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71화 (71/74)
  • 71회

    트릭

    이게 재밌어? 사람을 돌로 만들고, 홀딱 젖은 꼴로 추운 방에 가두고, 전해지기를 원치 않은 편지를 제멋대로 부치는 일이 재밌어?

    와르르 따져 묻기도 전에 할머니가 내게서 멀어졌다. 온기가 사라지고, 다시 사나운 바람만 귓속을 채웠다. 이렇게 높은 곳만 아니었다면 할머니고 트릭스터고 멱살을 잡아다가 머리통을 쳐줬을 텐데!

    할머니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그러니까 인생에 이유를 묻지 마, 백작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다 막히네.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다. 얼굴을 봉선화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이면서! 부끄러운 척 고개를 비틀었다고!

    “가서 공작이랑 사랑이나 해.”

    그 한 마디가 내 굳은 혀를 풀어주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빼며 모든 안면 근육으로 혐오를 표현했다.

    “지랄 났네.”

    “으하하하!”

    더 참지 못하고 뱉은 쌍욕에 할머니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나와서 좋겠다, 응? 난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견디고 지금 또 죽을 위긴데. 한 네다섯 번쯤 죽을 뻔해도 죽음의 위기에 태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는데.

    이딴 거 배우고 싶지 않아!

    할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턱 잡았다. 왜, 왜 그러는데. 뭔데, 뭔데, 놓으라고!

    “궁금하지 않아?”

    “아니, 뭔지 몰라도 안 궁금해!”

    내 어깨를 잡은 할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할머니인 척하면서 힘도 세다. 손가락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다. 심지어 이 손, 점점 날 밀고 있다! 두 손으로 덥석 할머니의 팔을 움켜쥐었다.

    밧줄에 매달리듯 세게 쥐었는데 할머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머리를 기울여 골몰할 뿐! 주름진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인다.

    “공작이 지붕에서 떨어지는 백작님을 구할 수 있을까?”

    개 같은 놈아, 진짜 하지 말라고!

    외치기도 전에 할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중심을 잡고 있던 몸이 휘청 기울었다. 어찌해볼 틈도 없이 다리가 풀리며 우당탕 지붕의 경사를 나뒹굴었다. 할머니 팔이라도 안 잡고 있었다면 그대로 굴러 떨어졌을 거야!

    나는 할머니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떨어지기 싫어, 싫다고! 마법사는 공작이지 내가 아니야! 난 하늘을 나는 마법도 쓸 줄 모르고 그냥 평범한 상단주라고!

    다행히 할머니는 나를 팽개치지 않았다. 그저 자기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다리를 버둥거리는 날 지켜보았다. 오른발에서 신발이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골이 오싹하다. 아니, 오싹하기 전에 이미 기절 직전이야!

    나는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힘을 주며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나 미르아 헥센, 운명의 장난에 굴할 소냐! 날 현혹하지 말고 물러가라, 이 나쁜 놈아!

    …라고 하려고 했는데.

    “으아아악! 살려줘! 놓지 마, 놓지 마아아악! 아으아아악! 나 죽어! 죽기 싫어! 이 개새끼야, 나 죽기 싫다고! 진짜 왜 이러냐고으아악!”

    실제 내 입에서 튀어나간 소리는 이런 비명이었다. 사실 비명도 아니다. 다람쥐를 꼬집어도 이것보단 위엄 있겠다 싶은 초라한 꽥꽥거림이다.

    내 볼썽사나운 모습에도 할머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 레파토리를 시작했다.

    “왜 이러냐고? 그냥 내가 극적인 로맨스를 좋아해서.”

    “알겠고 나 끌어 올려줘, 올려 달라고!”

    “잘 살아, 백작님. 그동안 재밌었어.”

    설마. 아니지, 진짜 아니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려는 거 아니지!

    말을 마치자마자 할머니가 팔을 휘둘렀다. 내 손이 허무하게 미끄러졌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할머니를 노려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는데 세상은 느려졌다. 공기라도 붙잡으려는 듯 허우적거리는 내 두 손. 가련하게 버둥거리는 다리. 신발이 벗겨진 오른발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낄낄대는 할머니의 얄미운 얼굴까지.

