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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화 (1/109)
  • 1화

    【 서로가 기억하는 첫 만남 】

    1월의 한기를 피해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한껏 달아오른 사람들의 열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저 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겠는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나는 남녀가 농밀하게 붙어 서로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봤다.여느 연회와 다르게 홀의 분위기부터 남다른 가면무도회.비오첼라 백작가가 워낙 초대장을 엄격하게 관리하길래,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위세 있는 후작가의 유일한 딸, 황태자비 내정자로 사는 일은 녹록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참 힘든 나날이었는데.타고나기를 귀족답지 못한 성미로 여기도 저기도 제때 속하지 못한 터라 익힌 것이라곤 직감뿐이요, 믿는 것은 정보뿐인 삶.그 직감과 정보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욕심에 찌든 눈, 출처가 미묘하게 불분명한 부.’

    비오첼라 가문, 무언가 냄새가 난다고.그런데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나.은밀하게 나누고자 한 것이 정보가 아니라 색욕이었다니.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벌이는 연회란 게 이런 거였어?’

    대단했다, 아주.나로선 도저히 그들 사이로 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우선 벽으로 가자.코앞까지 들이대야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들지 않는 풍경.

    넝쿨처럼 포진한 사람들의 뭉그러진 모습.그 사이를 간신히 헤쳐 나와서야 내 마음의 안식처, 벽에 도달했다.열여섯 데뷔탕트 이후, 숱하게 참석한 연회 내내 황태자 외에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아 의도치 않게 도맡았던 벽의 꽃.

    남들이 신나게 춤출 때 벽이나 장식한 나.

    ‘…지난날 이토록 벽이 편했던 적, 있었던가.’

    데뷔탕트도 치르기 전, 고작 열한 살인 내게 황제가 황태자비 자리를 권유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이렇게나 사교계에서 내 위치를 명확히 하리라고는.황태자비라니,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 자리가 어찌나 바쁘고 어려워 보였던가.

    병약한 황태자비는 원치 않겠지 싶어 이후 갖가지 건강 핑계를 댔다.

    그러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아주 어렸을 때는 나도 이런저런 미래에 대한 로망과 기대가 있었는데.데뷔탕트, 그 공식적인 자리에서 황제가 기어이 내뱉은 말은 끝내 내 자리를 한정 짓고 말았다.

    - 비비안 윈데이너, 황태자비로 딱 아닌가!황태자비 내정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병약한 몸.그게 나였다.

    덕분에 여자고 남자고 죄다 나랑 안 놀아준다.시기, 질투, 호기심으로 점철된 눈빛과 공격 아닌 공격만 받다 보니 나도 내 나름 무기랍시고 집착하는 것이

    ‘정보’

    였다.오늘은 정체를 숨길 수 있는 무도회니 귀족들 틈바구니에 섞여 쓸 만한 소문이라도 채집해 볼까 하고 왔는데.글렀다.

    정보는 무슨, 비오첼라의 화려하고 천박한 본성만 한 번 더 확인하고 돌아가는 꼴이 되겠어.벽을 뒤로하고 홀을 바라보자 탁한 공기 속에서 유독 짙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온전히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음에도 남자는 그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이마를 덮은 흑발,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이 강렬했다.착각인가.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홀에 들어선 이후 계속 방황하던 시선이 자꾸만 남자에게 끌려간다.

    이유 없이 눈길이 가는 것만큼 본능적으로 그 눈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어쩐지 맹수를 맞닥뜨린 초식동물의 심정을 좀 알 것 같네.’

    그는 자신이 이 무도회장의 상위 포식자임을 명백히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괜히 그 짐승의 시야에 걸리고 싶지 않아 애써 무시하던 그 순간.더없이 청량한 겨울 냄새가 덮쳐왔다.

    ‘…응?’

    팽팽히 당겨진 검은 셔츠, 그 가슴팍 외에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너른 가슴이 눈앞을 메우고 있다.

    ‘이게 뭐야?’

    머리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으나 눈은 착실했다.셔츠가 갈라지는 지점부터 시작된 살갗을 따라 나도 모르게 시선이 위로 향한다.

    슬쩍 보이는 쇄골을 지나 목을 훑어 도달한 곳에 굳게 힘이 들어간 듯 보이는 턱선이 있었다.아까 그 남자다.고개를 한참 꺾어 가면으로 가려진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보았지만, 누군지 모르겠다.다만 고위 귀족, 그중에서도 엄청난 놈인 게 분명하다.

    절대로 감춰지지 않는 분위기가 그랬다.

