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궁에는 눈이 여럿이다.
모두가 어제 대공과의 만남을 본 것이야.
다들 실력도 좋지, 어디에 몸을 숨기고 그렇게 다 지켜보는 건지.덕분에 황후가 아끼는 유리온실에서 그녀와 일대일 만남도 다 갖고.
어제부터 이틀 연속 입궁하느라 죽겠다, 아주.[날이 좋으니 함께 차 한 잔 나눌 수 있다면 좋겠군요, 영애.]서신과 함께 친히 마차까지 보내준 황후의 치밀함에 속절없이 당했다.
“하아, 간신히 끝났네.
이렇게 황궁이 무서운 곳이에요, 진짜.”
티타임은 길지 않았으나 긴장이 극에 달했던 터라 지쳤다.
‘좀 앉아서 쉬었다 가야지.’
나무와 풀로 가득한 정원이 폐하 그 자체네.
그녀는 꽃보다 나무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사람이 참 거대하고 울창했다.
‘이것 봐.
대공이랑 엮이니 벌써 이렇게 피곤한 일이 생기고.’
올려다본 풍경은 내 마음과 다르게 참 평화로웠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치는 햇빛이 고왔다.
- 우리 디에고랑은 그새 친해진 건가.우리 디에고라니, 너무 낯선 단어의 조합에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그리 지칭할 만큼 황후랑 대공의 사이가 좋았던가.
“디에고 브라이트.”
혼자 그의 이름을 되뇌어보며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인다.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오는 건가.고개를 젖힌 채 시선이 맞닿은 대공의 눈이 깊었다.
좀 전 가득 내리던 태양 빛과 다르게 푸른 그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눈이 정말 만져보고 싶게 생겼네.’
그대로 얼어붙은 머리가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 제 자리를 찾아갔다.지금 대공이 내 고개 돌려놓은 거야? 손수?
“목이 아플 거 같아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니 앞만 보는데 바로 옆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각하… 지나치게 자주 뵙는 것 같네요.”
우연치고 너무하지 않나.
지금 합리적 의심이 마구 솟아나는데.
“혹시 제가 가는 곳을 확인하신다던가.”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대공의 무고한 얼굴이 보인다.
“그럴 리가.”
표정도, 말투도 무척 평온했다.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오늘은 황후 폐하를 뵈러 온 거라서.
영애도 그렇지 않은가?”
아, 역시 어제 일의 여파가 이렇게까지.
폐하가 대공까지 불러들였을 줄은 몰랐다.
“아몬드 쿠키의 주인이 각하였군요.”
온실에 들어섰을 때 시녀가 아몬드 쿠키가 든 접시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답이 없는 대공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희미하게 웃던 그가 눈을 맞췄다.
“폐하의 온정이지.”
그런가요.
어쩐지 둘만의 비밀 같아서 더 물어보기가 그렇다.
황후의 일침이 날아올 거로 생각한 독대도 싱겁게 끝났고, 오히려 둘의 관계가 무척 돈독해 보인다.
“아까, 영애를 따라다니냐고 물었던가?”
아이고,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는데!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위해 입을 달싹이는 나보다 그가 한발 빨랐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대공의 말이 기가 막혔다.아니, 왜? 왜에?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정치? 다 크니까, 혹시 뭔가 큰일을 도모하고 싶은 거니.
야심 있는 늑대였어?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가슴이 떨렸다.
우리 같이 한번 새로운 시대를 열어보자, 뭐 이런 얘기 하는 거 아니겠지?황태자파, 대공파 나뉘어서 아웅다웅하는 그 판에 나는 끼고 싶지 않은데, 그러기엔 가문이 너무 잘났다.
후작이라는 작위 외에도 재산이며 인맥까지 꽤 갖춰 탐나는 것은 알겠는데…….
“영애에게 관심이 생겨서, 내가 그러면 곤란할까.”
나? 우리 가문 말고 나? 관심? 무슨 관심! 곤란하죠, 무척 곤란해요.
그게 어떤 종류의 관심인지 알고 싶지만, 영원히 알고 싶지 않은 기분도 드네요.
“저는 각하께서 관심 둘 만한 사람이 못 되는데요.”
앞을 보던 대공이 다리를 꼰 채 턱을 괴었다.
‘내 쪽으로 그렇게 고개 틀고 그러지 마.’
참 다리도 길고, 팔도 길고.
그의 외모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숙인 대공의 상체로 인해 그 얼굴이 여지없이 시야에 걸렸다.하늘로 향하던 눈동자를 내리자 날 올려다보던 대공의 눈이 곱게 휘어진다.
- 대공 각하랑은 친분이랄 게 없는 사이예요.황후에게 그리 고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마.덧없이 떨리던 가슴이 차츰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그간 연애는 물론 작은 설렘조차 느낄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 원통하다.
이런 미소 하나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내 꼴이 우스웠다.
“각하, 제가 그리 자유로운 위치에 있지 못해서요.
세간의 오해를 사거나 주목받을 만한 일은 더 없었으면 좋겠어요.”
내 말이 끝나도록 시선을 거두지 않는 대공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얼마 만에 받아본 이성의 관심인가.
나는 그가 말한 관심의 종류가 그것이라 믿기 시작했다.
눈이 그랬다, 너무 달았다.아쉽지만 자라나는 새싹을 싹둑 잘라야겠다.
‘잘 가요, 대공 각하.’
아쉽긴 더럽게 아쉽네, 진짜.