    돌이 되어서 죽을 줄 알았는데 떨어져 죽네. 돌이 되는 건 적어도 아프진 않았는데!

    죽음이라 믿은 그때,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공작의 목소리는 나중에 도착했다.

    “미르아!”

    그 부름이 주문이라도 되는 듯, 갑자기 중력이 사라졌다.

    “…응?”

    내 몸이 갑자기 모든 무게를 상실하고 공중에 멈추었다. 그러나 완전한 정지는 아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마치 허공에 날리는 꽃잎처럼.

    정신이 없는 채로 고개를 마구 돌렸다. 여전한 하늘, 할머니가 사라진 빈 지붕, 내 아래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 땅으로부터 수 미터쯤 떨어진 곳에 둥둥 떠 있는 나.

    그리고 다가오는 공작.

    “미르아!”

    그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달려오며 내게 손을 뻗는 모습이, 그림 같았다. 아까 공작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공작의 우는 얼굴은 이렇게 선명한데. 깨끗한 뺨을 타고 흐르던 한줄기 눈물, 서럽게 떨리던 푸른 눈동자…….

    설명하고 달래줘야 하는데.

    막연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닿았다.

    그 순간, 돌풍이 나를 하늘 높은 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바람에 휩쓸리는 종잇장이라도 된 듯 멀리 날려갔다. 공작의 손이 멀어지고 가깝던 지상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으아아악!”

    이게 도대체 뭐야!

    나는 허공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고 앞으로 넘어졌다 뒤로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태풍에 휘말린 느낌이었다. 심하게 어지러웠다. 속이 미치도록 울렁거려 그대로 먹은 걸 다 토하고 싶었다.

    하늘에서 토하는 색다른 경험을 하려는 순간, 단단한 두 팔이 나를 안았다.

    뒹굴던 속도가 있어서 거의 부딪치다시피 했다. 머리가 징 울릴 정도로 아팠지만, 해일과도 같은 안도가 아픔도 잊게 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서 첨벙거리다가 갑자기 바닥에 발이 닿은 느낌이었다.

    나는 구원이라도 받은 양 다가온 사람을 힘껏 안았다. 익숙한 온기, 익숙한 체향, 내가 낯선 하늘에서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공작의 품에 머리를 묻고 있으니 서서히 속이 가라앉았다. 어지럽던 머리도 점차 정리되었다. 공작을 붙잡으니, 몸도 더는 바람에 휘둘리지 않았다. 장대에 단단히 묶인 깃발처럼.

    “괜찮으십니까?”

    머리 위에서 들리는 물음에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해를 등진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혹시라도 공작을 놓칠까 봐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네, 괜찮아요……. 근데 이게 뭐죠?”

    나는 방금 종잇장처럼 하늘을 날았다. 우아한 새가 아니라, 종잇장. 자기 의지 없이 바람에 휘둘리는 종잇장 말이다.

    공작이 미안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백작님의 몸을 아주 가볍게 만든 겁니다. 추락하고 계셨는데 제가 너무 멀리 있어서, 그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런 마법도 있구나. 하여튼 별 마법이 다 있네.

    좀 진정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지붕에 있을 때보다 훨씬, 훨씬 더 높이 올라왔다. 아래 있는 사람들이 엄지보다 더 작게 보인다. 공작이 청혼한 산책로의 나무들 역시 장난감 같아서, 입김을 한 번 부는 것만으로도 싹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지붕에 있을 땐 할머니 때문에 너무 무서웠는데, 지금은 공작이 날 붙잡고 있으니 한결 안심이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날 구했으니 적어도 추락사하게 만들진 않겠지.

    바람이 분다. 아까와는 달리, 순하고 유순한 바람이다. 마치 공작이 바람을 길들여 내게 선물한 것 같다. 뺨이 시리지만 내내 무더운 곳에 있다가 냉기를 맞이했을 때처럼 상쾌하다. 손을 뻗으면 그대로 구름을 한 조각 떼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공작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저, 감사해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공작의 목소리가 어쩐지 어둡다. 착각인가? 나라도 밝은 어조로 덧붙였다.

