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70화 (70/74)
  • 70회

    트릭연참 2/2

    유릭스 안에서 분노의 불꽃이 거세게 튀었다. 위장된 편지를 읽고 소년처럼 들떠 몸부림치는 자신을 지켜보며, 트릭스터는 얼마나 비웃었을까!

    유릭스가 확 튀어나가기 전에 미르아가 비명처럼 외쳤다.

    “할머니!”

    “…할머니?”

    유릭스가 멈칫 제자리에 섰다.

    설마 트릭스터가 미르아의 할머니란 말인가? 아니면 저 노파가 트릭스터라는 예감이 틀렸던 건가? 하지만 트릭스터가 아니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인기척도 없이 숨어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혼란스러운 정보의 중첩에 유릭스가 주저하는 사이, 노파가 휙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미르아가 그 뒷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빽 소리쳤다.

    “빨리 잡아요!”

    미르아는 유릭스를 기다리지도 않고 목숨이 걸린 사람처럼 달려나갔다. 유릭스는 재빨리 바닥을 박차며 그녀를 말렸다.

    “미르아, 위험합니다!”

    물론 미르아는 그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친놈처럼 부르짖었다.

    “할머니, 거기 서어어어어!”

    -

    할머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했다. 나무 사이로 재빠르게 쏙쏙 빠져나가며 지그재그로 달렸다. 달아나는 한 마리 다람쥐처럼 잽쌌다.

    그러나 무엇도 내 분노의 질주를 막을 순 없다!

    장난을 쳐도 정도껏이지 이건 장난의 범위를 넘었잖아! 대답 좀 안 했다고 사람을 돌로 만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사람을 이렇게 수치스럽게 하는 게 장난이야? 당하는 사람도 기분 좋아야 장난이라는 거 안 배웠냐고!

    정장 바지에 낮은 구두를 신어서 달리기도 불편하다. 근데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창피도 당할 만큼 당했어! 할머니 진짜 너무해!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으아아악!”

    편지 문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고함을 지르며 내달렸다.

    뒤에 팽개치고 온 공작이 금세 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나를 지나쳐 할머니를 뒤쫓았다. 어쩐지 그의 뒷모습에서도 무시무시한 분노의 아우라가 풍겼다. 그래, 공작도 화나겠지. 공작도 당한 게 얼만데!

    그 순간, 할머니가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스친 순간.

    “미르아!”

    벼락같이 외친 공작이 즉각 몸을 틀어 나를 감쌌다. 부딪치듯 안겼다. 뒤이어 펑, 터지는 소리. 세상이 흔들렸다. 공작과 충돌한 탓에 어깨가 욱신거렸다.

    번쩍 고개를 드니 공작의 결계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지난번에 황궁에서 본 바로 그 결계였다. 귀가에 흩어지는 급박한 숨소리. 공작을 밀어내고 상황을 살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분명 폭음이 들렸는데, 움푹 팬 땅도 부러진 나무도 불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공작의 어깨 너머를 보니, 제자리에 선 할머니가 나를 향해 씩 웃었다. 그러더니 식은땀 범벅인 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장난이야, 백작님. 소리만 요란해.”

    “이게……!”

    그 순간 공작의 금빛 결계가 더욱 선명해졌다. 넘실거리던 황금색 빛줄기가 아까보다 훨씬 더 촘촘하게 모여들었다. 결계 너머의 할머니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공작이 내 손을 꽉 잡으며 경고했다.

    “미르아, 위험합니다. 제게서 떨어지지 마세요.”

    나를 내려다보는 공작의 얼굴도 흥분과 놀라움 때문에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게 고정된 눈은 흔들리지 않았고 입술은 단호하게 다물려 있었다. 아까 보인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유릭스.”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그래, 할머니가 마법을 쓴다 해도 공작은 나를 지켜줄 거야.

    마음이 차분해진다. 공작은 트릭스터를 잡을 것이다. 그리고 내 원한을…… 아니, 내 창피함을…… 아무튼 내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 마법에는 마법으로!

    울렁이는 황금빛 너머로 할머니가 입을 둥글게 벌리고 웃었다. 뭔가 하려고 한다, 그렇게 느낀 그때.

    할머니가 오른손을 들었다. 검지와 중지가 만났다. 쪼글쪼글한 입술이 움직인다.

    “그리고 이것도 장난이야.”

    땅,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소리에 놀라서, 눈을 딱 한 번 깜빡였다.

    그러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으아아악!”

    저절로 비명이 터졌다.

    난 마법 학교 지붕 위에 있었으니까!

    바람이 야생마처럼 돌진해 내 가슴을 들이받는다. 끝없는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고, 먼 곳의 숲과 마을의 지붕과 황궁까지 훤히 보인다. 좀 과장하자면 구름과 눈높이가 똑같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내려다보면…….

