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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65화 (65/74)
  • *연참이에요 여러분~!65회

    비밀 연애연참 2/2

    유릭스는 살면서 요즘과 같은 설렘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백작 생각뿐이었다. 매일 나누던 아침 톡톡도 너무나 특별해졌다. 톡톡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한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만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백작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만나자고 하면 거절하고, 먼저 연락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유릭스도 표현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백작의 마음은 자신만큼 크지 않은 게 아닐까,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부담스러워진 건 아닐까?

    그러니 백작이 먼저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 주었을 때 무척 기뻤다. 심지어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내일 저택 오시면 제가 잘 대접할게요!]

    [우리 오래 얘기해요!]

    유릭스는 레이번과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백작의 집사에게 줄 선물도 힘써 준비했다. 부모님 없이 나이 든 집사와 지내는 헥센 백작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선물은 크면 클수록 좋았다.

    게다가 백작의 집사는 레이번을 제외하면, 그들의 교제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백작과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거의 친척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젠 제게 아버지 같은 분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는데, 백작과 집사의 얼굴이 동시에 이상해졌다. 둘 다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긴 했지만, 공작은 그들이 동요를 또렷하게 알아보았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과했구나 싶어 재빨리 말을 보탰다.

    “만일 저와 백작님이 좀 더 특별한 관계가 된다면 말이죠.”

    “아, 예……. 아?”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집사의 기색이 일변했다. 그는 노련하게도 공작의 말 아래 깔린 희망을 알아본 듯했다. 순백의 레이스, 흩날리는 꽃, 쏟아지는 축복의 박수, 죽는 날까지 뺄 일 없을 한 쌍의 반지.

    결혼, 그 빛나는 희망을!

    적어도 유릭스는 그렇게 믿었다. 어쨌든 집사는 주름진 얼굴을 열심히 끄덕이며 공작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죠.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시다니, 어, 역시 빠르십니다. 그런 의미라면 선물을 거절할 수 없죠. 이 나이가 되어도 선물은 기쁜 법이랍니다. 허허, 허허허.”

    “그렇다니 저로선 다행입니다.”

    유릭스도 그림처럼 미소 지으며 감사에 화답했다.

    백작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삐걱거렸지만, 그래도 주인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유릭스를 잘 꾸며진 응접실로 안내하고, 차를 대접하고, 말 상대가 되어 준 것이다.

    유릭스는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응접실도 평소보다 더 깨끗하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오랜만에 백작과 단둘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공간의 주인인 백작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서인지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니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제 그들은 무려 ‘교제’하는 사이인데, 둘만의 공간에서 이렇게 멀리 앉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지난번 마차에서, 백작은 손잡는 일을 허락해 주지 않았나.

    그래서 유릭스는 과감히 물었다.

    “백작님, 함께 앉을까요?”

    “네? 지금 앉아 있잖아요?”

    되묻는 백작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유릭스는 그 앙증맞은 표정을 마음에 담으며 일어섰다. 그런 다음 백작 옆으로 가 그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이렇게요.”

    “…….”

    백작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싫은가 염려하며 얼굴을 살폈는데, 귀뿌리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인끼리 하는 행동이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백작의 솔직한 반응이 유릭스에게 용기를 주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유릭스가 무릎에 놓인 백작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 백작은 놀란 듯 움찔했지만, 손을 뿌리치거나 불쾌한 기색을 비치진 않았다. 그녀는 너무 긴장하고 너무 의식이 되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또 있을까? 유릭스는 당장 그녀를 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만나 주지 않으셔서, 혹시 제 마음이 너무 앞서간 것일까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뵈니 너무 좋네요.”

    “네? 네, 저, 저도 좋네요. 아, 못 만난 건 다 사정이 있었어요.”

    “이해합니다. 앞으로도 제게 종종 시간을 허락해 주세요.”

    그때, 백작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유릭스를 바라보았다.

