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황태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면 내가 겪는 이 고통도 감내할 의지가 있다.가뜩이나 어려운 사랑 하시는데, 제가 힘이 되어 드린다 생각하면 덜 억울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는 않은데.”
아니구나.여자고 남자고 다 탐낼 만큼 분위기 있는 미남이라 혹시나 했다.
“그건 아니시구나.
그럼 전하는 왜 연애 안 하세요?”
전하가 좋은 짝만 찾아주신다면 저도 한결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흡사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그의 눈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만날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어쩌겠나.
“그러는 그대는.”
내 치부를 묻는 그로 인해 가슴이 아렸다.
황태자는 본인이 안 하는 거라지만, 나는, 나는!
“…어, 그러니까.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아서?”
자신 없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의문형으로 말을 마치자 공허함이 한층 짙어진다.
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춰진 채 리안이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열린 가면무도회에도 참석했다 들었는데.”
비밀 아닌 나의 비밀이 툭 불거져 나오자 시선이 어지러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인연 찾기의 일환이었어?”
“그건 그냥 궁금해서 가봤어요.
가면에 가발까지 쓴다길래.”
분홍 머리칼을 매만지며 웃자 딱딱하던 리안의 얼굴이 조금 유해진다.
“가발이라.
그거 아쉽네.”
그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눈동자에 장난기가 비친다.
“뭐가요?”
“직접 봤으면 좋았을 것을.
다음엔 미리 언질을 줘.”
황태자를 향한 내 시선이 가늘어졌다.
여전히 무엇도 읽을 수 없는 그 얼굴을 바라보자 한숨이 나온다.
“전하를 대동했다가 무슨 얘기를 들으려고요.”
“무슨 이야기?”
드디어 윈데이너 후작의 딸이 황태자비가 되는구나, 하는 비아냥이지 뭐겠나.
“…폐하가 바라는 이야기요.”
“아하.”
리안이 과장된 입 모양을 선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쯤에서 나는 다시 황태자에게 내 의지와 의리를 말로써 표현할 필요를 느꼈다.
사람은 마음을 갖고만 있어서는 전달이 안 되지.
표현! 표현해야 해.
“전하, 언제나 윈데이너는 전하의 곁을 지킬 거예요.”
영원히, 제가 누구와 함께하든 상관없이 말이죠!알죠? 알고 계신 거죠? 나, 우리 믿죠?자유를 향한 내 갈망이 지나치게 잘 전해진 탓일까.
“비비안,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이야.
그대에게 약혼자라는 틀을 씌우지 않는 것.”
그가 어린 동생을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안다, 리안이 날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좀 전의 말은 그저 투정이기도 하지만 내 진심이기도 했다.
‘…황후는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상상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황후,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온갖 제약이란 제약은 다 받으면서, 할 일은 더럽게 많지.딱 지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나 느긋하게 하면서 편안히 살고 싶은데.
‘뭐,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늙어 죽을 수 있으면 더 좋고!’
이런 내 소박한 꿈이 그 어리디어린 열한 살 때부터 위협을 받다니.
황가, 나한테 너무 잔혹한 거 아니니!그렇게 10년을 한결같이 지치지도 않고 내게 황태자비 자리를 들이미는 황제, 그가 문제다.
황제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자 갑자기 눈앞의 황태자가 반짝반짝하는 것 같다.
‘어쩜 너는 황제랑 다르게 이리도 잘 컸니!’
나는 대견함과 감사를 담은 눈빛을 그에게 쏘았다.
“전하는 좋은 사람이세요.”
내 부담스러운 시선에 살짝 눈썹을 들어 보인 리안이 살포시 웃었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이라 아주 가끔 저렇게 미소 지으면 곤란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함께하면 되지 않나.
혹시 폐하랑 매번 그리 주고받는 것이 즐거운 거야?”
그의 미소를 되새김질하던 중,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발언에 온 얼굴이 일그러졌다.
‘즐거워? 누구랑, 뭘 하는 게 즐거워?’
“저는 폐하와의 이 지리멸렬한 싸움에 언제나 진심이에요.”
한껏 정색한 얼굴로 내가 얼마나 그 영감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지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군.”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리안이 테이블 위를 손짓했다.
여느 때와 같이 각종 케이크와 샌드위치, 수프까지 놓인 것을 보자니 조금 씁쓸했다.
“전하는 티타임에 이렇게 많이 드세요?”
‘거의 식사에 가까운 음식까지?’
“그럴 때도 있지.”
자기는 입에도 대지 않는 것들을 매번 살뜰히도 준비해 준다.
겉으로는 한없이 무심하고 차가운데, 얘가 이렇게 섬세하고 다정하다.이런 거 보면 내 심장, 문제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저런 사람 옆에서 여태 무사한 거지? 열 번도 더 사랑에 빠질 법한데!
“식기 전에 들어.”
마치 네가 먹는 것은 비밀에 부쳐준다고 말하듯 황태자가 다시금 서류에 시선을 두었다.*그러나 난 황태자가 준비해 준 음식을 신나게 먹을 만큼 둔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 넓은 그라도 자기랑 결혼하기 싫다고 10년째 연기하는 사람을 보는 게 그리 기껍지는 않을 터.
‘뭐, 진작에 눈치챘을지 몰라도.’
그래도 눈앞에서 확인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정말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건 그렇고, 진짜 배고프다.”
