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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4화 (4/109)
  • 4화

    *제 영지에서 쉽사리 나오지 않는 디에고 브라이트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신년 연회, 비비안 윈데이너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각인한 그날.그날도 디에고 브라이트는 여전히 자욱한 연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색욕, 물욕, 권태, 시기… 그 모든 인간의 추잡한 욕망이 가장 짙은 세계.그리고 그 모든 것이 연기와 색을 입은 채 그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이래서 오기 싫었건만.’

    황가, 때때로 인간의 본질을 눈으로 꿰뚫어보는 이가 태어난다 했으나 전설로 남은 지 오래였다.

    디에고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각하, 폐하께서 말씀하고 계신 데 표정이 너무하십니다.”

    옆에서 속살대는 콘라드의 얼굴을 한 번 본 디에고가 단상 위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디에고의 부친, 선황제는 그가 이제 막 글을 막힘없이 쓰게 되었을 때 승하했다.

    일찍 여읜 아버지로 인해 황위를 물려받지 못한 비운의 대공 디에고 브라이트.그것이 그의 삶이었다.선황제의 동생인 지금의 황제는 디에고를 품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모두 한순간에 바뀌어버린 각자의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한껏 자애가 깃든 표정으로 연회장을 훑던 황제의 시선이 한곳에 머문다.

    그가 눈에 이채를 띄며 내뱉는 말이 가관이었다.

    “오늘도 어여쁘기가 절벽의 꽃이 따로 없구나, 영애.”

    ‘절벽의 꽃? 뭐 저딴 소리를.’

    피해자가 누구인지 고개를 돌린 디에고의 앞에 생경한 그림이 펼쳐졌다.

    “…주문?”

    커다란 방패가 화살을 막아내고 있는 형상과 함께 한 여자에게서 글자가 새어 나오고 있다.[영감탱! 질린다, 질려.

    절벽의 꽃은 무슨.]

    ‘내 눈이 드디어 고장 났나.

    아니면 머리가 맛이 간 건가.’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군요.”

    “뭐?”

    “각하가 지금 보고 계신 분이요.

    폐하께서 황태자비로 오래전부터 점찍어두신 분이죠.”

    ‘황태자비 예정자의 머리에서 지금 끝도 없이 황제의 욕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몇 번이고 눈을 깜박여 다시 보아도 여전히 선명했다.[뭐? 절벽에 놓인 꽃처럼 위태롭고 아름다워? 촌스럽게 절벽의 꽃이 뭐냐고!]요새 너무 피곤했나.

    눈두덩을 손으로 눌러보고 고개를 들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도 한 번 올려다본 디에고가 다시 비비안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리 위 방패가 사라지고 이윽고 작은 늑대의 형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비비안과 디에고의 눈이 마주치자 작았던 늑대가 커다란 검은 늑대로 바뀌었다.[워, 엄청 잘생겼네!]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글이 박동했다.

    말이 우습지만, 정말 글자가 연신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각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황제가 말을 끝마치자 귀족들이 각자 연회를 즐기기 위해 흩어졌다.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지는 비비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디에고가 한참을 서 있었다.

    “각하?”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지자 그제야 디에고가 황제에게 발길을 돌렸다.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 올리는 디에고를 그의 숙부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 우리 조카께서 웬일로 제 발로 여기까지 왔을까?”

    그렇게 불러내도 한 번에 말 듣는 일이 없는 디에고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저를 보러온 것이 퍽 즐거운 황제였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턱을 괸 채 얼굴 가득 장난기를 담고 있던 황제의 눈동자에 일순 빛이 일었다.

    그가 손을 들어서 한 번 휘젓자 주변에 상주하던 귀족과 시종들이 물러난다.

    “비밀 이야기라니, 좋구나.”

    무덤덤한 얼굴의 디에고가 낮은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을 올렸다.

    “폐하, 비오첼라를 아시는지요.”

    “알다마다.

    저기 있지 않으냐.”

    비웃음이 비치는 황제의 눈이 연회장 홀을 향했다.