    백작의 움직임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서, 유릭스는 사랑이 집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아주 작은 동작에도 온몸의 신경이 우르르 일어서 반응했다. 좀 더 수양하면 백작의 심장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백작의 검은 눈이 자신의 얼굴을 몇 차례 쓸었다. 살피는 듯한,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알아내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거리낄 게 없는 유릭스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의 시선을 감싸 안았다.

    그때, 백작의 입술이 열렸다. 잘 그려진 유화의 한 부분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뭐든 물어보세요.”

    백작이 눈을 깜빡거리며 망설였다. 눈동자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다시 가운데로 돌아왔다. 유릭스는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얼마든지 이대로 머물 수 있을 듯했다.

    “어제 저희가 새벽까지 얘기했잖아요?”

    “그랬죠.”

    뭐가 궁금한 걸까 했는데 어제 이야기가 나왔다. 유릭스의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 공작님은 원래 그렇게 늦게까지 톡톡하진 않으시죠?”

    어렵게 던져진 물음에 유릭스가 잠시 침묵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일단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네, 그렇진 않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도 하고, 영지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할 때도 새벽은 피하려고 하는 편인지라.”

    “아, 그렇군요.”

    “왜 그게 궁금하셨나요?”

    유릭스는 백작의 손등을 장난스럽게 쓸며 가볍게 물음을 되돌렸다. 바짝 붙어 앉은 탓에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서로가 내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유릭스는 백작이 긴장한 듯 숨을 멈추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백작은 과연 백작이었다. 그녀는 수줍게 떠는 일을 멈추고 결의에 찬 눈으로 유릭스와 시선을 맞댔다.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약간의 떨림이 남아 있었으나, 내용은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공작님은 친절한 분이니까, 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해주었을까 궁금해서요.”

    “아.”

    유릭스는 그제야 백작의 의도를 이해했다.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새벽까지 톡톡을 했을까 봐, 누구에게나 지나친 친근감을 표시하고 여지를 남길까 봐 불안했던 모양이다.

    유릭스는 도저히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백작의 사랑이 자신의 것보다 훨씬 작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앞서가선 안 된다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해 주다니! 앉은 채로 날아갈 수도 있을 듯했다.

    그리하여 유릭스는 사랑에 빠진 남자 특유의 다디단 음성으로 백작의 염려를 불식시켰다.

    “다른 사람과 그렇게 대화할 일은 없었습니다. 오직 백작님과만……. 백작님은 제게 너무나 특별한 분이니까요.”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은 오직 둘뿐. 게다가 주위도 놀랍도록 고요하다. 치맛자락을 흔들며 경쾌하게 춤추는 햇살. 부서진 별처럼 반짝거리는 먼지. 편안하고 시원한 향기. 백작의 작은 입술과 발갛게 상기된 뺨.

    무엇보다도 백작의 표정이 유릭스를 부추겼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빛나는 듯 보이는 검은 눈이, 기묘한 기대와 기다림을 품은 듯한 입술이, 유릭스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백작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좀 더 용기를 내요, 바로 지금이니까…….

    유릭스는 이미 가까운 백작에게로 살며시 몸을 기울였다.

    “어디까지 허락해 주실지 알 수가 없어서.”

    백작의 머리카락이 그의 눈앞에서 조금 흔들렸다. 자신을 응시하는 백작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거부도 없었다.

    “원치 않으신다면 고개를 돌려주세요.”

    흰 도화지에 심혈을 기울여 그린 듯한 입술이 바로 앞에 있다. 백작은 돌처럼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작은 신중하게, 그러나 과감하게 다가갔다.

    친절한 포식자처럼 백작을 머금었다.

    백작이 눈을 감았다. 유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한 허락, 온전한 수용이었다. 유릭스는 한 손으로 백작의 뺨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친 채, 깊은 키스를 이어갔다. 입술이 잠시 떨어지고, 또 급히 맞닿았다. 원래 하나였는데 오래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추운 티룸에 갇혀 나누었던 입맞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보다 훨씬 더 뜨겁고, 훨씬 더 느리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농밀했다. 유릭스는 백작의 머리를 보드랍게 쓸며 넘치는 환희에 차 마음껏 움직였다.

