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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61화 (61/74)
  • *분량이 좀 애매해서 연참입니다! 다음편으로 가주세요!61회

    비밀 연애연참 2/2

    짝사랑이든 뭐든, 일단 황궁으로 가는 일이 바쁘다. 리리를 돌아보며 대답을 챙겼다.

    “일단 갔다 올게.”

    할아범과 리리가 서로 은밀한 시선을 교환했다. 눈빛 대화를 정확히 번역할 수 없으니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범 입가가 방정맞게 씰룩거리는 건 분명히 목격했다.

    심지어 할아범은 ‘좋은 시간 보내세요!’라고 말하듯 내게 말했다.

    “그럼 공작님이 오셨으니 저는 안 가도 되겠군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 말에 대답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공작이었다.

    “안전하게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공작님 내가 어디 가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뭐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건데?

    할아범에게 등 떠밀려 엉겁결에 마차를 탔다.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할아범에게 마지막 대답을 하는 걸 까먹을 뻔했다. 리리와 할아범 모두에게 대답을 했는지 체크한 후에야 겨우 마차를 출발시켰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같이 황궁으로 가는 거야 트릭스터 일 때문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공작은 갑자기 왜 ‘보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으며(이건 나도 공작이 보고 싶었던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왜 내 옆에 앉아 저렇게 호의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인가?

    힐끗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눈이 마주친 공작은 해를 만난 해바라기처럼 맑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무릎에 얌전히 내려놓았던 손이 저절로 움찔했다. 공작의 손은 따뜻했고, 감싸는 듯한 움직임은 그답게 다정…….

    정신 차려,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니야!

    그런데 공작은 내게 틈을 주지 않고 시간차 공격을 퍼부었다.

    “백작님께 연락을 드리고 싶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어제 백작님이 제게 오셨던 일이 꿈은 아닐까 생각했죠.”

    “아, 예……. 물론 꿈은 아니죠.”

    “네.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곧장 저택으로 와서 황궁까지 모실 수 있게 되었네요. 트릭스터가 심한 장난을 친 게 얼마 전이니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뭐가 실감이 난다는 거지? 대화 주제가 휙휙 달라져서, 의문을 해결할 기회를 놓쳤다.

    그 화제가 끝난 후에도 공작은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다. 원래 다정한 사람이기는 한데, 평소와 결이 다른 다정이었다고 해야 할까. 작은 마차 안에서, 나는 공작의 연인이 된 듯한 착각에 몇 번이나 사로잡혔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백작님, 잠시 눈을 감아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왜? 놀라서 눈을 감기는커녕 더 동그랗게 떴더니, 공작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엉뚱한 짓을 할 때, 귀여운 동물과 닮아 보일 때 비져나오는 그런 웃음이었다.

    솔직히 어떤 언어조차 담아내지 못할 듯한 그 웃음에 넋을 잃은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바로 눈을 감진 않았다. 공작이 덧붙여 설명했다.

    “눈가에 티끌이 묻어서요.”

    “아, 여기요? 아님 여기?”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털었다 왼쪽을 털었다 했더니, 공작이 먼저 손을 뻗었다.

    “아니요, 여기…….”

    공작의 몸이 나를 향해 미세하게 기울었다. 가까워지는 손, 그 손이 내 얼굴에 드리우는 그림자, 또렷하게 느껴지는 체온, 숨소리, 오직 내게 고정된 공작의 짙푸른 눈동자…….

    공작의 손끝이 내 눈가에 살짝 닿았다. 스치듯 건드리고 떨어졌을 뿐인데, 숨까지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가까이 온 공작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공작의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져 있었고, 그는 사냥감을 덮칠 타이밍을 정확히 아는 맹수처럼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몸이 간질간질하고 작은 자극에도 취약해진다. 공작은 여전히 너무나 유순하고 성실한 얼굴인데, 나를 담은 두 눈은 평소와 너무나 달라 홀릴 것만 같다.

    이, 이 야릇한 분위기 뭐지?

    다음 순간, 공작이 무언가를 참아내듯 입을 다물며 뒤로 물러났다. 떼어낸 티끌을 치우며 그가 가볍게 말했다.

    “그럼 내릴까요?”

    “…….”

    황궁엔 또 언제 도착했어.

    아니, 그보다 이거 괜찮은 거야? 방금 뭔가, 뭔가, 잘 모르지만 ‘그런’ 분위기 아니었어? 나한테 키스하려고 한 거 아니냐고! 딱 눈빛이 잠긴 방에서 나 잡아채서 키스했을 때 그 눈빛이었는데!

    근데 공작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다. 그는 내리기 전에 나한테 이렇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성급하게 해선 안 되겠죠.”

    “네?”

    대체 뭘?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순간 황궁 시종이 밖에서 마차 문을 열었다. 그쪽과 몇 마디 나누느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자꾸 대답하는 그 시종에게 계속 대답하느라고, 공작과 제대로 이야기 할 타이밍을 놓쳤다.