    “그리고 왠지 트릭스터도 이제 안 올 것 같아요. 저한테, 그동안 재밌었고 잘 살라고 했거든요. 그건 작별인사잖아요.”

    갑자기 내 인생에 끼어들었듯, 갑자기 사라진다. 인생의 모든 우연과 사건과 함정이 그렇듯. 장난꾸러기 신, 괴물, 변덕스러운 운명.

    이제야 왜 공작의 스승이 트릭스터를 죽일 수 없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이제 우리한테 질려서 갔나 봐요. 잘 됐죠?”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대답에 영혼이 없는데?

    그래도 하늘에 안정적으로 선 공작은 천사로 보였다. 공작의 수행원처럼 뒤로 펼쳐진 새하얀 구름 조각들,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며 흔들리는 금발, 내 두 어깨를 잡고 가만히 굽어보는 얼굴에 새겨진 기이한 우수까지.

    …우수?

    착각이 아니다. 공작의 분위기가 확실히 이상하다. 어, 뭐, 방금까지 위험했으니 마냥 즐거울 순 없지만, 그래도 살아났잖아? 하늘도 이렇게 둥둥 날고. 저렇게 표정 안 좋을 일이 대체 뭐가…….

    “미르아.”

    공작이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내게 고정된 눈동자가 다친 짐승의 것 같다. 마음 언저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애처롭고 처연하다.

    으아, 생각났어! 할머니 나타나기 전에 우리 무슨 얘기 중이었는지!

    내가 뭐라고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저 때문에 많이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결코 당신을 함부로 대하려 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 편지를 당신이 직접 쓰신 줄 알았습니다.”

    “아, 그, 그게요.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공작이 팔을 움직였다. 나와 공작의 손가락이 단단히 얽혔다. 공작은 내가 뿌리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공작의 간절함이 전해졌다. 심지어 공작은 혼자 설원에 내팽개쳐진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제발, 미르아.”

    눈 내리는 소리가 이와 같을까. 아니면 달이 기우는 소리인가. 공작의 목소리가 호된 여름비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내 귓가에 내려앉았다. 샘물처럼 솟는 맑은 슬픔에 젖어, 그가 연이어 간청했다.

    “이대로 헤어지자고 하진 말아 주세요.”

    [작품후기]콩콩검은콩님, 제리gogo님, 소를리님, 별똥별0ㅅ0님, SDjemma님, 알수없는게시자님, Nerimaki님, Jnancy님, Reinette님, hihihu님, 다내님, 김뭄님, 김뚝깨님, 쏨쏨이네님, 네버린a님, 라바트님, 비인강님, 흼망님, 0스텔라0님, suj0302님, 까망도롱뇽님, 제쿠늑님, 베리피치님, 넌나의소원이야님, Sol14님, blackkit님, 알트라님, ㅣ이자벨ㅣ님, 싱싱한알래스카연어님, 아아아아야님, 레티엘님, 레몬e님, 타락한나락님, lcanUcan님, 유후우후님, 떵실님, CoCoMONGg님, 033님, 로판의마당발님, 스온님, 손초님, fffwok님, Percico님, o주주o님, 조선무님, 또롱이언니님, 빠라람님, Sen98님, 비비안19님, 0p0p님, 노네임2님, 큐뀨뀨ㅠ님, 소설같은삶님, 오뚜기카레님, 켠G님, 장동우킬러님, skql5님, 봄타님, 여우와부엉이님, 이화민님, 또댐미님, 카인G크리티카님 전편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ㅅ!!!

    *Q. 유릭스 울면 예쁜가요?

    A. 네^^^^^^^^^^^ 그 얼굴 묘사하고 싶어서 미르아 시점으로 쓸까 고민했는데, 공작 심리묘사 때문에 공작 시점으로 써서 맴이 아픕니다ㅋㅋㅋㅋㅋㅋㅋ

    *느껴지시겠지만 곧 완결입니다. 주말 쉬고 오든지 일요일에 오든지 할게요!!!! 여기까지 함께해준 여러분!!!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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