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64화 (64/74)
  • 64회

    비밀 연애연참 1/2

    “아가씨, 아직도 주무세요?”

    침실로 들어온 할아범이 불쑥 묻는다. 확실히 어제 늦게 누웠더니 잠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피곤하지는 않다. 기분 좋은 대화를 하고 자서 그런가.

    “아니야, 일어났어.”

    “웬일로 늦잠이에요?”

    “어제 톡톡하다가 늦게 잤거든. 두 시였나?”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리리가 미리 준비해 놓은 욕실로 향하는데, 할아범의 물음이 이어졌다.

    “누구랑 톡톡했는데 새벽까지 얘기했어요?”

    “아, 공작이랑.”

    “…예?”

    “데이라 공작님이랑……. 수다 떨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그리고 오늘 공작님 올 거야.”

    “끄헉!”

    갑자기 들린 비명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정장을 잘 차려 입은 할아범이 침대에 쓰러져 있다. 침대 시트를 정리하려다 그대로 혈압이 떨어져 쓰러진 모양새다! 혈압 관리 잘 하라니까!

    “할아범!”

    펄쩍 뛰며 달려갔다. 그러나 할아범은 침대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뭐야, 뭔데? 무슨 병인데!

    할아범이 핏발 선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얇은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띄엄띄엄 새어나왔다.

    “우리, 아가씨가, 으윽……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연애로의 첫발을!”

    “…….”

    괜히 걱정했네.

    휙 등을 돌렸다. 할아범은 너무나 멀쩡하게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따라왔다. 거의 웅변조의 말도 나를 성가시게 했다.

    “아가씨, 설마 저만 이렇게 흥분되는 겁니까? 누가 아무 관심 없는 사람과 새벽 두 시까지 얘기를 해요! 세상에 이런 일이, 제가 그토록 예측했던 일이 어젯밤에 비로소 성사되었단 말입니까아악!”

    “아, 그런 거 아니야.”

    괜히 희망 주지 마. 괜히 기대하면 더 상처 받는다고. 공작은 누구한테나 그럴 게 분명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예? 지나가는 사람 다 붙잡고 물어보십쇼, 누가 호감 없는 사람이랑 새벽까지 톡톡하나! 게다가 아가씨는 신세대의 사랑법을 모릅니까? 예? 톡톡 답장 속도와 반응의 강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호감도를 측정하는 바로 그 최신 기술!”

    탁, 욕실 문을 닫았다. 다행히 할아범은 욕실까지 따라 들어오진 않았지만, 혼자 신이 났는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문 하나를 통과한 탁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가씨가~ 드디어~ 연애를 하신다네~ 우리 옛 주인님들~ 얼마나 기쁘실까~ 나도 곧 손주를 안아보겠네~ 꼬마였던 우리 아가씨~ 돌덩이가 되어~ 죽을 줄 알았더니이이~”

    “그만 좀 해!”

    진짜 못 들어주겠네! 물소리로 노래를 묻어 버리고 평소보다 몸을 더 벅벅 문질러 닦았다.

    노래는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할아범의 말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내 안에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할아범 말도 일리는 있어. 안 그래?

    이건 자의식 과잉이 아니야. 짝사랑에 빠진 자 특유의 망상도 아니야. 나라도 호감 없는 사람과 새벽까지 톡톡하진 않을 것 같은데. 공작이 아무리 대단한 인성의 소유자여도, 응?

    게다가 얼마 전에 한 이야기를 생각해 봐……. 얼마 전부터 나랑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 만나고 싶어 하잖아. 내가 여러 번 거절했는데도. 황궁에 갈 때는 또 어땠는데? 내가 놀란 표정만 짓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정말로 키스…….

    “아아악!”

    소리를 질러서 생각을 지워냈다. 파닥거리며 물기를 닦고 가운을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그만, 그만해!

    다행히 할아범은 가고 없었다. 대신 리리가 와 있었는데, 딱히 내 시중을 들러 온 것 같진 않았다. 시중을 들러 왔다면 저렇게 흥미가 솟구치는 눈으로 서성거리고 있진 않을 테니까.

    “리리? 왜 그래?”

    “집사님한테 들었어요.”

    리리는 수줍은 듯 몸을 베베 꼬며 속삭였다. 놀랍게도 리리에겐 그런 모습마저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깃털보다 가벼운 할아범의 입이다. 분명 몇 분 안에 레디아도 알게 되겠지!

    할아범 톡톡을 부숴버리든지 해야지!

    내 생각을 읽지 못하는 리리는 눈을 반짝거리며 설명했다.

    “주인님과 데이라 공작님이 ‘그런’ 사이라고요.”

    “그런 사이?”

    리리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더니 경건하게 외쳤다.

    “아직 연인은 아니지만 곧 연인이 될 예정이고, 서로의 호감과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신중히 나아가고 있는 그런 사이 말이에요! 친구 이상 애인 미만! 줄여서 친이애미!”

    “…….”

    친이애미……. 되게 별론데?

    할아범에 이어 리리까지 이렇게 말하니 마음이 좀 더 심하게 흔들린다. 그, 그래. 발음은 좀 민망하지만 나랑 공작은 ‘친이애미’일지도 몰라.