좀 더 보고 싶은 얼굴이고,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생각보다 산뜻하다, 네 목소리.
미련 없어 보이는 그의 말에 조금 섭섭해지려는 나 자신이 당황스럽다.
“좀 더 보고 싶은데.”
뭐를? 뭘 더 보고 싶다는 거야? 순간 그의 말이 내가 뱉어버린 속마음인 줄 알았다.
“결국 내가 영애를 따라다니겠군.
뒤를 밟고 싶지 않으니 쉬이 만나주면 좋았을 것을.”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각하, 따라다니고 뒤를 밟고 그러면 눈에 띄지 않겠어요?”
나는 최대한 침착한 척 조곤조곤 그에게 아뢨다.내 말 못 알아들었니? 하는 수 없긴, 뭘 없어! 이래서 높은 사람들이란, 사람들 눈에 더는 띄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는 황태자 하나로도 벅차단 말이다.
“까다롭군.
사람들 눈에 안 띄게 혼자 그대를 훔쳐보는 건 변태 아닌가.”
너야말로 까다롭다.
혼란스럽다.
그와 내가 지금 같은 제국어로 대화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미간이 구겨진 채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공이 이상했다.
그의 미소에 떨리던 가슴이 다른 의미로 뛰기 시작했다.
‘조금 이상한 사람인가.
나 잘못 걸린 거 아니야?’
대공이 한층 더 심각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뭔가 무척 억울하고 항의하고 싶은 표정이다.이내 체념한 듯 어깨를 내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곤란하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경계한 적 없는데요.”
앞을 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눈으로 나무랐다.
느껴졌다.
거짓말하고 있네, 라고 대공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그러나 나는 뻔뻔하게 그의 눈빛을 맞받아쳤다.
“영애가 궁금해서, 내가 그대가 가는 곳에 종종 있을 수도 있어.”
그가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최대한 구설수에 시달리지 않도록 노력은 하지.”
“그래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죠.”
네 발을 묶어둘 수도 없고, 내가 있는 곳에 출몰하는 걸 어떻게 막겠나.그러니 내가 피하마!
‘당분간 외출하지 말아야지.’
*비비안 윈데이너와의 티타임 전, 그녀보다 더 의중이 궁금한 대공에게 먼저 차를 권한 제국의 황후.제피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제 앞에 자리한 그를 바라봤다.
“얼굴이 좋아 보입니다, 대공.”
유리온실의 나무를 무심히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제 숙모를 향했다.
“그런가요.”
“혹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지요.”
유려하게 올라간 황후의 입꼬리를 보던 대공이 이내 그녀와 눈을 맞춘다.
“글쎄요.
좋은 소식이 될지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얼굴에 전에 없던 미소가 걸렸다.때마침 시녀가 내온 아몬드 쿠키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를 바라보는 대공의 눈에 따스함이 드리웠다.
“드시지요.”
“걱정이십니까, 제가 딴마음을 품었을까 봐?”
대공의 올곧은 시선을 마주한 황후가 끝내 평정심의 가면을 허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요.
하물며 그런들 그건 중요치 않아요.”
서로 피만 보지 않는다면, 저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대공, 제가 생각하는 세상 이치는 무엇이든 정해진 것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의 황제 폐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대 앞날의 크기를 정할 생각이 없어요.조금 장난스러운 웃음을 띤 황후를 본 대공의 눈 또한 찬찬히 휘었다.
황후 주변으로 퍼진 온화한 연둣빛 연기를 보는 대공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다.제피아는 디에고가 마주 앉아 차를 나눠도 역함이 올라오지 않는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지닌 기운은 항시 싱그럽고 온화했으니까.
“위험한 발언을 하십니다.”
“왜요.
폐하께 가서 이르시겠습니까.”
“글쎄요.
폐하께서 제 편을 들어주실 리가 없어서.”
소리 내 웃음을 흘린 황후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좀처럼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대공이 어제 비비안 윈데이너에게 다가갔다 들었다.
그만으로도 매우 놀라운데.제피아가 찻잔에 향했던 눈을 들어 디에고를 봤다.웃었다 들었다, 그 아이와 함께 소리 내 웃었다고.
왜 하필이면 대공을 웃게 하는 이가 그 아이일까.
- 폐하, 원치 않는 아이에게 어찌 그리 부담을 지우십니까.후작의 딸이 황후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았다.
- 제피아, 원치 않기 때문이오.
그 아이는 꽤 훌륭한 황후가 될 테니 두고 보시오.재미있다는 듯 웃던 황제는 그리 말했다.
- 비비안이 좋으냐.비비안 윈데이너를 바라보던 어린 아들의 눈에 담뿍 담긴 사랑을 보았을 때 황후는 일이 순조롭게 가는구나 했다.아들은 좋아하는 이를, 아비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가족으로 맞이할 테니까.
-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리안은 부정했다.
비비안이 원치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기나긴 상념에서 깨어난 황후가 깊은 애정을 담아 대공을 살폈다.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지 못하던 게 똑 닮았던 제 아들과 대공.
“디에고, 원하는 것이 생겼느냐.”
친숙한 황후의 부름에 그가 천천히 동공을 굴렸다.이것이 황후가 오늘 저를 궁으로 불러들인 이유일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제가 호기심을 품게 된 사람을 떠올렸다.가득한 연기 사이에서 명랑하고 다채로운 색을 또렷이 빛내던 이.이내 청량함이 비치는 얼굴로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였다.디에고 브라이트는 지금 비비안 윈데이너와의 시간을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