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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6화 (6/109)

6화

【 디에고 브라이트의 마음이 향하는 곳 】

“영애, 여기 앉아요.

금방이라도 쓰러지겠어.”

나는 넉넉한 품이 인상적인 위트니 백작 부인의 손에 이끌려 오늘도 테이블에 안착했다.

주위를 에워싸는 맘씨 좋은 귀부인들.오늘도? 나 오늘도 귀부인들이 만든 요새에 갇혀 있다 귀가하는 거야?먹성 좋은 위트니 백작 부인이 자리한 테이블은 항상 음식이 가득하다.배가 고파 한껏 슬픔에 잠긴 내 모습을 귀부인들이 안쓰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안타까워라.”

“어디 몸이 불편한 데라도 있어요?”

“저런.

이 손목 좀 보세요.

후작님이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쏟아지는 걱정과 칭찬은 이제 들리지도 않는다.

어쩜 저렇게 말을 쏟아내면서도 위트니 백작 부인의 손은 쉬지 않는 거지?그녀의 손에 들린 쿠키가 제법 먹음직스럽다.

‘하, 한 입만.’

정신 차려! 비비안 윈데이너!간신히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돌려 연회장 중앙으로 시선을 옮기자 서러움이 배가되었다.나 빼고 다 봄날이네.저것 봐라.

서로 눈짓 보내고 난리다, 난리.

나도 무대 중앙에서 양껏 사지를 흔들고 싶다.

너희만 춤 연습했니.

나도 주야장천 갈고닦았다고.눈가에 물이 맺히자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저 아련한 것 좀 봐.”

“왜 하필 영애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죽음의 그림자?! 소곤대는 척하는데 다 들리거든? 더는 안 되겠다.

테라스로 가자.

“저 잠깐 바람 좀.”

일어서는 순간에도 바로 곁에 있던 귀부인의 손길이 지극했다.

아가의 첫걸음마를 보듯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진다.옳지! 잘 걷네! 어이구!이런 상상이나 하는 내가 싫다.간신히 테라스 하나를 점령하고 커튼을 치자 저 깊은 창자에서부터 끓어오른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못 살겠다, 진짜.”

금세 지치는 몸뚱어리를 소파에 파묻고 구두를 벗어 던졌다.

시끌벅적한 연회장 내 소음이 커튼 너머로 자글자글하게 들리자 졸음이 밀려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내가 여자인 것? 잘난 후작가의 딸로 태어난 거?병약을 노린 게 패착이었나.

차라리 미친 걸로 할걸.아니지, 병약이나 미친 사람이나 결과는 엇비슷했을 것도 같다.머리에 꽃 단 내가 꽃밭을 뒹굴었다.

청초한 꽃이라 불렀겠지.

머리가 청순하다고.턱―

“아씨.”

깜짝이야.

저게 뭐야! 테라스 난간에 걸쳐진 손이 보인다.이윽고 뛰어오른 검은 짐승이 우아하게 테라스 바닥으로 착지했다.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 번 보면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는다는 얼굴답게 단번에 알아봤다.

“각하?”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영애.”

“어? 왜?”

나는 채 문장이 되지 못한 외마디를 던지고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밤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쟤, 심하다.넓은 어깨,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이 신기한 얼굴 크기.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내리면 너무 빨리 시작되는 다리.비율이 굉장했다.이렇게 천천히 그의 전신을 살피자 새삼스레 대공의 별칭이 떠오른다.

나도 나지만 저 남자의 별칭도 지독했으니까.

- 대공은 그야말로 한 마리 늑대로구먼.그 앞에서 깐족대던 황제의 얼굴이 떠오른다.

영감은 별명도 진짜 촌스럽게 짓는다.늑대가 붙어서 그렇지, 중요한 것은

‘한 마리’

였다.그만큼 사람 모인 곳은 질색하며 자리를 뜨니 얼굴 한번 보기가 여간 어려운 사람이다.

‘이런 연회, 참석 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기 지금 두 마리인데, 괜찮아요?

“잠시 앉아도 될까.”

나는 재빨리 테라스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은 닫았고, 커튼도 꼼꼼히 쳤네.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내가 여기로 들어온 거 다들 뻔히 봤는데, 대공이 여기서 나간다?와, 아찔하다.그가 훌쩍 뛰어올랐던 난간으로 시선이 향했다.

저기로 다시 가라고 하면 안 되겠지?아무리 그래도 쟨 대공이니까.내 마음에 차는 답은 여기 없었다.

그저 두 손 공손히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소파에 안착한 대공은 그 이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잠시는 얼마큼일까.

잠시가 지나면 대공은 어디로 나갈 생각일까.

애초에 멀쩡한 입구 놔두고 도둑처럼 난간 뛰어넘어 여긴 왜 온 거지.

‘집에 가고 싶다.’

배도 너무 고프고 힘들고, 맞은편 늑대는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고.게다가 자꾸 시선이 느껴져서 정작 나는 그를 못 보고 있다.

고개를 들면 여지없이 대공과 눈이 마주치기를 수 번, 애꿎은 바닥을 오른쪽 왼쪽 번갈아 보는 스스로가 불쌍할 지경이다.힐끗 눈을 들자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고 있는 대공이 보였다.목젖이, 목젖이.

매끈하게 뻗은 목 위로 툭 튀어나온 목젖이.

‘와, 봐도 되나?’

느릿하게 들어 올려진 대공의 눈꺼풀 아래 눈동자는, 이래서 죽을 때마저 생각날 법한 미모라 한 건가.미간에 주름이 진 것을 시작으로 그의 단정한 얼굴이 흐트러졌다.

