 가벼웠다.

목욕 끝내고는 무슨.

고기의 등장과 동시에 입이 터졌다.

“그러니까, 저번에 저택까지 오셨던 그 브라이트 대공이요?”

“아, 글쎄.

그렇다니까.

그 브라이트 대공.”

나는 그렇게 수다를 떨며 후작가 영애의 기품은 내던진 채 한 마리 굶주린 짐승처럼 고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이제야 좀 살겠네.”

오늘도 위트니 백작 부인이 얼마나 야무지게 다과를 챙겨 먹은 줄 아니? 그분은 진짜 다과 고르는 솜씨가 날로 성장하는 것 같다며 감탄하는 내 말에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안 궁금해요.”

너 매번 위트니 백작 부인이 뭐 먹었는지부터 묻곤 했잖아?!

“아무튼 내가 테라스 하나 잡아서 쉬고 있는데, 브라이트 대공이 정원 쪽에서 불쑥 나타났지 뭐야.”

“그래서요?”

마리의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그러나 그의 외모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나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뭔가, 뭔가.

뭔가 없었어요?”

그 뭔가가 뭘까.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범벅된 마리의 얼굴이 나를 책망하는 것 같은데.

“뭔가?”

멋쩍어진 나는 살살 웃으며 마리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의 주종 관계, 지금 살짝 뒤바뀐 것 같아, 마리.한숨을 폭 내쉰 마리가 접시 위 토마토를 콕 집어 포크를 들이밀었다.

“아가씨, 황태자 전하가 싫으세요?”

그 말에 먹고 싶지 않은 토마토를 억지로 입 안에서 굴리며 황태자를 생각했다.

리안 로렌스는 대공만큼이나 잘생겼고 제국 내 제일가는 신랑감인 데다 성격도 모나지 않다.

“싫냐고 물으면 그건 아닌데.”

그래도 결혼은 아니지.

싫지 않은 정도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오히려 리안을 사랑하지 않아서 다행이랄까.리안 로렌스의 부인이 되기 싫은 것보다 제국의 황후가 되기 싫다는 게 정확했다.

“나는 그 자리에 걸맞지 않아.”

제국의 황후, 권력? 재력? 명예? 다 있으면 뭐 하나.

지니고 있어서 마냥 행복해지는 가치들도 아닌데 말이야.

“와, 다시 생각해 봐도 아니다.

그냥 혼자 살래.”

뭔가 고심하듯 심각한 표정을 짓던 마리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대공 각하는 어떠세요?”

네? 네에? 누구?*황태자도 아니지만.대공, 지금 내 눈앞에서 미모 뽐내며 여유롭게 앉아 있는 이자 또한 아닌 것이 확실하다.

‘혼자 살자, 차라리.’

“각하, 제가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서 이만 가봐도 될까요?”

한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먹고 나오는 건데, 이 남자는 왜 매번 이렇게 불쑥 나타나는 거지?맞은편에 자리한 브라이트 대공이 말없이 케이크 접시를 내게 밀었다.

“이것만 들고 가지.”

딸기가 참 탐스럽다.

그러고 보니 여기 초코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나중에 마리한테 사 오라고 해야지.

“정말 생각이 없어서.”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았다.

대공이랑 더 엮여서 좋을 거 하나 없는데 나 좀 그만 보내주면 안 되나요.

“성의를 봐서 맛이라도 보고 가.”

끈질기다, 끈질겨.

테이블보만 뚫어지게 보다 고개를 들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그는 같은 인간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잘생겼다.

온종일 저 얼굴만 들여다봐도 시간 금방 가겠어.그래도 너는 안 되지.

“포크 들 힘도 없다면 내가 먹여주지.”

태연한 얼굴로 포크를 드는 저 대공은 미친 건가.

정말 미쳤나.당황한 나는 그의 손에 들린 포크가 케이크를 가르기 전 재빨리 내 포크를 집었다.

“제가 먹을게요!”

황급히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자 머릿속에 꽃이 만발했다.

조각들이 서로 손잡고 뱅글뱅글 돌면서 홀 케이크로 진화했다.

“풋.”

또 그런다, 또.

대공은 참 웃음이 헤펐다.

그것도 늘 혼자 웃는다.

이거 그냥 나 비웃는 거 아니야?슬쩍 곁눈질하자 주먹 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는 꼴이 볼만했다.비아냥대는 게 아니라 정말 볼만했다.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대공은 그것대로 또 보는 맛이 있었다.

‘하긴.

네가 뭘 한들 별로겠나.

