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2화 (2/109)

2화

‘왜? 이 상황 뭐야?’

검은 바닥, 푹신하지만 낯선 쿠션.

고요하기 짝이 없는 남의 마차 안.슬쩍 눈만 치켜들자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은 대공이 보인다.

그의 옆자리엔 어느새 벗어둔 가면이 놓여 있다.마차 안으로 들이치는 달빛이 그의 얼굴을 밝혔다.

그 오묘한 빛과 음영 덕에 대공의 얼굴선이 더 도드라진다.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잘생겼구나, 엄청.

좀 전의 긴박한 상황이 잠시 잊혀질 정도로 외모가 훌륭했다.

‘조금 전? …세상에.’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 왜 마차 같이 탔니.

무슨 배짱이었지?아니다.

내가 타고 싶어서 올라탄 것도 아니지, 참.정신없는 와중에 자연스레 이 마차에 나를 태운 것이.

“…영애.”

디에고 브라이트 대공, 이 작자다.눈꺼풀을 느리게 들어 올리자 드러나는 그의 눈동자가 집요했다.

“그대, 오늘 위험했다는 거 알고 있나?”

위험? 책망이 묻어나는 대공의 어투에 반발심이 일었다.

비오첼라가의 정원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서 나도 좀 놀라기는 했지만, 그건 전혀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한마디로 내 잘못은 아니라는 얘기다.

“아, 그렇죠.

마침 각하를 만나 다행이었지 뭐예요!”

그러나 나는 그다지 간이 큰 사람은 아니었다.

억울함을 감춘 채 웃으며 나름 해맑게 답하자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댄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말을 잇던 대공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으로 한참 쳐다보던 그가 크게 숨을 내쉰다.

“…저 여인은 그대가 데려가겠다는 건가.”

타고나길 황제의 그릇이었던 그답게 뱉어내는 모든 말에 힘이 느껴진다.선황제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순리대로 황제가 되었을 사람.

여태 황좌에 대한 별다른 열망 없이 지낸다지만, 그래도 엮여서 좋을 거 없다.특히나 극구 사양하고 있기는 한데, 내가 예비 황태자비로 거론되는 와중에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대공과 구설수가 나는 것은, 아니지.

아니야.가능한 엮이지 말자.

인생 더 피곤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그런 다짐을 하던 내게 또 다른 위기 상황이 찾아왔다.

겨울인데 줄기차게 땀 흘리네, 오늘.

“송구하오나 각하께서도 보셨다시피 여인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정신이 반쯤 나간 그녀는 자신의 이름조차 말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외모, 특히 손등에 희미하게 남은 상흔.

‘셀빈 자작 영애.’

“…그걸 어찌 알지?”

“네?”

흘리듯 의문을 표하는 대공을 보자 절로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 꼴을 같이 봐놓고, 물어본다고?나도 모르게 쏘아보자 대공이 손을 들어 자신의 눈썹을 쓸었다.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소문에 따르면 사람을 꺼리다 못해 혐오해서 북부에 박혀 나오지를 않는다더니.

이렇게 야박해서야!

‘정말 엉망이었는데, 자작 영애.’

“…….”

대공의 인상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낯선 이를 앞에 두고 의견을 펼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내가 그래도 위세 좀 있는 후작가의 영애인데… 의견 좀 피력한다고 당장 모가지 날리고 그러지는 않겠지?

“…제가 여인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세요, 각하.”

한심하게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대로 대공이 여인을 데려간다면 그에 관한 어떤 소식도 나는 접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지금쯤 내가 타고 왔던 후작가의 마차에 앉아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여인을 떠올렸다.그러니까, 여기서 물러나기엔 마지막까지 내 드레스 자락을 쥐고 떨던 그 손이 잊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정작 마차 주인은 이 순간 남의 마차에 앉아 떨고 있는 꼴이지만.대공이 지금 윈데이너 후작가로 향하고 있는 게 맞나.

나 오늘 우리 집에 돌아갈 수는 있는 거야?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눈 감고 있을 때나 그를 감상했지, 눈 뜨니까 얼굴은 고사하고 가슴팍 위로 시선 올리기가 쉽지 않다.