    화려함을 넘어 경박해 보일 정도로 몸을 치장한 비오첼라 백작이 게걸스럽게 웃는다.

    “저자가 부쩍 대공령을 지나가더군요.”

    “오호, 그게 거슬려서 이리 온 게야?”

    느리게 고갯짓하는 디에고를 본 황제의 입꼬리가 진하게 올라간다.

    “그래, 뭐라도 찾은 것은 있고?”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디에고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부터 찾아보려고 합니다.”

    제 턱을 손으로 쓸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없을 수가 없는 자이니.”

    짙은 미소를 머금은 황제가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뿌리까지 뽑을 수 있도록 해보게, 대공.”

    여상히 고개를 끄덕인 대공의 시선이 다시금 홀을 향했다.

    더는 그림도, 글자도 보이지 않는 사람 풍경에 흥미를 잃은 그가 단상을 내려간다.볼일을 끝낸 대공이 이제 막 연회를 즐기기 시작한 황궁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한 마리 늑대라니.

    이 얼마나 강인하고 멋진 별칭이랍니까.”

    마차 맞은편에 자리한 콘라드를 빤히 보았으나 여전히 보이는 것은 즐거워 보이는 노란 연기뿐이었다.

    아까와 같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체를 갖춘 것은 보이지 않는다.

    “늑대?”

    “못 들으셨습니까.

    아까 폐하께서 각하를 한 마리 늑대 같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절벽의 꽃 때문에 뒷말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하, 남의 별칭을 동정할 때가 아니었군.”

    자신을 빤히 보던 보라색 눈동자가 맑았다.

    “비비안 윈데이너라고 했던가.”

    “아, 제대로 보신 건 오늘이 처음이셨죠.

    저는 지금까지 그보다 아름다운 영애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럼 뭐 합니까.”

    더 말해보라는 듯 눈짓을 주자 콘라드가 이내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던데, 그래서 황태자비 자리도 여태 고사한다더군요.”

    몸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황태자비 자리를 거부한다기엔.황제를 향해 욕을 퍼붓는 기개가 대단했다.

    “알아봐.”

    “후작 영애에 대한 것 말씀이시죠.”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치를 살피던 콘라드의 얼굴에 의아함이 비친다.멀어지는 황궁을 보며 그는 이 당황스럽고 기이한 만남을 되새겼다.

    ‘만나서 확인해 봐야겠어.

    내가 미친 건지, 그녀가 정말 뭔가 다른 것인지.’

    *비오첼라 백작이 주최하는 가면무도회, 여기서 뜻밖의 인물을 발견한 디에고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평소보다 훨씬 탁한 원색의 연기가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구역질이 치밀어오는 풍경 속에서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던 사람.가면을 쓰고 검은 머리칼을 둘렀어도 비비안 윈데이너만은 알아볼 수 있다.내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살아왔다지만.

    ‘그런 건 처음인데.’

    머리 위로 보이는 글자, 자유분방한 형상들.비비안 윈데이너뿐이다.여기 모인 인간들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 홀에 흘러넘치는 이 향이 어떤 욕망을 품은 것인지 모르는 사람.가면 너머로도 빛을 잃지 않던 그 눈에 호기심이 가득한 게 답답하다.

    인파를 헤치고 벽으로 향하던 모습은 마치 야생에 풀어놓은 토끼가 따로 없었다.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을 콘라드마저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린다.

    “각하.

    왜 사납게 구십니까, 갑자기.”

    “…확실히 신경에 거슬리는군.”

    “아, 이 향 말이죠.

    이거 약물에도 꽤 손대고 있는 거 같군요.”

    콘라드가 한숨과 함께 코를 쥐었다가 놓았으나, 잘못 짚었다.지금 제 신경을 세차게 쥐고 흔들고 있는 것은 비비안 윈데이너였다.

    분명 저택으로 돌아가라 등을 떠밀었건만.

    ‘순순히 돌아갈 것 같지 않던데.’