    “…누구?”

    작게 새어 나온 속삭임에 남자가 돌연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비비안 윈데이너.”

    고개를 숙여 속삭이는 그의 머리칼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를 알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다지 좋은 시선이 아닌 것 같아서, 그대를 향한 것들이.”

    침잠한 목소리가 권유의 탈을 쓴 충고를 내뱉는다.슬쩍 그를 빗겨 무도회장을 살피자 몇몇 불손한 눈빛이 나를 훑는다.명백한 탐욕의 시선.

    “아.”

    이런 쪽으론 전혀 경험이 없는 터라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즐거이 얽혀 있는 저들의 세계는 내가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런 상대로 보고 있는 거라고?’

    그의 손이 느릿하게 다가와 내 가슴께에 얹어진 머리칼 한 줌을 쥐었다 놓는다.남자의 돌발 행동에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내리깐 시선의 위치가 하필 더 안 좋았다.그 덕에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언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간신히 내뱉은 말에 굳게 다물린 남자의 입매가 천천히 호선을 그린다.

    “부디 그리해주면 고마울 것 같군.

    내가 그대 곁을 더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가면 너머 그의 푸른 눈이 나를 담아낸 채로 휘었다.느닷없이 내게 다가온 이 남자도, 갑자기 의식하게 된 저들의 시선도.

    이 모든 것이 한데 뒤엉켜 날 혼란에 빠트렸다.무도회장 안을 떠도는 낯선 향마저 내게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곁을 지킬 수 없다더니 왜 안 가고 서 있는 거야?’

    슬쩍 눈을 들자 날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종용이 담겨 있다.

    “계속 여기 있을 건가?”

    아니, 나도 더 여기 있기 힘들긴 한데.

    대체 네가 누군데 이렇게까지 내 귀가를 닦달하는지 모르겠다.여전히 내게 못 박힌 시선을 치우지 않는 그를 나 또한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가발이 아닌 것 같은 흑발, 가까이서 확인한 벽안.

    그리고 내 정체를 알면서도 쉬이 하대할 수 있는 자.’

    제국 귀족의 특징이라면 줄줄 읊을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자는 확신하기 어렵다.

    “…….”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가늘어지며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는 내게 그의 정체에 대해 고민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다, 가!’

    눈빛으로 등 떠밀린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그 길로 나는 쫓기듯 정원으로 빠져나왔다.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이날을 위해 고심 끝에 고른 가발, 검은 머리가 보인다.

    이윽고 좀 전 굵고 기다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쥐던 그 남자가 연이어 떠올랐다.

    ‘진짜 내 머리칼도 아닌데.’

    비밀스러운 만큼 이런저런 말들이 오갈 거라고 기대했던 무도회였으나,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오늘 귀족들은 입으로 대화하지 않았다.

    몸으로 했다.

    ‘뭔가… 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돌아가자.”

    어림짐작으로 방향을 잡고 걷다 보니 이 저택, 외관부터 돈 냄새가 물씬 난다.비오첼라 백작가가 본디 이렇게 부유한 가문은 아니었는데.몇 해 사이 다양한 사업에 손댔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중에 도박장도 있다더니.

    ‘아마 주된 수입원은 도박장이겠지.’

    멀리서 몇 번 본 적 있는 비오첼라 백작은 항상 거들먹거리며 탐욕스러운 눈을 번들거리곤 했다.

    덕분에 품위 없이 돈만 밝힌다고 혀를 차면서도 부유한 비오첼라와 어울리고 싶어 안달 난 귀족들이 넘쳐났다.한데 아무래도 그들이 쥐고 있는 능력보다 드러나는 부가 지나치게 커 의심스러웠다.

    ‘내가 모르는 다른 사업이 또 있나?’

    “…궁금하네.”

    무엇으로 이리 단기간에 돈을 움켜쥐었을까.열심히 정원을 거닐었으나, 다들 얼굴을 감추는 게 중요해서인지 사람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더불어 쓸데없이 정원은 넓었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

    “와, 나 혹시 길 잃은 거야?”

    정말 되는 일이 없구나,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되는 건가.마침 커다란 나무의 뿌리가 땅 위로 도드라진 것이 보였다.

    이 지친 몸을 잠시 얹기에 적합해 보인다.앉아보겠다고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는데 앞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살피자 파리하게 질린 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사람?’

    “빨리 찾아! 멀리는 못 갔을 거다! 망할 계집.”