    아, 안 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지붕의 경사가 꽤 가파르다. 오른발이 더 아래로 내려가서, 똑바로 설 수가 없다. 잡을 것도 없다. 까딱 잘못했다간 그대로 즉사다. 적색 벽돌 위에서 발이 미끄러질 것만 같다.

    온몸이 덜덜 떨린다. 고소공포증은 아니지만, 방금까지 산책로에 있다가 갑자기 지붕으로 날아왔다. 어떻게 내려가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지상의 사람들이 이쪽을 발견해 소란이 벌어진 모양인데, 제대로 내려다볼 수도 없다.

    “백작님.”

    갑작스러운 음성에 겨우 고개를 돌렸다.

    정면에 할머니가, 트릭스터가, 망할 놈의 괴물이 서 있다. 사나운 바람이 짧은 머리카락을 미친 듯 헝클어뜨려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경련하는 손으로 겨우 머리를 귀에 걸쳤다. 제대로 트인 시야에 하늘을 등진 할머니가 들어찬다.

    할머니는 내 기억과 똑같은 모습이다. 낡은 옷을 입은 특징 없는 노파. 그러나 지금은 내 최악의 적이다.

    “공작이 정말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 트릭스터로부터, 백작님 인생의 모순으로부터, 모든 사건 사고로부터?”

    목소리도 여전하다. 친근하고 인자하고 차분한 음성.

    심장이 폭풍 앞의 촛불처럼 떨렸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입술까지 바짝 마른다. 나는 여기, 모든 모순을 상징하는 괴물 앞에 무력한 인간으로서 넘어져 있다.

    이제야 공작이 왜 트릭스터를 막지 못했는지 알겠다. 공작도 운명 앞에서는, 모순 앞에서는 그냥 나랑 똑같은 사람일 뿐이니까.

    높은 곳의 차갑고 거친 공기가 나를 마구 밀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바람에 떠밀려 추락할 것만 같다. 뺨이 얼얼하고 눈알까지 시리다.

    죽을 위기는 많이 겪었다. 몇 번이나 돌이 될 뻔했고, 얼어 죽을 뻔도 했다. 아까는 창피해서 죽을 뻔했다. 그러니까 침착하자. 처음도 아니잖아. 침착해, 침착해…….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을 거야!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바람 소리를 뚫고 악쓰듯 물었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하필 나야? 내가 나쁜 짓 했어? 아님 우리 부모님한테 원한 있어? 바꿔 준 이동식 점포가 마음에 안 들었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유가!”

    할머니가 나를 보고 웃는다. 이번에는 잔잔하고 인자한 미소가 아니다. 이 괴물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마구 웃어젖힌다. 주름진 손으로 서너 차례 손뼉까지 친다.

    웃는 내내 할머니 옷이 심하게 나부낀다. 할머니는 거대한 까마귀나 지붕에 걸린 검은 깃발처럼 보인다. 저게 내 장례식 깃발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왜 웃어, 웃긴!

    “아, 백작님, 순진한 백작님.”

    마침내 웃음을 그친 할머니가 눈가를 찍어내며 고개를 젓는다.

    “오늘은 바람이 동쪽에서 부네. 밤에는 서쪽에서 불 거야. 이유가 뭘까?”

    “…뭐?”

    멍하게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돌덩어리를 가르치는 교수 같은 표정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저 숲을 자세히 보면 똑같은 초록색은 하나도 없어. 이유가 뭐지?”

    “개소리하지 마.”

    “사람은 왜 갑자기 죽지? 응? 왜 백작님은 몇 년 내내 운이 없었을까? 리리는 왜 하필 그렇게 많은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하필 그날 공작에게 발견되었지?”

    “…….”

    “피피온은 왜 투명 물약과 환각 물약을 헷갈렸고? 난 왜 백작님과 공작을 한 방에 집어넣고 문을 잠갔지? 백작님이 쓴 편지는 왜 뒤바뀌었고, 브라운 레타는 왜 그렇게 바보스럽게 굴었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나는 닥치고 이유나 말하라고 다그치지도,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멍하게 굳어 있었다.

    이건 뭔 개 같은 수수께끼야?

    할머니가 내 생각을 읽은 듯 낄낄 웃었다.

    “그래, 난 왜 이런 장난을 칠까? 프러포즈 받은 백작님을 지붕 꼭대기까지 데려오고 말이야.”

    할머니가 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나도 모르게 숨까지 멈추고 긴장했다. 나를 밀칠지도 몰라. 몸에 바짝 힘을 주었는데, 할머니는 그냥 내 귀에 입술을 댔을 뿐이다.

    우주의 비밀을 누설하듯 은밀하고 낮은 목소리.

    “그냥, 재밌잖아. 장난친 거야.”

    ……이 할망구가?

    [작품후기]*트릭스터: 보통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내 편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음

    *트릭스터가 로맨스 도와주니 환호한 분들 & 함께 환호했지만 뭔가 찜찜했던 분들께 이번편을 바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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