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57화 (57/74)

*주말 지나고 올게요!!!! 모두모두 해피주말~!57회

네 저주를 남에게 알리지 말라“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뒤에서 머리를 만져 주던 리리가 슥 내 이마를 짚었다.

전에는 늘 손이 차갑더니, 이제는 미지근하다. 공작 덕분이지. 자연스럽게 공작에게로 흐르는 생각을 끊어내며, 리리의 손을 잡아 내렸다.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거울 속 내 얼굴은 확실히 피곤해 보인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너무 격렬한 심경 변화를 겪어서가 분명하다.

리리가 다시 내 머리를 빗어 주며 조곤조곤 말했다.

“어제 소동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죠. 집사님도 깜짝 놀라셨대요, 갑자기 손님이 둘이나 와서.”

“아, 공작이랑 레타 씨. 둘 다 금방 돌아갔어.”

“요즘 데이라 공작님과는 좀 어떠세요?”

“응?”

리리는 대답 없이 거울로 내 눈을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첫 연애를 하며 수줍어하는 딸을 보는 표정이군. 할아범도, 레디아도, 리리도, 도대체 왜 저런 표정들을 자주 짓는 건지 모를 노릇이다.

오히려 지금은 내 마음이 좀 조용하다. 고백하지 않겠다고 확실히 마음먹고 나니 차분해졌다.

“별일 없었지. 오늘도 만나서 편지만 주고 올 거야.”

“집사님은 저녁까지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엥?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했지?”

“손주 볼지도 모른다고 엄청 기대하고 계시던데…….”

“리리! 할아범이랑 수다 그만 떨어. 다 헛소리야.”

리리는 슬쩍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았는지, 그녀는 농담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검정색 카노티에를 씌워 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일찍 오시는 거죠? 공부하면서 기다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리리를 돌아보았다. 리리는 전부터 마법 공부에 열심이다. 할아범에게 교재든 뭐든 필요한 건 다 사다 주라고 해놓고 정작 내가 신경을 못 썼네.

왠지 그동안 내 일에만 정신이 팔려 지낸 듯해서, 좀 미안해졌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이렇게 무섭구나. 리리와 앉아 차를 마신 지도 오래된 것 같다.

리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곧 학교 소집일이지? 나랑 같이 가자.”

“아, 알고 계셨어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당연히 알지. 내가 요즘…… 바빠서 그렇지, 네 일도 신경 쓰고 있어.”

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어깨에 얹힌 내 손을 살짝 덮더니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해요. 다 주인님 덕분이에요.”

“네가 타고난 덕이지.”

그래, 오늘은 일찍 돌아와서 리리와 수다나 떨어야겠다. 지금까지는 좀 부끄러워서 공작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힘든 짝사랑인데 어디 털어놓을 데라도 있어야지.

리리의 배웅을 받으며 할아범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할아범은 마부석으로 가지 않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가 출발하고, 할아범의 시선이 내 노란색 손가방에 닿았다.

“그 봉투는 뭡니까?”

“봉투? 아.”

편지 봉투가 살짝 삐져나와 있다. 아까 집무실에서 급하게 챙겼더니 제대로 안 들어간 모양이다. 어제 내가 놓은 모양 그대로 놓여 있던 봉투를 집는데 어찌나 마음이 심란하던지.

봉투를 제대로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공작한테 설명하는 편지야. 저주 얘기.”

“네? 저주에 대해서요?”

“할아범, 몰랐지? 종이에 쓸 수 있더라?”

그래도 할아범이라도 내 저주에 대해 알아서 정말 다행이다. 아무도 몰랐다면 답답해서 속이 터져 버렸을지도 몰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할아범도 관심을 보이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도 좀 보여 주세요. 진짜 종이에 저주 내용을 쓸 수 있다고요?”

“응. 잠깐만.”

할아범에게 한 번 보여 주는 건 상관없겠지 싶어서,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하지만 봉투를 보자마자, 편지를 보여 줄 수 없는 이유가 떠올랐다.

“아, 아까 출발하기 전에 봉투 붙여 놨어.”

억지로 뜯으면 봉투가 망가질 것이다. 공작에게 너덜너덜한 봉투를 건넬 수는 없지.

할아범은 잘 붙여진 봉투를 보더니 단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쉴 새 없이 ‘정말 공작에게 저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머잖아 마차가 데이라 공작 저택에 도착했다.

현관과 멀지 않은 곳에서 마차가 섰다. 할아범이 문을 열어주었는데, 내 손을 잡은 사람은 할아범이 아니라 공작이었다.

……공작?

“아, 안녕하세요.”

마차에서 다 내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인사했다. 공작은 평소보다 기운 없어 보이는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백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톡톡으로 방문을 알리긴 했지만, 이렇게 나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 사교 모임 때도 현관 밖에서 날 기다렸었지.

이렇게 친절하니, 내가 흔들린 것도 당연해……. 하지만 울적해질 필요는 없다. 괜한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오늘의 할 일을 하자!

부러 명랑한 기색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힘 있게 땅을 밟고 서니, 에스코트하던 공작의 얼굴이 좀 더 어두워진다.

음, 어디 아픈가? 내가 밝게 행동할수록 공작이 더 우울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그냥 착각이겠지?

“매번 이렇게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뵈러 올라가도 되는데.”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어조를 가볍게 했다. 공작은 내 얼굴을 한 번 살피더니, 눈을 마주치는 대신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닙니다. 백작님이 와 주시는 일은 제 기쁨인 걸요.”