기어코 배웅하겠다는 황태자를 억지로 자리에 앉히고 혼자 나오는 데 성공했으나 갈 길이 멀었다.
“궁은 참 쓸데없이 넓어.”
“또 보는군.”
“으악!”
헐떡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옆을 보자 어색하게 양손을 든 브라이트 대공이 보였다.
네가 대체 왜 여기……?
“볼 때마다 놀라는 것 같아.”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나는 어이없음을 숨김없이 표정으로 드러냈다.
매번 이상한 순간에 나타나서 내 심장을 흔드는 게 누군데.
“그 손은 뭔가요?”
그가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제 양손을 힐긋 보더니 내렸다.
대공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눈마저 장난기를 담아 휘어졌다.
“영애에게 내가 무해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그 소문의 대공이 맞는가.
내가 뭔가 사람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사람한테 관심 없다며.
그렇게 안 웃는다며!
“황태자 만나고 돌아가는 길인가?”
그가 내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을 따라 나도 황태자의 집무실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대공에게 눈을 두었다.
“예.
전하를 뵙고 돌아가는 길이에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왜 이러는 거지?여기서 그를 만난 것도 매우 당황스러운데, 이 손은 정말.
“마침 나도 돌아가는 길이니 함께 가지.”
지금 당신 손에 내 손 얹고 같이 복도를, 그것도 황궁의 복도를 거닐어보자, 이 말씀이신가요?
“…….”
‘미쳤다, 미쳤어.’
“하도 오랜만이라.
이거 맞지 않나?”
내게 내민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짓궂게 웃는 대공.
그러나 나는 얄팍한 미소 하나 걸치고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먼저 가시지요, 각하.”
살짝 고개 숙이고 눈도 내리깔았다.
매우 공손한 태도였다.가뜩이나 황태자와 얽혀 있는 처지라 힘든데, 제국의 유일한 대공과 단둘이 있는 상황까지 만들고 싶지 않았다.누가 이걸 보기라도 하면.생각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난 이미 사교계에서 여기저기 찢기고 물어뜯겨서 너덜너덜한 사람이라고.’
“우리 그날, 나눈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아, 그거구나.
그 여인에 대한 정보.
그걸 듣고자 내게 시간을 들이는 거였다.
일부러 찾아온 거였나?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대공을 마주하고 말았다.
‘나 아는 거 없는데, 지금.’
멈춰 서 있던 대공이 몸을 돌려 걷자는 신호를 주었다.
당당하고 단호하게 그와의 동행을 거절하던 명분이 사라졌다.
“충격 때문인지 도통 말을 하지 못해서 아직 이야기를 못 들어봤어요.”
곁눈질하자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셀빈 자작가의 영애라는 건 알아요.”
“그건 어떻게 알았지?”
그야 그 영애의 외향 묘사와 똑 닮았으니까.
연갈색 머리와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는 흔했지만, 그 생김새.
결정적으로 오른쪽 손등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상흔이 있었다.
“귀족 중에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그 영애뿐이거든요.”
이리저리 찢기고 상했지만, 그녀는 귀족의 품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셀빈 자작 영애라는 건 만난 그날 알았다.
“그렇군.
그런데 식사는?”
“따듯하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으로 준비하고는 있는데, 아직 회복 중이라서.”
“아니, 자작 영애 말고 그대 말이야.”
나? 이 순간, 마치 대공이 심은 정보상처럼 진지하게 보고하고 있던 내 모습이 무색한 말이었다.
“황태자궁에서는 다과를 안 내주는 건가?”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의 흐름이지? 그의 의중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지금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라도 났어?’
한껏 당황한 사실은 애써 감춘 나는 그의 질문에 착실히 답하기 시작했다.
“전하는 항상 넘치게 챙겨주세요.
다만 제가 워낙 몸이 약해 많이 들지 못할 뿐인데.”
물론 뒷말은 거짓이다.
한쪽 손을 뺨에 붙인 채 고개를 기울이고 처연한 표정을 곁들였다.
다년간 몸에 밴 습관이 숨 쉬듯 이어졌다.
포로로,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병약한 몸으로, 황태자비 자리를 고사하는 가냘픈 영애의 본분을 잊지 않는 나.’
그리고 그 순간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고 말았다.
분명 억눌린 웃음소리, 그거였다.홱 돌아간 고개가 대공의 얼굴을 향했다.
‘설마 너, 지금 웃었어?’
실수했다는 듯 그가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입가를 막았다.믿을 수가 없다.
사람이 아파서 잘 못 먹는다는데, 웃어? 내 연기에 실수가 있었나? 그럴 리 없는데!
“본의 아니게.”
그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렇다 할 변명 거리는 없어 보였다.
“제가 잘 못 먹는다기엔 꽤 튼실해 보였나 봐요.”
그래서 웃은 거니?어제부터 계속된 굶주림이 극에 달해 한껏 예민한 내가 빈정댔다.
너그러운 황태자랑 어울리다 보니 간이 부은 게 틀림없다.
“아니.
영애는 지금보다 더 먹는 게 좋겠어.”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날카롭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그러나 의심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냥 얼굴이 너무 진실했다.
“정말이야.
오히려 왜 안 먹는지 모르겠군.”
웃음기 지운다고 어설프게 인상 쓰던 좀 전과 다르게 대공이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라니까요,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