    제게서 몸을 돌려 나가던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른 목적지는 분명 윈데이너 저택이 아닌 정원이었다.

    “정원이라.”

    비오첼라 백작, 수면 위로 드러내놓고 벌이는 사업이라는 게 도박장 운영.

    그 뒤로 벌여놓았을 거라 생각되는 것이 약물, 그것에 한껏 취해 향락을 즐기는 이들을 보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정원에 미친놈이라도 있으면 어쩐다.”

    이미 발길은 정원을 향하고 있었다.

    이토록 비비안 윈데이너를 계속 떠올리는 건 역시 남들과 다른 저것 때문이겠지.[와, 나 어떡해?]나무에 몸이 가려져 있음에도 그 주변을 쉴 새 없이 채우는 글자들은 여전했다.주저앉아 있는 뒷모습.

    어깨의 미세한 떨림에 눈이 가고 뒤이어 보이는 글자에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들켰어? 들킨 거야?]

    ‘뭘 들켜?’

    비비안 윈데이너의 드레스, 치마 쪽에서 공포에 휩싸인 절망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묻지 않아도 그녀의 생각은 끊임없이 내게 전해진다.네가 지금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것.점점 더 커지는 소란함에 초조하고 불안하다는 것.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어쩐지 돕고 싶다.

    “하아.”

    터져 나오는 한숨과 함께 이성도 허공에 흩어진 것은 아닐까.

    “아무리 봐도 내가 필요해 보이는데, 아닌가?”

    “…….”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숙여 가면에 가려진 네 눈동자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었다.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 정말 진실인지.

    “잡아, 내 손.”

    당황으로 점철된 눈이 한껏 그 크기를 키운다.

    코가 맞닿을 거리에 멈춰 서 바라봤다.어둠이 내린 보랏빛 눈동자가 그 깊이를 달리하며 빛나고 있었다.그리고 이내 비비안 윈데이너의 뒤편으로 짜증 서린 얼굴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숨은 거야!”

    움칠, 떨리는 몸과 하염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까지.

    ‘보고 나니 괜히 화가 치미는군.’

    그리고 그들 일행 중 한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이 내 손 위로 겹쳐졌다.

    “…뭐지?”

    “아, 저기.”

    당황으로 멈칫대는 자들이 뱀 같은 눈을 휘두르며 비비안 윈데이너를 훑었다.

    그 꼴이 또 보기 싫어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제게 당겼다.

    “뭐 하는 거냐고 물었을 텐데.”

    번연히 자신들이 귀족임을 알면서도, 가면무도회의 특성에 기대어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이 보였다.

    오늘의 비오첼라 무도회는 들어서는 순간 자신의 신분을 앞세우지 않는 것이 규칙이니까.

    ‘별짓을 다 하는군.’

    “사,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셋, 이 외에도 부산하게 느껴지는 움직임들.

    이리 조심성 없이, 그것도 한창 파티 중인 백작가 정원을 헤집고 다니려면 가주의 명을 받지 않고서야.더더욱 비비안 윈데이너를 도와 이 여인을 빼돌려야겠다.

    “그대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

    여기, 이 드레스 안에 있는 듯한데.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여인은 아닌 것 같은데.”

    사내가 답을 늦추며 끈질기게 비비안 윈데이너를 살폈지만 더는 어쩔 도리가 없는지 주춤대며 몸을 물린다.

    “예.

    실례했습니다.”

    마지못해 허리 숙여 인사를 한 자들이 꽤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고요한 정원, 제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내뱉는 숨마저 조심스러운 비비안 윈데이너.[악! 콧바람 느껴지는 거 아니야? 심장 소리는? 괜찮은 건가, 나 지금?]한데 조용한 것은 겉뿐이었다.

    “풋.”

    참아보려 했음에도 끝내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젖혔던 고개를 내리자 하얗게 질린 비비안 윈데이너의 손마디가 보였다.

    ‘언제까지 찬 바닥에 앉혀둘 수는 없으니 이만 돌아가야겠군.’

    “그럼 이제 셋이 비오첼라만 벗어나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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