당혹감을 비치던 얼굴이 이내 웃음으로 번져갔다.그의 웃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웃음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실례지만, 뭐 때문에 웃으시는 거예요?”

내가 웬만하면 남 웃는 것에 이런 질문 안 하겠는데, 아무리 봐도 지금 웃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아, 미안하군.”

손을 저은 그가 여태 웃음에 미련이 남은 듯 작게 심호흡했다.한결 편안해 보이는 대공이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독 같은 것은 안 들었으니 걱정 마.”

그런 말 하면 오히려 의심되는데요?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금색의 네모난 것이 무척 고급스러워 보인다.

“주시니 받겠습니다.”

안 그래도 당 떨어져서 이곳 테라스를 나가 연회장까지 무사히 걸어갈 수는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영애는 황태자와 사귀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입 안에서 굴리던 초콜릿을 별안간 대공의 얼굴까지 쏘아버릴 뻔했다.아닌데.

사귀지는 않지만, 입장이 미묘했다.

다들 내가 황태자에게 마음이 있지만 타고난 병약함 때문에 황태자비 자리를 고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의 정적이라면 정적인 그에게 내 입으로 이런저런 사실을 전해도 될까.내 발언을 후작가의 뜻이라 여기면 어째.

“아니야.

괜한 질문을 했어, 내가.

마저 먹어.”

그제야 멈췄던 혀로 입 안의 초콜릿을 다시금 굴렸다.

그를 보니 우리 저택에 머무는 자작 영애가 떠올랐다.그녀는 눈동자의 생기도, 말도 잃은 채 유령처럼 후작가에 머물렀다.그러던 어느 날, 나를 찾아와 한참을 망설이며 내어준 이야기.

- …아버지가 도박을.

다… 다 잃고 나자, 아무래도 제가 마지막 담보였던 모양이에요.셀빈 자작 영애의 무릎 위로 점점이 번져가던 눈물 자국.그 모습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차지한 채 쉼 없이 배회했었다.

“각하, 그날 어째서 비오첼라 백작가에 계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비오첼라가 운영하는 도박장.

그건 알고 있었다.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째서? 귀족 영애를 데려다 무엇을 하려고?

“…뭐라도 알아낸 건가, 영애?”

대공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

“대공령은 슈베른 왕국과 맞닿아 있지.

근래 비오첼라가 왕국으로 꽤 많은 물품을 실어 나르더군.”

그가 상체를 숙여 내게 더 다가왔다.

대공의 눈이 첨예하게 빛났다.

“그런데 온갖 추잡한 일로 돈을 그러모으는 자가.”

“번거롭게 왕국에까지 팔고자 한 물품이 과연 무얼까?”

라고 말을 잇는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오른다.

‘글쎄.’

그건 그렇다.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만 해도 만만찮을 터인데, 그걸 감수하고도 이익을 낼 수 있는 물품이란 게 썩 종류가 많지는 않을 터인데.수도 내에서 도박장만으로도 쉬이 벌어들이는 금액을 굳이 품 들여 거래한다라.

“…자작이 비오첼라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에 드나든 것 같더군요.

마지막엔 자작 영애를 넘긴 것 같아요.”

대공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놀라운 정보는 아니었는지 담담했다.

“아마 이 이상 그녀에게 얻을 정보는 없을 것 같아요.”

자작 영애가 아는 것은 그게 다였다.

비오첼라 백작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그 증거 또한 없다.지금은.

“그런 것 같군.

그런데 그대 표정은 왜 그래?”

내 표정?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웃으며 손을 뻗는다.

순식간에 다가온 대공의 검지가 내 미간을 문질렀다.

“왜 본인이 상처받은 표정이야.”

“네?”

오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 있는 미소를 띤 그가 눈을 맞춰왔다.

“마음 쓰지 마.

내가 잡을 거니까.”

잡는다라.

서럽게 울던 자작 영애 덕에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드러난 것 같다.

‘내 마음을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그거참.

믿음직스럽네요, 각하.”

그런데도 저리 말해주는 그가 어쩐지 고마웠다.

제국의 대공이 나서는 일이니 분명 허투루 지나가지는 않을 테지.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너는 어디로, 언제 나갈 거니? 내가 그게 참 신경이 쓰인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과 시간을 보낸 절벽의 꽃.다음 날 쏟아질 수많은 소문의 파도가 나를 질식시킬 게 뻔했다.

“나는 좀 더 있다 여기로 나가지.”

대공이 손을 들어 테라스 난간을 향해 뻗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긍정의 고갯짓을 선보였다.그래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잠시나마 즐거웠어요, 각하.”

이제 우리 다시는 이렇게 서로 대화할 일 없겠지만, 즐거운 추억 하나 만들고 갑니다!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들고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우아함을 선보이며 나는 웃었다.어때? 어릴 적 예법 교사가 아기 백조가 따로 없다고 칭찬하던 그 인사가.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대공의 미묘한 표정이었다.뭔가를 감내하듯 입술에 힘이 들어간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도, 또 보도록 하지.”

아뇨.

우린 더 보면 안 되는 관계 같은데.등 뒤, 닫히는 테라스 문 너머로 아까 들었던 대공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아니겠지?쟤, 또 혼자 웃는 거 아니지? 너 진짜 매번 인상만 쓰고 잠시 머물다 사라지던 외로운 늑대 한 마리 아니었니?

“하아.”

크게 숨을 고른 나는 여전히 시끌벅적한 연회장을 바라봤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한 사람, 한 사람 놓치지 않고 살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가.

내가 알고 있던 것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정보.고요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나는 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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