그 얼굴, 몸, 목소리! 똥을 싸도 멋있을 사람.’

케이크 조각을 더 맛보고 싶었으나 이제 정말 일어날 때가 되었다.

저자가 저렇게 웃기까지 하면 세간의 오해는 더 깊어만 진다.

“진짜 이제 가봐야겠어요, 각하.”

케이크에서 옮겨온 그의 시선이 한참을 진득하게 날 살핀다.검술에 능하다 들었다.

팔다리, 심지어 손가락마저 길어서 모든 동작이 시원시원했다.

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날카롭고 날렵한 사람인지 느껴질 정도다.그런데 어째서 시선만은 저리 느릿한지 모를 일이다.

대공은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 온통 그를 의식하게 했다.지금 내가 그랬다.

‘좋겠다.

숨만 쉬어도 사람 떨리게 하고.’

“영애.”

작게 속삭이듯 부르는 대공의 목소리를 따라 내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황태자 전하를 좋아하나?”

“갑자기 무슨.”

“꽤, 많은 일을 하고 있던데.”

상체를 한껏 숙여 내게 다가온 그의 목소리가 은밀했다.

“황태자의 걸음마다 그대의 흔적이 있어.”

“…제 뒷조사를 하셨나요?”

대공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진 탓에 황급히 내렸던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내가 영애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싶어져서 말이야.”

고개를 기울인 그의 검지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통 그대와 만나는 게 쉽지 않더군.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대공의 눈은 그의 말과 다르게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하고 곧았다.

“하아.”

뒷조사쯤이야 새삼스럽지도 않다.애초에 내 뒤를 캐지 않고서야 어떻게 약속도 없이 매번 이렇게 나타나겠는가.

쟤는 내내 우연이라 우기고 있지만.

“각하, 무엇을 찾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황가를 지지할 뿐입니다.”

그제야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가 숙였던 상체를 물리며 옅은 미소를 보인다.

“황태자가 아니라 황가라, 이거지.”

그게 중요하니? 그래?그가 내게 보이는 관심의 방향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지난 황후궁 정원에서 대공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그때 그랬지.

내게 관심이 있다고, 나를 쫓게 될지 모르겠다고.

‘…이건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잖아?’

에이, 설마!아니다, 그럴 리 없어.

괜한 착각 하지 말자.대공이 또 웃느라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진짜 뭘까, 뭐지.

왜 저렇게 뜬금없이 웃는 걸까.나는 한결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를 심드렁하니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궁금증이 풀리신 거 같아 다행이네요.”

“아직 궁금한 게 많은데.”

장난기 섞인 다정한 목소리와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 부드럽게 휜 눈매가 동시에 내 마음을 흔들었다.

‘심장에 안 좋아.’

헤벌쭉 풀리려는 입매에 힘을 주느라 미간이 구겨졌다.

“다음에.

다시 뵙게 되면 그때 물어봐 주세요.

오늘은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내 의자를 빼주었다.

일어나 보니 그의 광활한 가슴팍에 시야가 막힌다.

고개를 꺾어야만 보이는 얼굴이라니 축복받은 신체다.함께 가게를 나서자 가문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병약하다는 거짓말이 이젠 정말 사실이 돼가는 걸까.

뭐 했다고 이렇게 피곤하지? 이러다 나중에는 몸이 알아서 쓰러져줄 것 같다.

“잠시만.”

내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준 대공이 뒤돌아 가게로 향했다.

그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하나하나 파악하려 들던 지난날의 나는 자취를 감췄다.내가 눈치가 없지는 않은데, 쟤는 정말 모르겠어.

“자.”

어느새 돌아온 대공의 손에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마차 안에 상자를 내려놓은 그가 다 안다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저 눈에 담긴 측은함, 뭐야?

“초코케이크.”

뭔데, 무섭게 왜 그러는데.

처음이 아니었다.

한 번, 두 번 반복되니 이제 정말 그가 의심스러웠다.

“이걸 왜.”

“여기 그게 맛있다고 하더군.”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케이크 따위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음을 온몸으로 표출하던 사람 아니었나요.

‘초코케이크를 떠올린 건 나였는데.’

어쩌면 브라이트 대공은 사람 마음을 읽는 거 아닐까.

가끔 시선 처리가 이상한 것을 보면 망령이라도 보나?

“또 보지, 영애.”

단정한 미소를 지은 그가 마차의 문을 닫았다.

“…그만 보고 싶다, 제발.”

정말이지 간절한 바람과 달리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내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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