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참이에요!67회
트릭연참 2/2
미르아가 고백의 말을 고민하는 며칠 동안, 유릭스는 그 나름대로 무척 바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청혼 반지 때문이었다.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주는 반지를 바치며 청혼하는 이들도 많지만, 유릭스는 어머니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부모는 진작 영지를 물려주고 유람을 떠났으니까.
그리고 유릭스는 꼭 ‘가문’의 반지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미르아와 잘 어울리는, 새롭고 특별한 반지를 골라 나눠 끼고 싶었다. 미르아처럼 거침없고 과감하고 꾸밈없이 화사한 보석을 찾아야 했다.
새벽부터 나갈 준비를 마친 유릭스를 보고 레이번이 물었다.
“어딜 가십니까?”
“반지를 구해야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예정이다. 경은 안 와도 되는데.”
“같이 가야죠. 근데 웬 반지입니까?”
“청혼 반지.”
‘청혼.’ 그 단어를 발음하자 몸이 따뜻해졌다. 무척 어색하고 낯선 단어인데도 쉽게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모든 모서리가 사랑으로 둥글게 다듬어진 글자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부드럽게 구르지 못할 테니까.
이른 감은 있지만 유릭스는 머뭇거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레이번은 주군을 달콤한 의지 속에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예에? 청혼이요?”
레이번이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해 유릭스도 깜짝 놀랐다. 그는 놀란 기사를 대신해 현관문을 직접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라 사방이 조용했고, 그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기사에게 전해졌다.
“그래. 헥센 백작님께 청혼할 거야.”
“아, 아, 아니…….”
“백작님도 내 청혼을 기다리고 계셔.”
기가 막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레이번의 목소리가 기어이 뚝 끊어졌다.
유릭스도 애써 그를 납득시키려 들지 않았다. 사실 유릭스 자신도 이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왜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하게 되는지, 마음의 주저함은 어디로 증발했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본래 사랑은 수수께끼인가.
생각을 그치고 훌쩍 뛰듯이 말에 올랐다. 레이번은 “아니, 세상에, 무슨…….”하고 꿍얼꿍얼하면서도 자기 말에 올랐다.
말 두 마리가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소리가 정원에 번졌다. 막 잠에서 깬 새들이 하늘로 포르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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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이아 반지는 그야말로 최고의 물건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청혼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찾으시는 제품으로, 지난해 고객 대상 설문조사에서 선호도 1위를 차지한…….”
예쁘고 고급스러운 다이아몬드다. 하지만 너무 흔하고, 뻔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어쩐지 반지가 차가운 이미지다. 미르아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아주 특별한 제품이죠. 보석 안의 균열이 보이십니까? 잘 보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네, 영원을 상징하는 기호 같지요? 기막힌 상징 아닌가요?”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유릭스 눈에는 그냥 흠 있는 다이아몬드 같았다. 판매원과 함께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어 보느라 수고스럽기만 했다.
“꼭 다이아몬드일 필요가 있습니까? 이 진주를 보세요. 천연입니다, 천연. 아주 뽀얗고 반질반질하죠? 주문만 하시면 먼바다에서 즉시 가져와서…….”
‘다이아몬드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진주는 너무 무겁고 진중하다. 미르아에게는 좀 더 가볍고 명랑한 보석을 주고 싶었다.
몇 번이나 허탕을 친 후, 따라다니느라 지친 레이번이 참지 못하고 권했다.
“이러지 마시고 그냥 다른 귀족들 하는 것처럼 보석상을 불러다 처리하세요. 주문 제작하면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받아 볼 수 있을 텐데 뭘 고민하십니까.”
유릭스도 레이번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이렇게 갑자기 반지를 구하러 나온 것 자체가 성급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청혼’에 흔히 쓰이는 반지가 대체로 어떠한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하루 만에 열 개가 넘는 반지를 봤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래, 이만 돌아가지.”
벌써 늦은 저녁이었다. 수도 외곽까지 왔던 그들은 말머리를 반대로 돌렸다.
수도 한복판에 다다르자 거리가 혼잡해졌다. 유릭스와 레이번은 어지럽게 오가는 사람들을 피해 마차가 다니는 길로 말을 몰았다. 레이번은 터져 나오는 하품을 한 차례 삼키고 물었다.
“훈련한 것도 아닌데 몸이 지치네요. 공작님은 괜찮으십니까?”
“난 멀쩡해. 오히려 몸이 아주 가벼운데.”
“그래요? 사랑의 힘은 대단하네요.”
유릭스는 그런 낯간지러운 말도 마냥 기쁜 듯 웃더니, 뭐라고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인도에서 밀려 나온 노파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이쿠!”