    갑작스레 들려온 욕설과 함께 여럿의 발소리가 엉켜 들리자 여인에게서 가냘픈 신음이 새어 나온다.

    “살… 살려주세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여인의 목소리엔 가는 떨림과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뭐야, 어쩌지? 우선 숨겨? 숨겨줘야 하나! 아니, 여기 숨을 데가 어디 있어!’

    잠시 멀어졌던 소란함이 도로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린다.

    “여기, 여기로!”

    나는 넘쳐나는 혼란을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드레스 자락을 허벅지까지 끌어올렸다.

    당장 생각나는 것이 이것뿐이라니.

    “어서!”

    내 숨죽인 외침에 여태 숙이고 있던 여자의 고개가 들리고, 속절없이 떨리던 그녀의 눈이 차츰 또렷해졌다.비척대던 여인이 힘겹게 내 드레스 안으로 여윈 몸을 욱여넣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와, 와.’

    드레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하나 이내 다리에 닿은 억누른 흐느낌이 느껴지자 머리가 차가워졌다.이제 어쩐다.

    비오첼라 저택을 벗어나긴 해야겠는데.섣불리 움직였다가 발이라도 꼬이면 어쩌지? 아니, 마차까지 갈 수는 있는 거야? 해 뜨기 전에 가능은 하겠냐고!한창 속을 태우고 있는데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상에! 이번에는 또 뭐야?’

    식은땀이 주룩, 등줄기를 관통하는 듯하다.

    ‘설마…….

    걸렸어? 걸린 거야, 나?’

    슬쩍 눈을 내려 봉긋이 솟은 치마 쪽을 바라봤으나, 다행히 고요했다.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눈을 질끈 감자 후회가 밀려왔다.

    나 왜 여기 오겠다고 설친 거지? 이깟 가면무도회가 뭐라고.

    “지금 뭘 하는 거지?”

    그 순간 귓가에 내려앉는 익숙한 음성, 조금 전 무도회장에서 내 앞을 가로막던 목소리였다.다시 한번 마주한 남자가 어쩐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날 보고 서 있었다.그의 눈길이 내 얼굴에서 미끄러져 치마 쪽으로 향하는 것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다.

    “내가 눈을 뗀 게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남자가 헛웃음을 흘리며 상체를 숙여 내게 다가왔다.

    “영애, 아직 돌아가지 않은 건가?”

    “자, 잠시 길을 잃어서… 쉬었다가 갈 참이었어요.”

    그러니까, 좀 가줄래?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건데…….

    좀 지나쳐 가주라.

    “그런가.

    그럼 마차까지 에스코트하도록 하지.”

    남자의 커다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아니요! 제가 지금 그, 발이 좀 아파서 더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지금 제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맞나.

    남자의 정체가 내가 짐작한 대로라면, 그 사람은 나와 어떤 접점도 없는데.

    ‘그런데 너, 대체 나한테 왜 그래?’

    고개를 들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의 흑발과 푸른 눈을 노려봤다.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어떻게 봐도 군림하는 자의 분위기를 숨기지 못하는 이.

    “…대공 각하.”

    끝까지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아는 체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데.

    “생각해 주셔서 무척 감사하나 혼자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네요.”

    애써 미소를 걸고 당당하게 청했으나 그의 손은 거둬지지 않았다.

    “혼자? 혼자라.

    조금 전에 길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낮게 읊조리더니 다시 한번 내 치마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체 어디 숨은 거야?”

    짜증이 묻어나는 외침이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자 어깨가 움칠, 떨린다.

    대공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틀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겨울인데, 땀이 다 나네! 어쩌지? 이렇게 들킬 수는 없는데.’

    “…지금 숨어 있는 건가?”

    ‘어흑, 숨어 있는 거 아닌데.

    숨기고 있는 건데!’

    “숨기는요.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최대한 안정적인 목소리를 내느라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점점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럼 바닥이 찬데 그만 일어나지 그래?”

    맞는 말인데, 제가 지금 드레스 속에 여인을 숨기고 있거든요? 어떻게 안 들키고 걸어갈 수 있을는지!수색하던 사내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조함에 입술을 말아 문 채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는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대공이 천천히 몸을 내려 다가왔다.

    “아무리 봐도 내가 필요해 보이는데, 아닌가?”

    “…….”

    가면 너머 대공과 눈을 맞췄다.

    도박은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이 눈동자에 걸어봐야 할까.

    “잡아, 내 손.”

    내민 순간부터 내내 거두어지지 않던 그의 손.

    그 커다란 손을 흔들어 보이는 대공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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