    백작의 몸은 이제 유릭스의 품에 반쯤 안겨 있었다. 치마가 구겨지고, 검은 단발머리가 뺨에 흐트러졌다. 이제 둘은 서로의 심장 소리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두 개의 심장이 똑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빠르게, 또 깊게.

    둘은 한참 후에야 떨어졌다. 달콤하고 독한 술을 연거푸 마신 듯, 둘의 눈이 몽롱했다. 유릭스는 지금이 기회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간절히 건네고 싶었던 청을, 지금의 백작이라면 쾌히 받아줄 것이다.

    “백작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저희 이제 서로 이름으로 부를까요?”

    백작이, 아니, 미르아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여전히 촉촉한 입술은 정신을 아찔하게 할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그녀의 대답 역시 그랬다.

    “네, 유릭스.”

    -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미르아와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고, 차를 마시고 서재를 구경했는데 날이 저물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배웅을 받으며 저택 밖으로 나왔다. 오전과 오후, 미르아의 태도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확신을 얻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유릭스가 손을 잡거나 뺨에 키스를 남겨도 전처럼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행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작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미르아와 인사를 나누고 떠나려는데, 집사가 다가왔다. 미르아는 수상쩍은 눈으로 집사를 바라보았지만, 유릭스의 대답이 좀 더 빨랐다.

    “물론입니다.”

    미르아는 집사를 향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가 마지못한 듯 자리를 떴다. 여기서 자기가 끼어드는 것도 이상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집사와 유릭스 둘만 남은 정원에는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미풍이 유릭스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고 갔다. 그는 저택으로 사라지는 미르아의 뒷모습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고, 집사는 사랑에 빠진 남자를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미르아가 사라지자, 집사가 입을 열었다. 평소답지 않은 진중한 어투였다.

    “공작님.”

    “네, 말씀하시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 아시지요?”

    음모라도 꾸미듯 은밀한 목소리였다. 절로 집중이 되는 음성이라 유릭스는 덩달아 긴장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는 비밀스레 눈짓하며 말을 계속했다.

    “너무 오래 머뭇거리면 때를 놓칩니다.”

    유릭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집사는 그가 자신이 말을 알아들었음을 확신했다. 누가 봐도 서로 호감이 넘치는데, 아직까지 교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집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공작이 서툴러 연장자의 조언을 필요로 한다면, 자기가 몇 마디 귀띔해 줄 차례였다.

    “밀기도 당기기도 애매해지기 전에 과감하게 하십쇼.”

    유릭스는 놀란 듯 눈썹을 움찔하며 집사를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집사와 헤어져 마차에 오르는 유릭스의 마음은 복잡하게 술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그들은 아직 제대로 교제하지도 않았다. 물론 오래 전부터 미르아에게 호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다짜고짜 밀어붙였다가 미르아가 달아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유릭스는 마차 창문을 통해 멀어지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불이 켜진 저택은 그의 마음을 공연히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그는 미르아의 침실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바라보고 있으니 그 창도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결심이 빛처럼 깃들었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자 저택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유릭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별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구름은 행복을 알리는 깃발처럼 하늘 높이 걸렸다. 유릭스의 심장은 개선을 알리는 북처럼 둥둥 울렸다.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중 최고의 날이었다. 미르아와 정말로 키스했고,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고, 그리고 너무나 감격스러운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까.

    미르아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청혼을!

    [작품후기]*껄껄껄껄껄껄껄껄껄껄

    Q. 미르아는 안 사귀는데 키스해도 이해하네요?

    A. 원래 서양 어드메선 안 사귀어도 키스한답디다^^

    Q. 그러기엔 공작이 너무 유교맨인데요?

    A. 아 다 K-로판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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