“음…….”

근데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데요?

그렇게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혹시 어제 일로 내가 자기를 홀대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일단은 편지를 준 다음에 생각하자. 너무 하나하나 캐묻는 것도 실례야.

공작은 따뜻한 응접실로 나를 데려갔다. 몇 차례 와 본 곳이라 이제는 그리 어색하지도 않다. 제일 어색한 건 공작의 어두운 표정이다. 나와 있을 때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나와 공작은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사이의 테이블에 손가방을 내려놓고, 지금 바로 편지를 줄지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가 줄지 고민했다.

다행히 공작이 내 고민을 덜어주었다.

“오늘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지요. 들을 준비가 됐습니다.”

“아, 네…….”

더는 못 참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얼굴이 저래?

“아니, 근데 어디 아프세요? 얼굴빛이 너무 안 좋으시네요.”

공작이 긴장과 슬픔이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자꾸 저러니, 사형 선고라도 하러 온 기분이다. 도대체 왜 저러지. 누가 공작을 우울하게 한 거야? 저렇게 대단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다니, 재주다, 재주.

“괜찮습니다. 그보다 백작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친구로서…… 친구로서, 축하해 드리겠습니다.”

공작은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고통스럽게 말을 맺었다. 저놈의 친구, 친구, 친구!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 있었다.

“뭘 축하해 주시는데요?”

“백작님의…… 백작님의…….”

“네?”

“…아시지 않습니까.”

공작은 거의 원망하는 투로 속삭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혹시 어제 일을 뭔가 심각한 방향으로 오해한 건가?

나는 손가방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공작에게 내밀었다. 일단은 편지를 전해준 다음에 생각하자.

“공작님. 일단 이거부터 한 번 읽어 주세요.”

아, 왜 떨리지? 공작에게 저주를 털어 놓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제 공작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내 저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된다.

연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위험한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되는 셈이지. 그래서 이렇게 떨리나?

공작은 작은 폭탄이라도 발견한 듯 주저하더니, 마지못해 봉투를 받았다.

“말로 전하기 어려운 일이라 종이에 적었어요. 읽어 주시면 저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실 거예요.”

“네, 그렇군요…….”

공작은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결단한 듯 봉투를 뜯었다. 잘 접어놓은 흰 종이를 안에서 꺼낸 그는, 황제 폐하의 자결 명령서라도 받아든 듯 비장한 얼굴이었다. 그 편지가 당장 괴물로 변해 자기 머리를 으적으적 씹을 거라고 믿는 게 분명했다.

…그런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공작이지 내가 아닌데?

공작은 천천히 편지를 펼쳤다. 종이 스치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또렷하게 울렸다. 공작은 섬세한 손으로 편지를 쥐고 글자를 위에서부터 읽어 내려갔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공작의 얼굴을 관찰했다. 안 믿는 건 아니겠지? 그래, 설마 내가 트릭스터 가지고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겠어? 뭐라고 말할까. 같이 힘을 합해서 트릭스터를 잡자고 하려나?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나?

과연, 공작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문장 위를 오가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아마 트릭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거겠지.

그는 한 차례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요, 놀란 마음 이해합니다. 마저 읽으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은 어쩐지 감격한 얼굴로 편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공작의 얼굴을 뒤덮었던 먹구름이 미친 듯한 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긴장과 체념의 빛이 가득하던 눈가에 갑자기 환한 기쁨이 어렸다. 입술은 환희를 머금고 살짝 벌어졌고, 어느 문장에 이르러서는 뺨에 홍조마저 올랐다. 그의 시선은 한참 동안 같은 곳에 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음……. 저렇게 표정이 밝아질 내용은 아닌데…….

공작이 마침내 시선을 돌려 맞은편에 앉은 나를 보았다. 얼굴 곳곳에, 열정과 환희가 노란 프리지아처럼 피어나 있었다.

내, 내가 저주 받은 게 저렇게 기쁜가?

“백작님…….”

“네, 네?”

공작이 너무나 기쁨과 감격에 찬 목소리로 불러서 절로 대답이 흔들렸다. 그러나 공작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편지를 조심조심 접어 다시 봉투에 넣더니, 단숨에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공작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야, 뭐 또 사과할 일이 있어? 또 자기 때문에 내가 저주받았다고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공작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내 손을 자기 두 손으로 꼭 감싼 공작이 벅찬 얼굴로 말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백작님의 편지를 읽으니 모든 오해가 사라지는군요.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겁니다.”

“네? 아, 아, 네. 아뇨, 되게 많이 기뻐 보이는데요…….”

역시 나랑 브라운 레타 사이를 오해했던 모양이다. 음, 근데 그 오해 풀린 게 이렇게 기쁠 일인가? 공작은 너무 기뻐서 앞도 제대로 못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비유적인 얘기다.

“백작님, 제게 이런 말이 허락된다면.”

공작이 내 손을 자기 심장 부근으로 이끌었다. 멍하게 그의 가슴에 손을 댔는데, 심장이 그야말로 미친 듯 뛰고 있었다. 내가 공작을 바라볼 때마다 그러하듯이. 놀라서 공작을 바라본 순간, 행복에 찬 속삭임이 들려왔다.

“저 역시 백작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무슨 소리야? 공작도 저주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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