‘지가 대공이면 다야? 존재만으로 사람 기를 죽이고 난리야.’

괜스레 점점 더 바닥으로 향하던 고개가 대공의 한숨 소리와 함께 퍼뜩 들어 올려졌다.

왜, 왜 한숨 쉬어서 사람 긴장하게 만드는 건데.

“그대가 더 나을 수도 있겠어.”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대공을 바라보자 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여인의 거취를 후작가에게 넘기지.”

후작가? 왜 가문을 들먹이고 난리지? 뒤가 싸했다.

저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미소가 그랬다.

“대신 영애는 여인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내게 전해주는 것으로.”

“정리해 볼까 하는데, 어떤가?”

라고 덧붙이는 그의 얼굴에 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전혀 관심 보이지 않던 대공이 가면무도회 유희 좀 즐겨보겠다고 여기까지 왔을 리 없지.’

비오첼라 백작가.

확실히 뭔가 있다.어쩌면 중요한 증거일지 모르는 여인을 넘겨주는 데 저 정도 요구는 할 만해.

그래! 내가 대공이 무섭고, 막 권력에 눌려서 지금 이러는 거 아니야.

“좋아요.

그렇게 하죠.”

여유로운 척하느라 한껏 끌어올린 입꼬리가 부들댄다.그런데 정보? 무슨 정보…….

아무래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것 같다.

쓸만한 거 줄 때까지 닦달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이런 초조한 마음, 제발 대공이 눈치 못 챘으면 싶은데.

좀체 내게서 거두어지지 않는 저 시선이 야속하다.결국 견디지 못한 내가 창으로 눈을 돌렸으나, 유리에 비친 대공의 수려한 옆모습이 나를 번뇌에 빠트린다.

‘와, 눈을 뗄 수가 없네.’

이 마차 안에서 저 남자를 피할 길이 없다.별안간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대공이랑 나밖에 없는데.

‘설마 대공이 웃은 거야?’

고개를 돌려보자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그의 미소가 눈앞에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광경이다.

“그대는 저 여인을 어쩔 셈이지?”

빙긋이 웃은 그가 가벼이 물었다.

그 덕에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한결 느슨해진 분위기에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 또한 살포시 내려간다.

“…딱히, 우선 이야기는 들어볼 참이에요.”

처절했다.

살려달라고 청하는 이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지, 듣고 무언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답을 하느라 마주한 대공의 얼굴이 여전히 어려워서 고개가 창으로 되돌아간다.

“그래.

기대되는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그가 정확히 창을 통해 나와 눈을 맞추었다.

대공의 시선이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기대 같은 거 하지 마, 제발.’

나와 대공을 태운 마차가 후작가에 당도하자 자작 영애를 태운 마차 또한 뒤따른 것이 보였다.

나는 내리자마자 비틀대는 자작 영애의 팔을 움켜쥐고 다가오는 마리에게 일렀다.

“마리, 영애 좀 챙겨줘.”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마중 나온 마리가 경악하며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자작 영애를 부축했다.몸을 돌리자 거대한 마차 앞에 그보다 더한 존재감을 뽐내며 고고히 서 있는 대공이 보인다.방법이야 그렇다 치고 위기 상황에 도와준 것은 부정할 수가 없으니, 무거운 발걸음이 그에게 향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부디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라요, 각하.”

지쳤다.

마차 안에서도 어찌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엉덩이가 다 아프다.

“…다음엔 더 편한 마차로 준비하지.”

마차? 그보다 다음이라니.

당황한 나머지 입을 뻐끔대자 그가 난처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불편했던 것 같아서.”

“전혀요!”

불편했지.

그런데 그건 마차 문제는 아닌데?반사적으로 대공 뒤편의 마차를 힐긋 바라봤다.

매끈하게 빠진 대공가의 마차는 크기부터 남달랐으며 분명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편안함을 선보였다.

‘저보다 좋은 마차가 있을까?’

“그랬다면 다행이군.”

어쩐지 조금 허탈해 보이는 그가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보도록 하지.”

“아, 네.”