    폐하를 만나러 걸어가는 내내 공작의 이상 행동을 놓고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공작은 옷도 엄청나게 신경 써서 입었다. 오늘 뭔가 확실히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지? 신변에 중대한 변화라도 생겼나?

    이유가 뭐든, 이러다가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혼란에 휩싸여 걷다 보니 어느새 알현실 앞이다. 문이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렸다. 붉은 카펫을 따라 폐하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환영 인사가 들렸다.

    “잘 왔다. 조만간 둘이 같이 올 거라고 짐작했는데, 역시 내 감도 아직 죽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일단 인사부터 챙겼다.

    “급히 청했는데 시간을 내어 주시니 기쁩니다. 톡톡으로 인해 불편하지 않으셨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폐하.”

    폐하는 그냥 씩 웃었다. 그러더니 비뚤게 쓴 관이 더 비뚤어지도록 휘휘 손을 내저었다.

    “인사치레는 됐고. 오히려 톡톡이 안 되는 걸 알자마자 백작 얼굴을 볼 수 있겠구나 하고 기뻤지. 백작은 통 내게 소홀하니 말이야.”

    “폐하, 아닙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말만.”

    폐하의 기분을 맞춰 드리기 위해 최대한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톡톡 때문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니 다행이다. 오늘도 그냥 무난하게 몇 마디 나누다가 돌아가면 되겠어.

    그러나 그때, 폐하 쪽에서 절대 무난하지 않은 말을 던졌다.

    “공작은 표정이 밝구나. 그래, 수도에 오니 좋은 일도 많이 생긴 모양이지?”

    질문을 받은 공작이 살며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그가 뿌듯하게 웃으며 다시 폐하에게 답했다.

    “네. 트릭스터 때문에 수도에 왔지만, 때로는 좋지 않은 일이 선물로 변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으하하하!”

    웃긴 대답도 아니었는데 폐하가 갑자기 무릎까지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림자처럼 구석구석 조용히 서 있던 시녀와 기사가 움찔할 정도였다.

    공작을 제외한 모두를 당황스럽게 만든 폐하는 겨우 웃음을 멈춘 후, 눈물까지 고인 듯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러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나와 공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조만간 아름다운 소식을 기대하겠다.”

    아름다운 소식? 어리둥절해 있는데 공작은 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마음을 기울여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래, 그래. 내 젊은이들의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아선 안 되겠지. 하지만 내가, 콜록, 콜록, 나이가 들어서 이제, 오래 기다릴 시간이 없구나. 콜록, 콜록…….”

    “…….”

    이 과장되고 서툰 연기에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시녀와 기사가 어색한 미소를 짓기는 했다.

    과연 권력이란 좋은 것이다. 겨우 마흔다섯 살인 폐하가 ‘오래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농담을 해도 웃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만 물러가 봐라.”

    “네, 폐하.”

    인사를 하고 나갈 때, 뒤통수가 폐하의 시선 때문에 따끔거렸다.

    오늘은 여러모로 이상한 날이다. 공작의 태도도 변했고, 폐하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고. 공작에게 생긴 ‘좋은 일’은 또 뭐기에 ‘아름다운 소식’까지 기다린대? 어디 투자했다가 대박이라도 났나?

    황궁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그때까지도 폐하와 공작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는데, 공작이 내게 고개를 돌리고 갑자기 물었다.

    “백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폐하 앞에서 별다른 말씀이 없으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당분간 알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뭘 알리지 않는다는 거야? 알아듣지 못하고 쳐다만 보았다. 공작은 자기가 받은 가장 귀중하고 은밀한 선물에 대해 말하는 소년처럼,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속삭였다.

    “어제 주신 편지 말입니다.”

    아, 트릭스터 얘기구나. 근데 그게 저렇게 수줍어하며 꺼낼 얘긴가. 어쩐지 분위기가 간지러워져서 두 손만 꼭 맞잡았다.

    “그거요? 어차피 비밀로 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할아범도 내 저주 내용을 알지만, 남에게 그것을 발설할 수 없다. 공작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공작의 눈가에 이유 모를 실망과 아쉬움이 너울졌다. 그는 나를 설득할까 말까 고민하듯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단념한 듯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공작의 손이 내 손으로 다가왔다. 또, 잡으려고 한다. 알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하기는커녕 내심 기다리기까지 했다. 이미 어떤 느낌일지 아는데도 처음처럼 긴장이 된다. 이건, 이건 에스코트할 때 손잡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깍지 껴 맞잡은 내 두 손을, 공작의 큰 손이 살며시 덮었다. 그는 엄지로 내 손등을 소중하게 쓸었다.

    “이 정도는 허락해 주시겠지요?”

    그렇게 묻는 공작은 어딘지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짝사랑은 마법이다. 공작이 내게 마법을 건 게 분명하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바로 손부터 쳐내고 아침 잘못 먹었냐고 따졌을 텐데, 공작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심지어 내 머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가장 덜 어색한지 미리 고민하기까지 했다!

    마법에 걸린 입술이 저절로 움직여 답을 내놓았다.

    “네, 그럼요…….”

    오늘 정말 이상하고 기분 좋은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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