노파는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며 딱딱한 돌바닥에 나뒹굴었다. 훈련된 말은 놀라서 앞발을 치켜드는 대신 즉각 제자리에 멈추었다. 유릭스도 레이번도 화들짝 놀라 말에서 내렸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어…….”
낡았지만 깨끗하게 손질한 로브를 두른 노파가 허리를 짚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노파가 안고 있던 자루에서 크고 작은 구슬 같은 것이 자르르 쏟아졌다. 그 구슬은 각자의 방향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괜찮으십니까?”
유릭스가 급히 노파를 부축했다. 레이번은 노파를 밀어 버린 이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사람들은 자기 갈 길을 가느라 분주할 뿐이었다.
유릭스는 조심스럽게 노파의 팔과 허리를 잡아 바닥에서 일으켰다. 노파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몸을 펴고 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닥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아이고, 내 보석들이! 어서 주워, 어서!”
대뜸 명령하는 태도에 레이번이 울컥했다. 그러나 유릭스는 손을 뻗어 그를 말리고, 누덕누덕 기운 자루를 들고 직접 보석을 줍기 시작했다.
“인도로 모시고 다친 곳 없는지 살펴 드려.”
예상한 지시라, 레이번은 그냥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분을 참았다. 그리고 노파를 인도로 데려간 후 유릭스 옆으로 와 함께 보석을 줍기 시작했다. 마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다행이었다.
유릭스는 어느새 묵직해진 자루를 들고 노파에게 다가갔다. 노파는 후드 아래 눈을 감추고 인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리 내!”
내미는 자루를 휙 낚아채는 모습에서는 고마움도 찾을 수 없었다.
거동도 힘든데 난데없이 봉변을 당했으니 마음에 여유가 없을 법도 하다. 유릭스는 따지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노파 앞에 몸을 낮춰 앉으며 이렇게 물었을 뿐.
“어디로 가는 길이셨나요? 마차를 불러 드리죠.”
유릭스가 화도 내지 않고 친절하게 묻자. 노파는 그제야 조금 마음이 풀린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자루를 만지작거리던 손에서 비로소 힘이 빠졌다. 노파는 자루를 꼭 안은 채 유릭스를 보더니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됐어. 가던 길 가.”
“그래도 도와드려야죠.”
“나 혼자 갈 수 있어.”
노파를 이대로 두고 가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까 넘어지며 다쳤을지도 모르지 않나. 한 번 더 권하려고 하는데, 노파가 갑자기 자루에서 보석 두 개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이거나 가져가.”
쪼글쪼글한 손바닥에 놓인 보석을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아몬드만 했는데, 특이하게도 검은색이었다.
그냥 검은색이 아니었다. 보라색과 어두운 청색이 한데 모여 있었다. 유릭스는 이와 똑같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분명 무척 따뜻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빛깔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정한 보석은 바닥에 뒹굴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지.”
무심하게 말을 던진 후, 노파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릭스는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노파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저녁 어스름이 스민 입술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벼린 칼처럼 예리하게 일어선다. 유릭스는 자신의 직감이 보내는 신호를 곧바로 해석하진 못했지만, 사로잡힌 사람처럼 노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노파가 씩 웃었다. 철부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였다.
“잘 가라고.”
자루를 든 노파가 휙 돌아서서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방금 심하게 넘어진 사람치고는 기민한 몸짓이었다. 손에 보석 두 개를 든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릭스가 급히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공작님!”
당황한 레이번이 부르는 소리도 무시했다. 유릭스는 유난히 자신을 밀치고 가로막는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갔지만, 노파의 모습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머리통조차 찾을 수 없었다.
“공작님, 왜 그러십니까?”
뒤늦게 따라온 레이번이 급히 물었다. 유릭스는 낭패한 표정으로 멀리까지 펼쳐진 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놓쳤어.”
잡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야말로 트릭스터와 마주쳤는데.
왜 바보처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나. 실망감과 자책으로 두 손을 꾹 움켜쥐는데, 오른손에서 보석 두 개가 자기들끼리 부딪쳐 달각거렸다.
유릭스는 손을 펼쳐 두 개의 보석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이 보석이 미르아의 눈과 똑같은 빛깔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처음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낀 것이다.
당연한 의구심이 치솟았다.
‘이걸 왜 줬지?’
설마 폭탄인가?
[작품후기]*저번에 미르아 집사할아버지한테 마지막 대답 안 한 거 알려준 분들 고마워요 여러분이 미르아의 목숨을 한번 구했습니다 :D 시켜줘 미르아 명예 소방관
*오늘 오타 검수를 못했어요 나중에..수정..해야하는데... 넘나 졸린것..매직아이로 봐주십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