‘…빠르면 언제?’

부디 최대한 늦은 만남이기를 기도하며 마차로 향하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 느리고 우아한 걸음을 감상하는데 갑자기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친다.

“영애의 밤이 평안하기를 바라.”

부드럽게 휜 대공의 눈매가 몹시도 야살스러웠다.*꽤 파란만장했던 무도회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나는 이른 아침부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황태자를 만나기 위해 나섰다.황태자? 좋다, 이거야.

한데 입궁만 하면 저를 부르는 황제가 싫었다.어쨌든 오늘의 거슬리는 일, 황제 알현을 무사히 마친 후 남은 과제를 되뇌어봤다.대공에게서 아직까진 어떠한 기별도 없지만, 조만간 그에게 자작 영애에 관련한 정보를 넘겨야 할 텐데.

‘언제 물어볼지 몰라서 더 신경 쓰이네.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내가 막 먼저 소식 넣고 그래야 되는 거야? 착잡하다.’

그날 밤 자작 영애는 말을 잃었었다.

따듯한 물과 포근한 침구가 그녀의 불안과 충격을 다 앗아가지는 못했다.

- 셀빈 자작 영애, 맞지요?잘게 떨리던 그녀의 손등에 내 손을 얹고 조심스레 묻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 다였다.

“정보라.”

생각에 잠겨 황태자궁 복도를 거닐다 보니 금세 그의 집무실 앞이다.

도착과 동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깜짝이야.”

머리와 눈동자, 온통 황금빛을 머금은 황태자가 문 앞을 지켜서고 있다.

“전하,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살며시 고개를 흔든 그가 옆으로 비켜서며 나를 안으로 이끈다.

오후 햇살이 가득한 집무실이 마치 황태자의 색으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

“저는 기다리면 되는데.”

“그럴 필요 없어.”

집무실 안 여전히 넘쳐나는 서류들.

제국의 황태자는 지나치게 성실했다.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녹색 벨벳 소파를 손으로 쓸고 있자 한 뭉치의 서류를 든 황태자가 마주 앉는다.

“폐하 뵙고 오는 길이야?”

아, 황제.

망할 영감탱.

오늘은 좀 다를까, 나름 기대했건만 만나고 온 영감은 여전했다.

“네.

강건한 모습을 뵙고 오는 길이죠.”

황제의 고집은 지독했다.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공작가를 외척으로 두고 싶었겠으나 거긴 딸이 없었다.

황제가 찾은 차선책, 그게 나였다.

- 아가! 오늘도 어여쁘구나.

그래, 저번보다 혈색이 좋아진 것 같은데 이제 아버님이라 부를 준비가 된 것이냐.아버님은 무슨!내가 요새 좀 많이 먹었나.

조금이라도 핼쑥해 보이려고 다급하게 어제부터 굶었는데 억울하다.그간 되지도 않는 병약함을 앞세워 황태자비 자리를 고사한 세월이 길었다.

- 제 몸이 이리 성치 않으니 황태자 전하께 폐가 될까 걱정입니다.그리 말했건만 당최 귓등으로도 듣지를 않는다.

나 좀 그만 내버려둬라.

다른 영애 찾으라고, 할아범.

- 우리 아가, 비비안.

걱정하지 말거라.

내 제국을 넘어 온 천지를 뒤집어서라도 네가 기필코 건강하게 해주마!우리? 우―리이 아가? 그렇게 시작된 창과 방패의 싸움이 어언 10년째다.황제의 흔들리지 않는 신뢰, 황태자의 조신함이 곁들여진 이 사기극의 패배자는 나다.

정식으로 약혼도 하지 않았건만 딱 황태자의 짝으로 공공연히 찍힌 나에게 다가오는 남자는 없었다.그래, 단 한 명도 없었다.

‘아.

외롭다, 외로워.’

길고도 우울한 과거 회상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자 우월하기 짝이 없는 황태자, 리안 로렌스가 눈에 가득 들어찬다.

‘저렇게 완벽한데 어째서.’

내 입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전하, 혹시 남자 좋아하세요?”

서류를 내려다보던 황태자의 무심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