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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72화 (72/74)
  • 72회

    트릭연참 1/2

    나는 한동안 눈만 깜빡거리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애를 태우려고 그런 건 아니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아서.

    사실 우린 사귄 적이 없으니, 헤어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대답하면…… 안 되겠지?

    공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공작으로부터 여러 차례 사과를 받았지만, 그가 이렇게 절절하게 나를 바라본 적은 없었다.

    나도 공작한테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건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거나, 청혼 얘기를 들은 내가 마음을 바꿨다고 생각하거나…….

    아니, 이러지 말고 공작한테 빨리 대답을 하자. 지금 버려질 운명을 직감한 개처럼 날 보고 있어!

    “그, 그 편지 제가 쓴 거 맞아요.”

    아, 진짜 창피해서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네?”

    공작이 멍하게 되물었다. 말은 이미 엎질러졌고 돌아갈 길이 없다. 얼굴이 심하게 화끈거렸다. 한 번 열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사, 사, 그, 사…….”

    “사?”

    “사…… 사랑한다는 편지요.”

    망할.

    나도 진짜 성숙한 태도로 설명하고 싶었다. ‘유릭스, 당신이 받은 고백 편지는 제가 쓴 거예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적었던 그 편지 말이에요.’라고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단 말이다. 근데 너무 떨려서 똑바로 말하기가 어렵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도…… 좋아한다고요.”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다. 마음대로 엉켜버린 혀를 입안으로 말고, 이어질 공작의 질문을 기다렸다. 트릭스터가 쓴 게 아니었냐고, 아까는 왜 말 안 했냐고 물어보겠지. 그때는 진짜 차분하게 대답해 주자.

    그러나 예상과 전혀 다른 얘기가 들렸다.

    “정말인가요?”

    공작의 목소리가 극적으로 달라졌다. 목소리가 지하에서 지붕까지 확 뛰어 올라온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공작의 표정을 확인하니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내 말 한마디에 어린애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그를 보니,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 울리지 말고 말할 거면 빨리 하자.

    “사실 편지를 두 장 썼거든요. 하나는 공작님이 받으신 거고, 다른 하나는…… 트릭스터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네.”

    공작이 눈을 빛내며 열렬히 호응했다. 심지어 고개까지 두세 번 끄덕였다. 엄청 행복한 얘기라도 듣는 얼굴이라 좀 민망했지만,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들킨 듯한 수치심은 조금 옅어졌다.

    “저는 트릭스터 편지를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트릭스터가 편지를 바꿔치기한 것 같아요.”

    공작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 한 호흡에, 내가 한 모든 말을 이해한 듯했다. 어쩐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제 뭐라고 할까?

    내 손을 잡은 공작의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떨림은 사라지고 없었다. 공작은 벅차오르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나를 안았다.

    “억!”

    깜짝 놀라서 소리를 냈는데 공작은 나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와 목에 고개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고, 엄청난 속도로 뛰는 공작의 심장이 느껴져서, 좀 간지러웠다.

    귓가에 흩어지는 목소리.

    “제가 오해했네요.”

    그 한마디에 측량할 수 없는 환희가 넘실거렸다. 너무 꽉 안겨 있으니 가슴이며 배가 눌렸지만, 공작과 이렇게 스스럼없이 포옹한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죠……. 그니까 울지 마세요.”

    공작이 나직하게 웃었다. 눈물을 보인 게 자기도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팔을 움직여 함께 공작을 껴안았다. 공작의 몸은 아주 단단했지만, 그만큼 따뜻했다. 공중을 오가는 강한 바람도 지금만큼은 산들바람처럼 유순하고 정답게 느껴졌다.

    “네.”

    짧은 대답을 들으니 실감이 났다.

    다 끝났다는 게.

    “미르아.”

    달게 속삭인 공작이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온기마저 사라지진 않았다. 눈이 마주쳤고,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움직였다.

    공작의 몸을 꼭 붙들고 목을 길게 빼 다가갔다. 입술이 겹쳐지기 직전에 눈을 감았다.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어둠이 찾아왔다.

    트릭스터 할머니에 대해서도 더 얘기해야 하는데. 모든 말이 나와 공작의 입안에서 사탕처럼 녹아버린다.

    일단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늘을 나는 즐거움을 누려야지. 내가 또 언제 하늘을 날아 보겠어. 그리고 또 언제, 구름 위에서 키스해 보겠어?

    -

    마법 학교 소집일 행사는 트릭스터의 등장 때문에 완전히 엉망이 되었지만, 어떤 마법사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나와 공작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까지 쳐댔다.

    이제 마법사라는 이 태평한 사람들한테 적응해버린 것 같다. 심지어 손뼉 치는 사람 중에는 리리와 집사 할아범도 있었다. 솔직히 해탈한 심정이다.

    할아범은 나와 공작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아, 이 뒤는 저랑 리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두 분 다 가십시오. 어디 가서 깊고! 진솔하고! 비밀 한 점 없는! 대화를 나누시라고요.”

    “할아범, 그거 알아? 트릭스터 할머니가 나 지붕에서 떠밀었다?”

    “예, 예.”

    “그래서 나 신발도 벗겨졌어!”

    “아이고. 제가 주워 놨습니다.”