    리리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열의에 찬 표정으로 다짐했다.

    “오늘 공작님이 오신다면서요! 저와 집사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단숨에 애인이 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게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도와주는 일 아닐까?”

    리리의 부담스러운 열정에 몸을 뒤로 빼며 중얼거렸는데, 갑자기 톡톡이 미친 듯 울리기 시작했다. 톡톡, 톡톡, 톡톡, 톡톡톡톡톡!

    무슨 급한 일인가 싶어 리리의 손을 놓고 허둥지둥 책상으로 갔다. 혹시 공작이 못 온다고 연락했나?

    화면을 확인하니 레디아의 톡톡이 쏟아져 있다.

    [진짜 웬일이에요]

    [집사님한테 다 들음]

    [새벽까지 톡톡했다면서요!!!!!!!!]

    [새벽톡톡은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행위!!!!]

    [오! 늘! 당!장!고! 백! 해!]

    [먼!저!해! 먼!저!해!]

    이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사망할 것 같다.

    근데 전처럼 무작정 기분 나쁘거나 어이가 없는 건 아니다. 한 번 마음에 떨어진 생각의 씨앗은 빠르게 뿌리를 내리고 새 잎을 밀어올리고 있다. 어쩌면 공작도 나한테 ‘그런’ 호감이 있나? 그런 건가?

    아, 갑자기 공작 얼굴 못 볼 것 같아!

    나는 허둥지둥 레디아와의 대화를 끝내고, 리리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리리는 이 옷을 가져왔다가 저 옷을 가져왔다가, 이 모자를 씌웠다가 저 구두를 신겼다가 하며 부산을 떨었다.

    정신없이 구는 리리와는 달리 나는 살짝 멍했다.

    진짠가? 새벽 톡톡은 정말 호감의 표시인가? 응? 어쩌면 공작과 나는 정말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의 그런 애매한 사이인 건가? 여기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건가!

    “아가씨, 데이라 공작이 왔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장하고 현관에 서 있었다.

    시, 시간이 언제 이렇게 갔어?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현관 밖으로 마중을 나가고 싶어서 문을 열었다. 따라오던 할아범과 리리가 힘내라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뭘 힘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은 해야 하니 알겠다고 말했다.

    심호흡을 했다. 오늘따라 날씨도 눈에 안 들어온다. 대충 파란 건 하늘이고 하얀 건 구름이지, 뭐. 공기가 어쩌고 정원이 어쩌고 뭐가 중요해.

    공작의 마차가 느리게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는데 말이야!

    마차 바퀴에 햇빛이 감겨 눈이 부시다.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는데, 마차가 가까운 곳에 멈춘다. 문이 열리고, 공작의 구두가 먼저 나타난다. 매끈하게 닦이고 끈이 야무지게 조여진 날렵한 구두다.

    공작은 완벽한 정장 차림이다. 자주 보던 마법사 제복도 아니다. 차콜 그레이 재킷에 똑같은 색의 바지, 정성 들여 묶은 진청색 넥타이, 단호하고 정중하게 접힌 와이셔츠 깃.

    빛이 춤추는 이마, 또렷하고 강인한 눈썹, 그 아래로 보이는 푸른 눈에서 넘실거리는 기쁨과 애정이 나를 흠뻑 적신다. 아주 따뜻하고, 산뜻하게 젖어 버린다.

    공작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같은 사람에게 두 번째로 반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지금이다.

    “백작님, 오랜만에 뵈니 더욱 기쁩니다.”

    그는 거의 달리다시피 내게 왔다.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뛰어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쳐다만 봤는데, 공작은 그마저도 좋은지 들꽃 같은 미소만 띄웠다.

    공작은 내 뺨에 입을 맞추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가, 곁에 선 리리를 보고 살짝 물러났다. 그리고 넋을 놓은 내 오른손을 들어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공작이 고개를 들자 다시 눈이 마주쳤고, 공작은 눈썹을 찡긋해 보였다.

    마치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그러하듯.

    공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옆에서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 있는 할아범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아주 점잖고 정중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선물을 준비했는데, 뭘 가져와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정성도 함께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예? 아, 저, 저한테요?”

    할아범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린다. 아, 할아범한테 선물 얘기 한다는 걸 잊었네. 근데 공작이 왜 할아범한테 선물을 주는지 몰라서…….

    곧 공작의 마차를 몰고 온 마부가 마차 짐칸에서 거대한 상자를 하나 내렸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노란 실크로 정성껏 감겨 있는 걸 보니 초라한 선물은 아닐 것 같다.

    할아범은 갑작스러운 선물에 놀라 자빠지기 직전이다. 할아범은 구원을 청하듯 나를 한 번 보았다가, 내 표정을 보고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니, 공작님. 저한테 갑자기 왜 선물을 주시는지요?”

    공작은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할아범이 그렇게 묻자마자, 약혼녀 집에 처음 인사 온 사람처럼 달게 웃었으니까.

    “이젠 제게 아버지 같은 분이니까요.”

    …출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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