    할아범은 살았으면 됐다는 투로 대충 대답하더니, 놀랍게도 진짜 내 신발을 건네주었다.

    “어……. 고마워.”

    이건 어떻게 주웠대? 진짜 집사는 집사야. 어안이 벙벙한 채로 신발을 신으니, 할아범은 기다렸다는 듯 리리를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리리도 내게 눈을 찡긋해 보이곤 할아범 뒤에 바짝 붙었다.

    트릭스터 만났다는데 저렇게 태연해도 되는 거야? 아무래도 할아범도 나만큼이나 트릭스터에게 익숙해진 모양이다.

    어쨌든 할아범 말이 맞다. 일단 돌아가야겠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기운이 있지만, 지붕에서 떨어진 순간의 충격은 여전하다. 공작과 더 얘기하면 좋겠지만 씻고 눕고 싶은 마음 역시 간절하고.

    공작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그럼…… 마차에서 얘기라도 좀 할까요?”

    “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마차에 탔다.

    마차가 가볍게 흔들린다. 말발굽 소리도 함께 들린다. 내 옆에 나란히 앉은 공작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이대로 있다간 가는 내내 키스만 할 것 같아서 재빨리 말을 꺼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제 트릭스터는 간 것 같아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트릭스터고 뭐고 관심 없어 보이더니, 이제야 얘기를 들을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심지어 공작은 더 말해보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기까지 했다.

    “이렇게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가고, 그러나 봐요. 언젠가 또 올 수도 있겠죠? 저한테 자꾸 왜 이러느냐고 묻지도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하더라고요.”

    이상하게 일이 끝나니 트릭스터 할머니가 밉거나 싫지 않다. 그냥 내가 지나쳐 온 시련 같은 느낌이다. 부모님의 죽음도, 몇 년에 걸친 불운도 결국 과거가 되었듯.

    공작은 어쩌지? 트릭스터 잡으러 수도까지 왔는데 트릭스터가 가 버렸으니. 물론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장난을 칠 테니 찾으려면 찾을 순 있겠지만, 아무래도 트릭스터는 못 잡을 것 같다. 공작이 아닌 누구라도.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트릭스터는 사람이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닐 거예요.”

    “그렇군요.”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공작은 크게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어느 정도 짐작한 사실인 듯했다. 말을 잇는 공작의 어조는 아주 담담했다.

    “트릭스터가 신인가 괴물인가 하는 문제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오랜 논란거리였습니다. 저는 붙들 수 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잡을 수 없는 신일지도 모르죠.”

    직접 만난 트릭스터는 신도 괴물도 인간도 아니었다. 그냥 인생 곳곳에 존재하는 장난이고 함정이고 모순이었다. 나한테 인생에 이유를 묻지 말라고 했지. 그러니 아마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유 없는 운명의 장난에 걸려 넘어지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공작과의 만남도 달콤한 함정이었다.

    이 사랑은 포상도 아니고 처벌도 아니다. 그냥, 우리는 어쩌다 만났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랑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생각을 공작에게 말하지 않았다. 때마침 마차가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는 더 중요한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마차에서 힘께 내리며 공작을 불렀다.

    “유릭스.”

    “네.”

    흔들림 없는 대답이다. 언제 울었냐는 듯, 언제 애처롭게 매달렸냐는 듯 깔끔하고 단정한 표정도 눈에 들어온다. 조금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반지는 그냥 가져가는 거예요?”

    “…….”

    공작의 뺨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마부가 마차를 몰아 사라진 후에야, 그의 침묵이 끝났다.

    “네, 아직은 이르다고 하셨으니.”

    애써 대답하는 얼굴이 어쩐지 시무룩해 보인다. 청혼할 준비를 한다고 혼자 얼마나 들떠서 왔을까. 갑자기 한밤중에 사랑한다는 편지를 쓴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음, 그렇게 생각하니 특별히 그 고백 편지가 창피하진 않다. 공작도 그 편지를 그냥 귀엽고 사랑스럽게 받아들였을 거야. 내가 공작의 뜬금없는 청혼을 받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기뻐서 웃었겠지.

    한결 상쾌해진 마음으로 부탁했다.

    “그냥 지금 반지 주세요.”

    “네?”

    “커플링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말해놓고 나니 갑자기 쑥스러워 조금 웃었다. 너무 당당하게 달라고 했나?

    공작은 홀린 듯 나를 바라보다가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급히 품을 뒤지더니, 내가 말을 바꿀까 염려하는 사람처럼 반지를 꺼냈다.

    “미르아.”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공작이 약간 떨면서, 내 왼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햇빛을 난반사하는 다이아몬드는 찬란했다. 물론, 이어진 공작의 말보다 빛나지는 않았다.

    “당신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계속 대답하고 답장하는 공작이 성가시기 이를 데 없었는데, 이제 우리는 서로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다. 앞으로 나는 공작의 말에, 공작의 연락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겠지. 저주 때문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사랑 때문에.

    그의 모든 마음에 답하여, 나도 입을 열었다.

    “저도요.”

    우리 영원히 서로에게 대답해 줘요.

    인생이 어떤 장난을 친다 해도, 어떤 함정을 준비한다 해도, 당신에게 대답하는 것만큼은 잊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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